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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화 (2/92)

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2화

“확실합니다, 죄인 펠리시티의 딸이 맞습니다.”

가만히 레이블라의 얼굴을 살피던 여성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곁에 선 기사에게 덧붙였다. 몇 살에 어디를 다쳤고, 그 상처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레이블라는 그 모습을 응시하며 지난날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했던 이름 모를 사용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 현재의 탐욕스러운 모습이 덧씌워져 그때 순수한 미소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야 말았다.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분명, 레이블라는 아버지의 묘 앞에서 죽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붙잡히자마자 빌어먹을 황제 놈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으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어지러운가 싶더니 정신을 잃었고,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낯선 장소에 있었다.

뭘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일어나, 꼬마.”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들려오는 기사의 고압적인 목소리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주변은 적막해져 있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사의 감정까지 또렷이 전해질 만큼.

“확실히 마지막 펠리시티군.”

몸을 숙여 눈을 마주친 그가 차갑게 읊조렸다. 응시하는 눈빛은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레이블라 펠리시티임이 확실해졌으니, 처우는 사흘 후, 황녀 전하의 탄신회 이후에 결정될 것이다.”

즉결 처분해도 시원치 않을 죄인 펠리시티지만, 그 피로 고귀한 황녀 전하의 탄신회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황녀 전하에게 감사하도록.”

모든 것을 앗아 간 사람에게 감사하라니.

이 세상 인간들 사고 회로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불손한 생각이 설핏 표정에 드리웠지만, 다행히 기사에게는 들키지 않았다. 기사가 상체를 돌려 앞서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와. 운이 좋다면 광산으로 가겠지만, 아마도 너는 마수들이 들끓는 산으로 가겠지. 감히 반역의 죄를 저지른 집안의 핏줄이니.”

“…….”

“네 부모가 황위에 오르려고 나라를 팔아먹은 데다 황녀 전하를 시해하려 했다지? 지난 두 번의 가뭄도 다 너희 펠리시티 가문 탓이라며.”

짓씹듯 내뱉으며 쏘아보는 기사는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순도 높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억울하게.

‘아빠는 왜 이런 멍청한 놈들을 살리려고 했을까.’

그녀의 아버지, 펠리시티 공작은 황제가 황녀의 선물을 구한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려던 것을 막아 왔는데. 저들의 목숨도 귀하다고 그렇게 애써 왔건만.

돌아오는 게 고작 욕과 혐오뿐이라니.

……차라리 황녀의 선물을 구하다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저 멍청한 놈이 무어라 조잘거려 준 덕분에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 수는 있었다.

아마도 정신을 잃은 채로 수도 경비대에게 끌려온 모양이었다. 마지막 남은 펠리시티가 확실한지 신원을 확인하고,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기 위함인 듯했다.

조금 전 신원이 확인되었으니 이제 예정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죽는 것으로.

‘지옥에서 사다리 타기를 잘못했나.’

왜 나만 이런 일을 끝도 없이 겪는 거 같지?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당장 오지 못해?”

성큼성큼 제멋대로 걸어가던 기사가 성을 내며 레이블라를 노려보았다. 자기가 데려가고 있는 죄인이 7살 꼬마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레이블라가 그에게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뛰듯이 걸어갔다. 금세 숨이 차올라서 헉헉댔지만, 기사는 제 갈 길만 급히 나아갈 뿐이었다.

어느새 쇠창살이 가득한 감옥에 도착했다.

기사는 느릿하게 걸으면서 주변을 살피더니, 어느 작은 옥사를 열고 레이블라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힘껏 철창을 닫으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네 부모를 원망해. 감히 우리 제국의 보배이신 황녀 전하를 학대했기 때문에 네가 고생하는 것이니까.”

“…….”

“그럼, 마지막까지 잘 살아 봐. 꼬마야.”

철창을 툭툭 치면서 비아냥거린 그가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발소리마저 사라진 후에야 레이블라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고개를 떨구자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블라는 여린 속마음을 감추듯 손을 그러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놈의 세계는 아동 보호법도 없나.’

애를 이렇게 함부로 다뤄도 돼? 아무 죄도 없는데!

‘상대는 영악하기 짝이 없는 펠리시티야. 어린애라고 해서 봐주면 안 돼.’

그러고 보니 의식을 잃기 전에 그런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래서 더 함부로, 거칠게 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광산? 마수의 산?

황제에 반항한 이들의 결말처럼 공개 처형?

어느 쪽이든 미래가 밝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죄인이 가는 광산은 간수들이 지옥의 악귀처럼 채찍을 휘두르며 식사도 제때 안 주고 일을 시키는 곳이라 들었다. 마수의 산 역시 기사들이 마수를 처리하면 죄수들이 그 사체를 옮기는 일을 맡는데, 마수의 피에 오염되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느 쪽이든 살아남기 어려울 듯했다.

‘다들 바보였어.’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될걸.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는지.

