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화 (5/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5화

예상치 못한 물음에 놀란 레이블라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비체라발리 공작을 보려는데,

‘아야.’

한쪽 눈이 따끔했다. 순간 불어온 실바람을 타고 무언가가 눈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레이블라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며 뻑뻑 문지르는데, 그 손짓을 커다란 손이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눈을 향해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주었다.

어느새 그의 품에 편히 안긴 채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괜찮은가?”

그의 뜻밖의 행동에 놀란 레이블라가 얼떨결에 끄덕였다. 그리고 감사의 말을 전하려는 찰나, 잔뜩 화가 난 사서가 공작의 시선을 끌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공작의 눈길이 다시금 그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공작님이라고 하시더라도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갑자기 사람을…….”

“사람?”

네가 사람이냐는 듯 되묻는 말에 사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곧, 공작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자 사서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날카로운 말을 내뱉던 입은 조개처럼 다물렸고, 낯빛은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레이블라를 위협하던 손도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포식자 앞의 어린 양처럼.

‘진짜 하찮네.’

이런 게 강약약강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짓던 사람이 맞는 건가.

숨마저 제대로 쉬지 못해 껄떡대는 모습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의 눈초리는 지켜보는 레이블라마저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살벌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을 깨달았는지, 사서가 굴복하듯 고개를 숙이고 갈빗대가 몇 개는 부서지지 않았을까 싶은 가슴과 배를 움켜쥐면서 일어났다.

사서가 다시 고개를 든 순간, 그의 분노 서린 눈빛이 레이블라를 향했다.

‘……망했네.’

이렇게 수모를 당한 것이 모두 그녀의 탓이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비실비실하게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사서의 모습을 보면서 레이블라는 황궁에서 달아나는 그 날까지 도서관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바보 같은 건 제 아비와 똑같군. 네 아비도 욕심만 많고 주제를 몰랐지.’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선 아까와 같은 모욕만 들을 게 뻔했다.

‘돌아가자.’

사서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찾아오는 편이 나을 듯했다. 마침 황녀가 깰 시간이기도 하니 돌아가서 해독초를 찾을 다른 방법을 궁리하는 게 더 생산적일 수도 있다.

“……내려 주세요.”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부탁하자, 비체라발리 공작이 선뜻 그녀를 내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바닥에 발이 닿는 것과 동시에 레이블라는 깍듯하게 비체라발리 공작을 향해 감사를 전했다.

어째서 자신을 도와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작은 변덕이 레이블라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단 것만은 확실했다.

덕분에 조금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미친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편을 들어 주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의외이기는 해.’

레이블라가 슬쩍 비체라발리 공작을 훔쳐보았다.

은발에 보랏빛 눈망울.

마치 천사 같은 외양에 신의 축복을 받은 듯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실은 제국 내의 어둠을 다스리는 존재.

카시우스 비체라발리.

무심하고 차가운 성정이라고 서술된 소설 속에서 그는 명백한 악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위로를 받다니. 정작 좋게 보았던 이들에게는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

정말로 아이러니했다.

“그럼, 저는 이만…….”

뭐가 됐든 이쪽과도 얽히지 않아야겠다는 판단하에 몸을 돌렸다.

……잠깐만.

레이블라가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비체라발리 공작을 돌아보았다.

……이왕 도움을 받은 거 부탁해 볼까?

사서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리 공작에게 부탁하는 것이 성공률이 높아 보였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레이블라가 해사하게 미소를 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뭐지?”

“혹시, 책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책?”

“식물도감이요. 식물에 관한 건 뭐든지. 제가 시식가이다 보니 독초와 약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서요.”

“…….”

“깨끗하게 보고 돌려 드릴게요.”

“…….”

“빌려주시면 저도 나중에 공작님께 도움을 드릴게요.”

그 말에 대한 답은 그의 눈빛이 대신해 주었다. 네깟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거였다.

당연히 레이블라에게는 그에게 도움이 될 정보가 많았다. 그에게 닥칠 위험과 수많은 사업 아이템까지.

마음만 먹으면 그가 원하는 수십 가지의 정보를 이 자리에서 술술 읊을 수 있었다.

레이블라는 개중에 제일 그에게 필요할 정보를 결정하고, 책과 교환을 하고자 입술을 떼었다.

“다음에 기사를 통해 빌려주도록 하지.”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을 새가 없었다. 그가 말을 듣지도 않고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흔쾌히?

“저, 정말요?”

“그래.”

진짜로?

예상치 못한 발언에 레이블라의 동공이 확장됐다. 흥분으로 가득 찬 눈이 그에게 향했다.

“되도록 빨리요!”

“그래.”

뭐야, 진짜 좋은 사람이잖아?

“저, 제가 머무는 곳은 황녀 전하의 궁이에요. 제가 전하의 시식가거든요.”

“…….”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님, 좋은 분이셨군요!”

레이블라는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전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황녀를 떠올리고 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와 멀어지면서 생각했다.

책을 받고 난 다음 그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 * *

“공작님.”

보좌관 헤넌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황제와의 알현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카시우스는 그러고도 한참 가만히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펠리시티 공작 쪽 가신 중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

“펠리시티 영애가 포스타리모로 오지 못한 것도 배의 시간을 잘못 알려 주어 탑승하지 못하게 막은 모양입니다. 이후에는 잠시 숨어 있다가 펠리시티 공작의 부고를 듣고 도망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카시우스는 몇 달 전 저에게 도착한 서신 하나를 떠올렸다.

서신의 주인은 펠리시티 공작.

제 아이를 부탁한다며,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아이를 잘 보살펴 달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전선에 보내는 서신으로는 퍽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비체라발리 공작이 아는 대로라면, 펠리시티 공작은 자식 사랑이 유별난 녀석이었다. 당연히 그 서신은 농담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그가 연합국의 수장, 포스타리모를 점령한 후 뒷수습하는 사이 펠리시티 공작은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세상을 떠났고, 아이는 모든 것을 잃은 채 황궁에서 시한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데려갈 방법은?”

“없습니다. 반역죄이니만큼 원래대로라면 처형되어야 할 목숨이니까요.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는 황궁을 떠나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내가 전장으로 다시 간다면 달라지겠지.”

“……그렇기는 합니다.”

오늘 황제가 그를 부른 이유는 다시금 전쟁에 출전해 달라는 명령 때문일 것이다.

거절할 수는 있었다. 연합국과의 전쟁을 끝낸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현재 문제가 되는 분쟁 지역은 인접 국가와 자잘한 전투만이 벌어질 뿐 아직은 큰 문제라고 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산과 들을 구경하러 놀러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저 아이를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

금세 불타 없어진 그 서신 때문에?

카시우스는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미소 짓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기억 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목소리 하나가 겹쳐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님, 좋은 분이셨군요!’

‘하여튼 넌 좋은 녀석이야.’

입바른 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비체라발리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두 분홍 머리라니.

“식물도감을 찾아서 아이에게 가져다주도록.”

카시우스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며 헤넌에게 명령했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던 녀석의 잔상은 사라진 후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