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4화
그녀가 도착한 곳은 도서관.
제국에서 가장 방대한 서적 보유량을 자랑하는 지식의 요람이었다.
‘또 쫓겨나려나.’
그간 레이블라는 짬이 날 때마다 늘 이곳을 찾아왔었다. 당연히 해독초를 찾기 위해서였다.
무작정 쏘다니는 것보다 정보를 얻어 수색 범위를 줄이는 게 나을 테니까.
하지만 처음엔 도서관을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같이 숙식하는 시녀들에게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지도도 없는 넓디넓은 황궁을 직접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간은 얼마나 촉박한지. 황녀의 시식가에게 주어지는 휴식 시간은 고작 황녀의 식사 직후 30분가량과 황녀의 취침 시간 정도였다. 거기다 시녀장의 요구 사항도 제법 많았다.
‘황녀 전하의 눈에 띄지 말렴. 황궁에서 넌 황녀 전하의 그림자라고 생각해.’
‘황녀 전하가 다니지 않는 시간에만 다니렴.’
‘죄인이 버젓이 돌아다녀선 안 되지. 두건이라도 써서 그 머리카락부터 숨기렴.’
황녀가 깨어 있을 때는 움직이지도 말고, 숨죽인 채 방 안에만 있으라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레이블라는 황녀가 자거나, 혹은 황궁에 오가는 이가 없는 시간대를 노려 쉴 시간을 쪼개어 잠깐씩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어렵사리 찾아 헤맨 끝에 도서관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그때만 해도 정말이지 모든 문제가 다 술술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궁에 들었다던 펠리시티구나.’
사서의 냉대를 받기 전까지는.
‘반역자 따위가 감히 황궁의 물건에 손을 대려 들어?’
황궁 서고의 1층은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음에도 사서는 레이블라를 막아 세웠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책이 필요한 이유에 관해 피력하려 했지만 사서는 마치 역병에 걸린 사람을 대하듯 밀어내기만 했고, 레이블라는 지난 일주일간 도서관의 문턱조차 제대로 밟아 보지 못한 채 돌아서야만 했었다.
‘진짜 극한 직업이다. 이놈의 엑스트라 인생.’
그래도 어쩌겠나. 엑스트라로 태어났고 엑스트라로 살아가야 하니 힘내야지.
‘오늘은 성공하자!’
축 처지는 상체를 다시 일으키며 의지를 가다듬은 레이블라가 도서관으로 입성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책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리운 느낌이 드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냄새였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레이블라가 고개를 돌렸다. 입구 근처에는 벽돌을 쌓아 만든 높디높은 책상이 있고, 그 너머에서는 인상을 찌푸린 사서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또 너냐. 빌어먹을 펠리시티.”
지난날과 한 치도 다름없는 목소리로 응대한 그가 말을 이었다.
“반역자 따위에게 빌려줄 책은 없다고 했을 텐데. 멍청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저는…….”
“하여튼 제 아비와 똑같군. 네 아비도 욕심만 많고 주제를 몰랐지.”
말을 끊으면서 내뱉는 말은 역시나 펠리시티 공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서는 유달리 펠리시티 공작을 싫어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죄인이라 한들, 자식 앞에서 부모를 모욕하는 일은 천박한 짓이었다. 그 사실을 교육받을 대로 받았을 사서가 인지하지 못할 리 없는데도 그는 레이블라 앞에서 끊임없이 악담을 퍼부었다.
‘소설에서는 인자한 사람이었는데.’
소설에 등장했던 황궁의 사서는 정말로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묘사되었다. 황녀가 황제로부터 외면받던 시절에도 남들처럼 무시하지 않았고, 책을 좋아하는 황녀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며 미소 지어 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황녀 또한 사서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할 일이 없을 때는 그에게 와서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곧잘 그려졌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왜 나에게만 못되게 구는 건데!’
사실 이 사람 인성은 쓰레기였는데, 여주가 황녀라서 잘해 준 것은 아닐까.
‘……하긴. 펠리시티가 더러운 오명을 쓰기는 했지.’
애정하는 황녀를 학대하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펠리시티. 그 핏줄에게 다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국민 욕받이라니.’
그건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이들에게나 붙는 수식어인 줄 알았는데, 본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것도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힐링물 속에서라니.
“……니까 썩 꺼져.”
어느새 일장 연설을 마친 사서가 레이블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직접 쫓아내기 위해 책상 앞을 벗어났다. 다가오는 사서를 향해 레이블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는 꼭 식물에 관한 책이 필요해요. 제가 지식이 있어야 시식가로서도…….”
“왜? 아비 복수라도 할 셈이냐?”
그는 책으로 나쁜 지식을 익혀 황녀에게 해코지라도 할 셈이냐고 묻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절대 아니에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
“닥치거라. 더 들을 것도 없으니 썩 꺼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한 표정을 지은 사서가 순식간에 다가와 레이블라를 밀어냈다.
레이블라는 밀리고 밀리며 뒷걸음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엉덩이가 욱신욱신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 아파 죽겠는데, 사서는 그런 레이블라의 모습을 보며 비웃고 있었다.
“꼴사납구나. 고작 넘어진 것에 징징거리다니. 황녀 전하께서는 너희 때문에 열 배, 스무 배 힘드셨을 것이다.”
조롱 섞인 차디찬 목소리에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무 짓도 안 했어.
펠리시티는 죄가 없다고.
정말 답답해서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악다구니를 쓰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그래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가까스로 입술 안쪽을 꼭 깨물며 비참해지려는 마음을 수습했다.
비릿한 피를 삼키며 마음을 다독인 레이블라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으윽!”
눈앞에 있어야 할 사서가 무자비한 발길질에 나동그라졌다. 끙끙 앓는 꼴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데, 그녀의 곁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꼴사납군.”
다급히 시선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레이블라는 제 곁에 선 사내를 발견했다.
고개를 바짝 위로 쳐들어야 할 만큼 커다란 키의 사내는 누가 봐도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건장했다.
풍기는 기운마저 위협적이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고 오싹한 기운이 밀려왔다. 당장에라도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은발과 투명한 연보랏빛 눈이 무척이나 신비로운 탓이었다.
낯설었다. 레이블라로서는 처음 마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소설의 최종 악역.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는 인물.
‘……카시우스 비체라발리.’
비체라발리 공작이었다.
그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사서를 내리깔아 보던 비체라발리 공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레이블라에게로 향했다.
‘다, 달아나야 해.’
전장의 악귀라고 불리는 인간이었다. 폭군 황제만큼이나 무자비하고 폭력적이며, 거슬리는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인다고 했었다.
……아이마저도.
흠칫 놀란 레이블라가 슬며시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피할 새도 없이 그가 다가와 레이블라를 달랑 들어 올렸다.
살벌한 기운에 짓눌린 레이블라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괜찮아 보이는군.”
뭐라고?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그럴 리가 없는데.
슬그머니 눈을 뜨자,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그 눈빛은 흡사 잡은 사냥감을 확인하는 사냥꾼과도 닮아 있었다.
역시 잘못 들은 듯했다.
‘하긴 비체라발리잖아?’
레이블라가 국민 욕받이인 것과는 별개로 비체라발리와 펠리시티의 사이는 개와 고양이와도 비슷했다.
서로를 무시하고 미워하던 세월이 벌써 수 세기나 이어지고 있는데 ‘괜찮아 보인다’라니. 요즈음 다정함에 목이 말라 있었나. 그런 허무맹랑한 헛소리가 들릴…….
“아픈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