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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화 (3/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3화

잘게 썬 채소가 앙증맞은 입술 안으로 감춰지듯 사라졌다. 동시에 작고 귀여운 하관이 야무지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턱이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까딱까딱하며 분홍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마시멜로처럼 토실토실한 볼이 오물거리는 입술과 함께 움직였다.

그런 아이의 모습은 정말로 귀여웠다. 마치,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은 한겨울 서리보다도 차갑기만 했다. 마치 일생일대의 원수를 마주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꿀꺽.

마침내 음식물이 아이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잠시 정적이 일었다. 그러자 곁에 선 갈색 머리카락의 시녀가 아이 앞에 놓인 음식을 빼앗듯이 치워 버렸다.

“됐어, 가져가.”

그녀가 앗아 간 음식은 고급스러운 트레이에 실려 옆문으로 사라졌다.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두툼한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이건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채소볶음이네요.”

“정말 신기해요. 아이들은 모두 고기를 좋아하던데 우리 전하께서는 고기보다 채소를 좋아하신다니.”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고기도 많이 먹어야 할 텐데. 채소만 드시잖아요. 너무 작으셔서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아요.”

걱정에 차 있던 목소리는 어느새 따뜻한 온도를 띠며 황녀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오늘 늦게 일어나셨나요?”

“얼마 전에 황녀 전하의 말씀대로 수도 인근에 마수 떼가 출몰했잖아요. 그것 때문에 기사단장님과 논의할 일이 많으셨나 보더라고요.”

“어떻게 미리 아셨을까요. 아직 어리신데…… 정말 영특하세요. 우리 전하께서는.”

그사이, 아이의 앞에 또 다른 음식이 도착했다. 음식은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였다.

아이의 앞에 있던 식기가 순식간에 치워지고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이어 스테이크의 끄트머리를 썬 작은 고기 조각이 아이의 앞에 놓였다.

아이는 손톱보다도 작은 고기를 깨끗이 씻은 포크로 찍어 다시금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흩어졌던 시선이 또다시 아이에게로 꽂혔다. 너무나 차가워서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눈길들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다들 좋은 아침이야!”

벽 너머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얼음보다도 차가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전하.”

“모두 보고 싶었어!”

“저도 뵙고 싶었어요. 밤새 그리웠어요, 전하.”

“저도요! 저는 뵙고 있어도 또 뵙고 싶어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아부에 황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맑고 사랑스러운 웃음소리에 얼음장 같던 시녀들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분홍 머리의 아이에게로 시선이 돌아가자 순식간에 표정이 서늘해졌다.

꿀꺽.

아이가 음식을 씹어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이크 또한 빠르게 트레이에 실려 사라졌다.

이어 톡톡. 시녀가 탁자를 두드렸다. 추방 명령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작디작은 쪽문으로 나가기 전 모두를 향해 치맛단을 살짝 들며 인사를 건네었으나, 누구도 받아 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맛있어!”

모두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소녀의 존재는 잊어버린 것처럼.

* * *

“웩.”

격한 위장의 뒤틀림과 함께 레이블라의 입에서 음식물이 쏟아졌다. 변기를 붙든 작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아.”

위장을 깨끗하게 비워 낸 레이블라가 입을 헹구며 작은 숨을 토했다. 한 번 게워 냈음에도 평소보다 속이 좋지 않았다.

‘황궁의 음식은 천국의 음식이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다.

음식에선 아무 맛도 나지 않았고,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감시하듯 꽂히는 시선들은 최악이었다. 차라리 감옥의 차디찬 바닥에서 먹었던 딱딱한 빵 쪼가리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래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너에게 황녀 전하의 식사를 먼저 맛볼 기회를 줄 것이다. 반역자인 너에게는 과분한 자리지.’

‘네가 황녀 전하와 나이가 같은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끌려왔으니까.

며칠 전, 마수의 산에 가는 것 대신 황궁으로 끌려온 레이블라에게 내려진 직책은 황녀의 ‘시식가’였다.

황녀의 곁에서 황녀가 입을 대는 음식을 먼저 맛보는 역할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의 말처럼 과분한 자리였다. 감히 하늘보다 높은 황녀보다 먼저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니! 그것도 반역을 저질러 멸문한 집안 주제에!

그러나 실상은 황녀의 식사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고, 치명적인 독이 들었으면 먼저 먹고 죽으라는 소리였다.

매일 독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두려움에 떨면서 괴로워하며 죗값을 치르라고.

이걸 과분한 배려로 받아들일 멍청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같은 나이? 감사 좋아하네.’

