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협약의 집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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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협약의 집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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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협약의 집행자.
2023.08.22.
샤를로프는 손을 거둬들였다.
섬뜩한 기운이 물씬 끼쳤다.
그 기운은 살갗을 파고들어 뼛속 깊이 박혀 들었다.
놈은 찢어지는 괴성을 내질렀다.
쩌억, 아가리를 찢으며 울부짖던 그 울음이 끝이었다.
“꺼져라.”
벤하민이 놈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찢어지던 울음이 그쳤고, 뽑힌 깃털이 까맣게 그을려 잿더미처럼 쌓였다.
“누구냐?”
그는 악귀처럼 내부를 훑었다.
“여기 내부수색은 누가 했느냐?”
정보관이 그럴 리 없다며 답했다.
“수색대가 모두 교차로 끝냈습니다! 절대 놓친 부분은 없었습니다, 폐하!”
“내부수색을 계속 재개해라. 삿된 것이 이곳을 밟게 두지 마라. 이후, 이곳은 상황이 일단락될 때까지 전면폐쇄다.”
샤를로프가 팔을 떨구던 때였다.
질책하듯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너는 또, 하고 꾸짖는 것 같다. 그 눈은 따갑게 살갗을 꿰고, 팔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손목을 미약하게 스쳤다.
“그 손부터 줘. 미련하게 제 손을 다치는 줄도 몰라. 이왕이면 좀 더 조심해주면 안 되나?”
“아…….”
“독기에 닿은 살갗은 회복력이 둔해져. 제때 치료 못 하면 새살이 돋기까지 시일이 더 걸리고.”
그는 검기로 독기를 태워냈다.
숙련된 기사들은 검기로 독기를 태워내는데,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라면 타인의 독기에도 간섭해 태워낼 수 있었다.
“소독약은 여기 없겠고.”
“어딘가 있긴 하더라도, 이 저택의 물건은 섣불리 건드리기 조심스럽네요.”
“아, 이 저택에 있는 소독약이라면 관둬. 여기 있는 건 모두 처분할 거야.”
샤를로프가 손목에 손수건을 묶어 매듭지었다.
“이만 나가죠.”
그 매듭은 금방 풀렸다. 천이 헐거워지는데, 손목을 타고 굵은 손가락이 올랐다. 툭툭, 그는 점잖은 손짓으로 천 위를 어루만졌다.
“이렇게는 지혈이 안 돼.”
벤하민이 매듭을 고쳐 묶는데, 곧 밖에서 기별이 도착했다.
“폐하,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 * *
이후 손을 치료받았다.
“다쳐 오지 마십시오.”
아론이 작게 속삭였다.
“폐하께서 다쳐오면 곁에서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럴 것 같아.”
“처음 처치를 잘해서 다행입니다.”
아론은 소독약으로 팔을 처치했다.
“마무리됐습니다, 폐하.”
아론이 약품들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자, 벤하민이 곁으로 다가왔다.
“흉터는 괜찮겠나?”
“다행히도 흉터는 안 질 것 같습니다.”
이후, 아론은 약을 더 챙겨주었다. 잡초를 빻아 넣은 건 아닌가 의심되는 쓴 물이 목에서 거꾸로 올랐다.
“이 약재도 쭉 삼키십시오.”
“……먹어도 되는 건가?”
“몸에 좋은 건 본래 쓴 법입니다. 열상에 좋은 약재들로 푹 끓였습니다. 또, 폐하께 잘 맞는 보약과도 같으니 쭉 마시면 됩니다.”
피부회복에도 좋은 약재라며 덧붙이는데, 뭘 섞었는가 싶다.
“이 약재들 모두 윈저가에서 보내준 겁니다, 보약이라도 챙겨 달라며 예전부터 제게 약재들을 여럿 보냈는데, 폐하께서 이 약재를 남긴다면 슬퍼하실 겁니다.”
점점 어린아이 다루듯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아직 그걸 깨닫지 못했다.
“아프면 안 되겠네요.”
그런 교훈만 얻었다.
며칠간은 그 욱신거림이 이어졌다.
뽀얀 피부가 조금 붉다는 것 외에는 상흔도 없다. 찢겨나간 살갗은 자연히 아물었고, 피부도 새살이 올라 보들보들했다.
“피부 속이 뜨겁네요.”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모두 아물었는데, 피부는 여전히 뜨거웠다.
“독기로 입은 화상 때문에 그래.”
벤하민이 곁에서 안경을 벗어놓으며 이야기했다.
“아직은 좀 욱신거릴 거야.”