자신을 살리려고 마지막까지 맞서 싸웠던 기사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들이 입가에 고였지만, 애써 삼키며 생각을 지워 버렸다. 과거를 아무리 되짚어 봤자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소용없다는 것을 지난 석 달간 뼈저리게 느꼈었으니까.

‘살고 싶어.’

아직 7살인 데다가 원작을 알고 빙의한 이점을 하나도 이용해 보지 못했다. 원대한 꿈이었던 배부른 백수 노릇 또한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단비처럼 얻은 두 번째 삶이었다.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잃은 첫 삶이 아쉬웠던 만큼, 두 번째는 후회 없이 살아 보고 싶었다.

비록 모두가 죽으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살아 있으니까.

‘방법은 있어.’

어차피 펠리시티의 멸문은 원작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사각지대에 있는 이야기였다. 더 이상 황녀와 얽히지만 않으면, 소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펠리시티라고? 우리 전하를 죽이려고 했던 그 가문 나부랭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빼곡히 밀려드는 시선을 느낀 순간, 레이블라는 그제야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기사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네 부모가 황위에 오르려고 나라를 팔아먹은 데다 황녀 전하를 시해하려 했다지?’

죄명을 낱낱이 쏟아 내며 위치를 알리듯 철창을 두드렸다.

사실, 평범한 곳이었다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숨을 쉬는 세상은 달랐다.

이 세상은 육아물이었고, 그 안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주에게 미친 인간들로 가득했다.

“뭐야? 우리 황녀 전하를 뭐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

“아니 그런 미친놈들이 있어?”

그것이 범죄자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문뜩 오래전 읽었던 소설들의 문구들이 떠올랐다.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

옥에서 사람들에게 맞아 죽어……

꿀꺽.

‘……내 처우는 사흘 뒤에 결정된다더니.’

이 망할 엑스트라 놈아!

* * *

톡. 토독.

단잠을 깨우는 통증에 게슴츠레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레이블라를 반긴 것은 푸른 이끼가 낀 축축한 돌바닥이었다.

으윽.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또다시 톡, 토독. 작은 돌이 머리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작은 돌이었지만 제법 아팠다. 그녀가 이마를 감싸며 끙끙거리자, 맞은편 철창 안에 있던 건장한 청년 범죄자가 그녀의 표정을 보며 키득댔다.

지난 사흘간 그래 왔던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그 망할 엑스트라 놈.’

사흘 전 자신을 이곳에 처박은 기사만 생각하면 유치가 으득으득 갈렸다.

펠리시티가 뭘 그리 잘못한 건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숨 한 번 크게 쉬어 보지 못했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펠리시티의 욕을 듣는 것으로 모자라 사이비 교단의 신도처럼 황녀를 찬양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요즈음 짐승들이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줄었다는군. 짐승들도 황녀 전하를 알아보는 거지.”

“짐승만 알아보나? 범죄자들도 황녀 전하 대단하신 건 알지. 황녀 전하 탄신 후로 범죄가 열에 아홉은 줄어들었다는데.”

“황녀 전하를 실제로 본 적 있나? 마주하면 모든 죄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더군. 다들 바르게 생활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신전에서도 황녀 전하께 관심을 보인다 들었어. 황녀 전하 탄신 후 가뭄이나 홍수가 줄었다던데 진정 하늘에서 내려 주신 분이 분명해.”

“이런 황녀 전하에게 그 빌어먹을 왕국 새끼들이 감히 사생아라며 비웃었단 말일세. 내가 그 입을 뭉개지 않을 수가 없었어! 이게 죄라면 달게 받을 걸세.”

누군 숨만 쉬어도 미운 오리 새끼고, 누군 허무맹랑한 소리조차 진심으로 믿을 만큼 사랑받는 존재라니.

사람 목숨 다 같은 것이 아니었나. 이렇게 차별해도 되는 거야?

‘이놈의 더러운 나라 내가 떠나고 말지.’

펠리시티 영지에서만 살아 몰랐을 뿐, 이제 보니 제국 전체가 광신도 소굴이었다. 기회만 되면 빨리 벗어나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필코, 반드시, 무조건!

‘다행히 오늘이 끝이야.’

기사가 예고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오늘이면 레이블라의 처우가 결정된다. 솔직히 광산이든, 마수의 산이든 상관없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즉결 처분보단 나았다.

탈출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원작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탈출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꼭 살아남으리라 마음을 다잡으며 레이블라는 날아오는 돌을 맞으면서도 옅게 미소 지었다.

고생 끝에 웃을 일이 넘치게 되기를 고대하면서.

하지만 애석하게도 레이블라의 계획은 그 시작부터 어그러지고야 말았다.

“황녀 전하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주마.”

너무나 황송하게도 이 세상의 주인공, 황녀 에리나가 “감옥에 갇힌 아이들이 불쌍해요.”라고 한마디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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