그저 비슷한 나이대에 작용하는 특수한 독을 걸러 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데려왔음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에도 시식가가 하나 죽었다지.’

대부분은 먼저 마법사의 확인을 거친 후에 오다 보니 안전했지만, 가끔은 마법에 반응하지 않은 독이 검출될 때가 있었다.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발생했고, 죽은 시식가의 대타로 레이블라가 선정되었다.

‘또 독이 나오진 않겠지?’

‘설마, 몇 년간 아무 일 없었는데…… 벌써 둘이나 죽었지 않나.’

모두가 쉬쉬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적의를 품은 사람들의 속은 투명하게 드러나는 법이었다.

‘상대는 연약한 아이인데.’

아무리 펠리시티가 못마땅해도 그렇지. 차라리 독을 보낸 사람을 응원하고 싶을 만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죽 쒀서 개 준 인간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황궁에 온 지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목이 간당간당한 자리라는 걸 알아채기는 했지만.

입을 헹구고 물기를 닦아 낸 레이블라가 터덜터덜 침대로 향했다.

털썩. 홀로 쓰는 작디작은 쪽방의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지금 시점은 소설 1부가 끝난 뒤 ‘10년 후’ 라는 문장이 나오기 전 생략된 구간이었다.

주인공인 황녀 에리나가 황제와의 오해를 풀고 행복해진 상태로, 어린 시절에서 성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는 건너뛴 시점.

그래서 원작을 잘 기억하고 있음에도 이 시기에 있던 일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대로 있으면 나는 죽어.’

시식가라는 존재가 원작에서 두드러진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황녀와 가까이에 있었다.

무엇보다 그 긴 소설 속에서 ‘레이블라’라는 존재가 언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아마도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

10년 사이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절대적으로 컸다.

‘진짜 최악이야.’

이 소설 힐링물 아니었나? 왜 답도 없는 피폐물처럼 느껴지는 거지?

‘빨리 도망가야 해.’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원작과 멀어지는 방법뿐이었다. 최대한 멀리, 지명조차 언급되지 않은 곳으로.

만약 탈출한다면 소설이 완결될 때까지 제국과 접점 하나 없었던 바리베 왕국으로 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거긴 루빈디시를 거쳐야 하는데…….’

루빈디시는 이 소설의 흑막, 비체라발리 공작가의 영지였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로이안의 가문이기도 했다. 황제와 황녀를 위협하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비체라발리를 여주에게 바치는 미친 순정남.

‘그놈에게 걸리면 난 죽은 목숨이겠지.’

황녀와 적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아빠도 죽이는데 무려 학대까지나 했다는 펠리시티를 살려 둘까?

사방이 지뢰였다.

서늘하게 식어 버린 얼굴을 쓱쓱 문지른 레이블라가 길게 호흡했다.

‘일단은 황궁에서 살아남는 것부터 하자.’

당장 가장 위험한 것은 시식 과정에서 접하게 될 ‘독’이었다.

마법사도 감정하지 못하는 독이라면 아마 원작 2부에서 황녀가 먹는 독과 비슷한 종류일 것이다.

‘황제에게 복수하려는 사람들이 보낸 독이었지.’

소설 속에서도 황제에게 괴롭힘을 당한 악당들이 계속해서 황녀를 노리고 독을 보냈었다.

2부에서는 끝내 황녀가 독을 먹으면서, 황제가 과거에 적을 많이 만들었던 일을 후회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 빌어먹을 후회 장면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니.’

환장하겠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독을 먹더라도 살아날 방법이 있단 사실이었다.

소설에서 독을 먹고 쓰러진 황녀가 어떤 꽃을 먹고 깨어나는데, 그게 모든 독을 해독하는 만능 약초였다.

그것만 있다면 독을 먹든 독으로 샤워를 하든 괜찮을 것이다.

‘구해야 해.’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어떤 향기가 나는지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디에서 피어나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밖에서는 희귀하지만 황궁에는 넘쳤다는 설정이었는데.’

발에 챌 정도로 많다더니, 지난 며칠간 황궁 곳곳을 살폈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10년 후에 사용되기 때문에 지금은 없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찾지 못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이 아니라서 찾지 못하는 걸까.

분명 황궁 어딘가에는 피어 있을 테니. 샅샅이 뒤져 보면 발견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레이블라에게는 넓디넓은 황궁을 모두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당장 내일 독을 먹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초조하게 발만 동동 굴러 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자기 목숨은 스스로 구해야 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레이블라가 옷맵시를 다듬고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다시금 전쟁터로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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