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6화
비체라발리 공작은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의 만남이 있던 다음 날, 기사를 통해 책을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질도 우수했다. 기사가 전해 준 설명에 따르면 전 5권으로 이루어진 책은 중복 내용이 없으며, 현존하는 최고의 식물학 서적이라고 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친절하게 대하는 기사의 모습을 보면서 레이블라는 다시금 비체라발리 가문에 대한 선입견을 지워 버렸다.
이 가문은 천사다.
그래서 레이블라는 그에게 바로 보답을 하기로 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일 ‘영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2부에서 억울하게 빼앗겼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시기가 다소 이른 것 같기는 하지만, 레이블라는 아는 것을 토대로 자세하게 내용을 적어 기사의 편에 보내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면 황제의 뒤통수도 쳐 줬으면 싶었다. 그럼 이 부조리한 일상이 조금은 행복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해도 해독제를 찾지 못하는 이상 현실은 여전히 지옥이겠지만.
“꺄하하하!”
반면에 이 세상의 유일신. 에리나 커티스 라스텔은 세상이 천국 같은 모양이었다.
오늘도 미소를 흩날리며 온몸으로 행복을 외치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전하! 그러다가 또 다치시면 어쩌시려고요!”
“괜찮아!”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에리나는 드넓은 푸른 들판에서 새하얀 조랑말을 타고 신나게 달리는 중이었다. 그녀의 곁으로는 세 명의 기사들이 함께했지만, 제일 앞서 달리는 것은 에리나였다. 다그닥다그닥 소리를 내며 달리는 말 위에서 에리나는 여느 때보다 즐거워했으며, 그 웃음소리는 하늘에 뜬 해님에게도 닿을 만큼 커다랬다.
말 그대로 행복이 웃음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승마는 회귀 전 에리나에게는 동경하던 일 중 하나였으니까.
회귀 전만 해도 허름한 궁에서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홀로 지냈던 에리나는 의례상 다른 귀족 가문의 영애들과 티 파티에 참여할 때마다 승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아빠가 말을 주셨어.’
‘아빠가 말 타는 법을 알려 주셨어!’
귀족가 영애들은 부모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자랑해 댔다.
당시 폭군 아빠에게 외면당하고 있던 에리나에게 있어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에리나가 회귀하고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녀가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이 바로 ‘넓은 들판이 있는 집을 사서 나도 말을 타야지’였다.
그토록 하고 싶던 일을 이뤘으니 지금 즐거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오늘따라 우리 전하,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폐하께서 주신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 봐요.”
황녀를 지켜보던 시녀들의 입에서 찬양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솔직히, 레이블라도 그 말들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7살의 소녀는 꿀물이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금발에 가을 하늘의 해 질 녘 노을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닌 데다, 피부는 흰 우유만큼이나 하얗고 고왔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우아하고 인형 같고…… 등등. 이 세상 모든 미사여구를 갖다 박은 듯한 아이가 바로 황녀였다.
생김새만으로도 어여쁜 아이가 방긋방긋 웃는데,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저렇게 놀다가 피곤해서 저녁 식사를 놓치실까 걱정이에요. 고기를 잘게 간 수프를 준비해야겠어요.”
“영상석으로 제대로 찍고 계시죠?”
“당연하죠! 저기 애슐리 경도 찍고 계세요.”
레이블라 근처에 있던 시녀 한 명이 에리나의 곁에서 달리는 기사 중 한 명을 가리켰다. 여유롭게 말을 타면서 황녀를 향해 상체를 기울인 사내였다.
케인 애슐리. 황녀가 무어라 할 때마다 헤실헤실 웃으며 시키는 건 뭐든 하는 발 닦개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을 풍비박산 낸 놈이지.’
황녀를 위하는 마음이 큰 만큼, 황녀를 괴롭히는 세력을 응징하는 일 또한 앞장서서 하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지난 사건 때 펠리시티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말에서 떨어져라, 나쁜 놈아.’
우물우물. 레이블라는 놀이를 마친 황녀가 먹게 될 간식을 씹어 삼키며 진득하게 케인을 쏘아보았다. 황궁 기사 중에서 승마 실력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라 하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아나? 간절하게 저주하면 하늘이 이루어 줄지.
하지만 아픈 것은 그녀의 눈뿐이었다.
눈이 피로해진 레이블라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앞에는 아직 채 먹지 못한 달콤한 디저트들이 여럿 있었다.
마시멜로라든가, 마시멜로든가, 마시멜로 같은 놈들.
‘마시멜로 동산이라도 만들겠네.’
육아물 여주들은 왜 혀가 녹다 못해 썩을 것같이 다디단 마시멜로를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입맛에 혀를 내두르며 푹 찍어 하나씩 입에 넣는데, 갑자기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애슐리 경!”