“아……. 확실히 열기가 닿으면 욱신거려요.”
“상흔은?”
“그건 아물었어요.”
“이후에도 열기가 오르면, 찬 얼음으로 식혀줘.”
벤하민은 피부를 제 검지로 더듬거리며 속삭였다.
“찢긴 살은 더 촘촘하게 올라.”
“아…….”
“덕분에 몸이 더 단단해지지. 찢어진 근육이 아물면 더 단단해지듯, 피부 또한 마찬가지야. 저런 상흔이 하나하나 쌓여 굳은살이 되고, 기사들 몸을 만들어내지.”
기사들 몸은 치열한 전투 때면 수십 번씩 찢기고 아물었다. 그런 과정에 피부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굳은살이 굳어가면서 몸도 단단히 자리 잡았다.
“네가 그럴 필요는 없지만.”
“거리를 두란 뜻이군요.”
벤하민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독기는 그 자체로 살갗을 녹여. 그리고 신력은 그런 독기를 녹여내지. 둘 다 본성이 파괴하는 건 마찬가지고, 그런 과정에 화상을 잘 입어.”
열상은 찬 얼음으로 열기를 식혀준 덕에 괜찮아졌다.
“며칠 몸조심하라는데도,”
“…….”
“여전히 조심성 없구나.”
샤를로프는 숄을 팔뚝에 얹었다.
“나는 네가 지금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때면 괜스레 불안해진단 말이야.”
“당신은 나를 아이처럼 여겨요.”
“네가 아이였다면 내가 불안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을 테지.”
샤를로프는 그의 이야기에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헨리에타가 곧 떠난대요.”
“아, 친모가 와서 데려간다는 게 오늘이었나?”
“친모는 이미 와 있었고, 아이 회복이 늦어져서 오늘에서야 떠난다네요.”
헨리에타는 어린 몸으로 심적인 충격이 커서인지 열병을 앓았다.
“기억을 제대로 못 해요.”
“그렇다면 잊는 게 저 아이에게도 더 좋겠군.”
“……기억하기 좋은 일은 아니었죠.”
헨리에타는 그렇게 떠났다. 황궁을 떠났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들은 앞으로 황실의 보호관찰 아래에 황실 사저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벤하민이 펜촉으로 종이를 툭툭 두들겼다. 흑색의 잉크가 얇은 종이에 스몄다.
“가주의 접근 가능성을 염두에 놓았으니, 이후로 더 기다려봐야 할 일이겠지.”
그의 시선이 바깥에 닿았다.
“포퓨타로 파견했던 정보관들이군.”
로브를 쓴 이들이 황제궁 입구를 지났다.
포퓨타로 보냈던 정보관들로, 황실은 그간의 활동기와 머물 현황을 저들을 통해 파악해왔다. 저들은 이번 현황 보게 황실을 찾은 참이었다.
-똑똑.
바깥에서 기척이 들렸다. 집무실 문을 두들긴 보좌관이 용무를 밝혔다.
“폐하. 포퓨타로 파견했던 정보관이 돌아왔습니다.”
벤하민은 집무실 의자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함께 듣겠나?”
“포퓨타면 기밀사항이 많은데 내가 들어도 괜찮나요?”
“네가 듣지 못할 이야기는 없어.”
벤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견임무를 끝내고 막 귀환했습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정보관 일행이 집무실로 찾아들었다.
밋밋한 흑색의 로브 차림이었다. 그 속의 제복도 무늬는 없고 칙칙한 흑색이었고, 제복 아래로 단단히 잡힌 몸도 균형적으로 뻗었다.
“1차 토벌단 파견이 막 끝났습니다. 경계구역 내부 마수화가 시작됐으며, 크라켄이 번식기에 접어들어 새끼들을 낳으며 개체 수가 대폭 늘었습니다.”
샤를로프는 팔뚝에 얹은 숄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이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또한, 튜텨가 참변 피의자의 족적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이 일의 끝은 이미 다다랐다.
“놈은 이 땅 위에 없습니다.”
* * *
‘이 땅에 질서를 세우노니, 규율과 규범을 잊은 흑의 혈족은 땅 아래로 내려가고, 이 협약은 이들을 묶는 저주이자 족쇄가 될 것이다.
협약의 집행자는 조약에 얽매여 그 혼을 부스러트렸고, 억겁의 시간대에 묶여, 그 혼(魂)은 협약의 이행을 공증한다.’