“어머, 어떡해!”
……애슐리?
소란의 중심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닥을 뒹굴고 있는 케인 애슐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말 혼자 저만치 앞서 나간 것을 보니 떨어진 모양이었다.
“애슐리 경! 괜찮아?”
한참을 앞서 나가던 에리나가 뒤늦게 돌아와 케인에게 괜찮으냐, 아프지 않으냐 물었다. 케인은 그의 걱정에 울먹이는 에리나를 보면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아…… 황녀 전하께서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저는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죽으면 안 돼!”
“하하.”
능청스럽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제법 통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황녀가 다른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말에 오르자 케인의 표정이 한껏 굳어졌다. 팔을 감싸는 표정에서 고통이 묻어났다.
레이블라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마시멜로를 입에 넣었다.
웬일인지 거북하기만 했던 마시멜로가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기꺼움에 헤실헤실 웃으며 마시멜로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음, 달달한 맛이야.
* * *
케인 애슐리의 부상으로 인해 황녀의 승마 놀이는 예상보다 이른 시각에 끝이 났다.
당연히 레이블라는 빠르게 시식을 끝마치고 자리를 피했다. 황녀와 마주치지 못하게 하려는 시녀들의 수작도 있었지만, 레이블라 또한 그녀와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황녀의 시식가를 하라면서 숨어 있으라는 말이 어이없기는 했다. 게다가 그 이유라는 것이 황녀가 펠리시티를 만나면 충격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 거면 그냥 다른 사람을 시식가로 뽑는 게 낫지 않을까?
처음에는 이 멍청한 짓도 며칠 못 갈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녀들이 제법 완벽하게 황녀의 시선을 돌리고, 레이블라 또한 죽기 살기로 피해 다닌 통에 아직은 들키지 않은 채 지낼 수 있었다.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녀장이 황녀의 눈에 띄지 않게끔 꼭 머리를 싸고 다니라며 준 두건 때문인지,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한적한 자리로 피한 레이블라는 여느 때처럼 음식을 모두 게워 내고 가져온 수통으로 입을 헹구었다.
‘이제 이 짓도 얼마 남지 않았어.’
비체라발리 공작이 가져다준 책은 정말로 유용했다. 며칠간 확인한 끝에, 레이블라는 ‘만능 해독초’로 추정되는 식물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라플이라는 꽃이었다.
‘매니시 나무 근처에서 드물게 자란다고 했지.’
매니시 나무는 정원사들에게는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식물이었다.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 예쁘기는 하지만 1년에 딱 일주일만 피었고, 이후에는 벌이나 벌레가 잘 꼬여 다른 식물에 해가 되었다. 관리가 워낙 까다로운 탓에 찾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황궁의 정원수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만약 황궁에서 해독초가 많이 발견되었다는 원작 설정이 맞다면, 분명 어딘가에는 매니시 나무가 자생하고 있을 것이고, 해독초 또한 그 군락에 피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정원수 중에 없다면 황궁을 둘러싸고 있는 숲에 있겠지.’
레이블라는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숲을 눈에 담았다. 한 번 길을 잃으면 죽어서도 나오지 못한다고 하여 ‘망자의 숲’이라고 불렸다. 실종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터라 황궁에 온 사람들이 제일 처음 듣는 말 또한 ‘망자의 숲’에는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일 정도였다.
‘황녀와 남주가 발견했으니 깊은 곳에 있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적당히 은밀하고, 오고 가는 데 불편함이 없는 장소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블라가 의지를 다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막 황녀의 간식 시간이 시작되었으니 시간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그사이에 또 날 찾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황녀가 뭔가 먹고 싶다고 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겠지.’
레이블라는 황녀를 둘러싼 풍경을 떠올렸다. 몽글몽글하고 훈훈했던 분위기. 황녀와 시녀, 기사들은 지금 행복에 취해서 음식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좋겠다.”
너희는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기만 해서.
누구는 죽지 않으려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약초 따위나 찾으러 다니는데.
“왠지 나만 불행한 것 같아.”
황녀 주변만 해도 그랬다. 뭐가 그리 기쁘고 좋은지 다들 늘 입매가 허물어진 채 헤실헤실 웃고만 있었다.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혹시, 황궁 어딘가에서 행복이 온천수처럼 샘솟고 있는 걸까? 자기들만 행복해지려고 꼭꼭 숨기는 거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질 줄 알아?”
절대로 행복해지고 말 테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해독초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행복해질 날이 오지 않을까?
“할 수 있다!”
괜히 힘차게 소리치며 두 팔을 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딱. 눈이 마주쳤다.
레이블라가 서 있는 곳의 맞은편, 한 아이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네가 지금 혼자 중얼거리던 걸 모두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붉은 눈의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