‘각각 혈족은 제 땅에 묶어둔 흑의 혈족을 감시하며, 숲과 사막, 바다로 각각 나뉠 것이며, 이 또한 집행자가 공증한다,’
발밑은 어둡다.
뭐가 있는가? 뭐가 없는가? 그런 구분조차 안 됐다.
나는 지금 어디 서 있는가? 내가 서 있던가?
“으응.”
몽롱하던 의식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왜 계속 앓아.”
목을 긁는 이건 신음이었다.
손에 쥔 서류가 맥없이 떨어졌다.
샤를로프는 붉은 머리칼을 헝클였다.
“또 잠들었나요?”
“내가 피곤하면 자라고 이야기했는데도 그러는군.”
벤하민이 샤를의 눈썹을 손등으로 쓸었다.
“봐봐. 눈이 멍해.”
“다 끝났어요.”
“튜텨가 재산 목록인가?”
샤를로프는 자료를 덮어놓았다.
“국고로 환수된 튜텨가 재산 일부예요. 목록에 빠진 부분은 자료를 따로 빼서 기입해 놓았어요.”
벤하민은 곁에서 빼둔 자료를 눈짓하며 속삭였다.
“나름대로 세세하군.”
샤를로프는 빼곡한 자료를 눈으로 훑었다.
“그냥 옛날 기억이에요. 자주 자리를 비웠기에, 그 빈자리가 허술해질 때면 이렇듯 뒤를 밟히시거든요.”
샤를로프는 항목별로 나눠둔 목록을 되짚으며 마무리 짓고 덮었다.
“자료 마무리됐어요.”
벤하민이 자료를 넘겨받았다. 자료집이 무겁고 두툼했는데, 항목별로 꼼꼼하게 세분화해 놓았다.
“고생 많았어.”
바깥의 해는 이미 저물었다. 협탁의 촛불이 아른거리며 불을 밝혔고, 노르스름한 빛도 이젠 버거워졌다.
벤하민이 펜촉으로 종이를 툭툭 두들겼다. 흑색의 잉크가 얇은 종이에 스몄다.
“글씨가 오밀조밀해.”
“네?”
“옛날에 너를 처음 봤을 때 말이야. 꼭 지렁이가 기어가듯 글씨가 구불구불했거든. 그 시절 나눴던 서신들도 따로 보관해 뒀는데 어디 찾아보면 있겠군.”
“그걸 아직 보관해 놓았어요?”
“그 시절 너를 이어주던 흔적이니까.”
그가 쐐기를 박듯 이야기했다.
“내가 그걸 버릴 수 없지.”
샤를로프는 깃펜을 쥐던 손을 멈칫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글쎄. 나도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
“그때는 그 서신을 기다린 것 같군.”
네 소식이 오길 기다리던 그 기억은 선명했다.
“너는 늘 물안개처럼 흐릿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흔적이라도 되짚는 건 좋았지.”
벤하민이 깃펜으로 서류에 숫자를 기입하며 속삭였다. 자료정리는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거 같은데 이대로 끝내긴 아쉽고, 조금만 더 끝내놓고 잘까.
속삭이던 그가 샤를과 눈을 맞췄다.
“왜?”
샤를로프는 그의 물음에 작게 되물었다.
“……어땠는지 기억나요?”
“으음. 그 시절에도 글씨는 작았지. 나름대로 작고 단정한 손글씨였지만, 글자 획에 무게가 제법 담겼고.”
벤하민이 말을 천천히 늘어트렸다.
“또, 손끝 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은근히 헤맸지.”
“…….”
“얼마나 힘을 줘야 할지, 또 얼마나 빼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거든. 조금 익숙해진 뒤에야 그런 기색도 사라졌지만 말이야.”
샤를로프는 깃펜을 쥔 손에 똑같이 손을 포갰다. 어쩐지 손 근육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 기색을 기민하게 읽어낸 벤하민의 시선이 손끝에 닿았다.
“괜찮나?”
샤를로프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젠 조금 피곤한 거 같네요.”
“으음. 피곤할 때도 됐지.”
협탁에서 깃펜이 굴러떨어졌다.
-딱.
펜촉이 부러지며 잉크가 바닥에 튀었다.
도르르, 굴러온 깃펜은 샤를의 발치에 닿았다.
그는 이렇듯 거리를 좁혀왔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 짓지.”
벤하민이 덮어둔 서류를 정돈해 협탁에 모아놓았다. 깃펜을 챙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려놓았다.
“이만 자자, 샤를.”
숨긴 건 아니었다.
그가 묻지 않았을 뿐.
어쩐지, 샤를로프는 속으로 그렇게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