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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너는 또. (49/51)


#49. 너는 또.
2023.08.18.



 
이불을 걷어낸 샤를로프는 목을 젖히며 쿠션에 기대앉았다.

검붉은 머리칼이 구불구불하게 흘러 사부작댔다.

눈에 열기가 고여 뻐근했다.

목도 까끌까끌했다.


‘목 말라.’

샤를로프가 손끝으로 목부터 쇄골까지 더듬거리는데, 누군가 그 손목을 붙들었다.


“곁에 있었어요?”

“막 연무장에 다녀온 길이었어.”

그의 시선이 샤를의 목에 닿았다.


“……왜요?”

“또 목을 조르는 줄 알고.”

그의 염려는 타당했다.

혈색이 없는 낯빛은 창백했고, 살갗에 비친 퍼런 핏줄이 유독 도드라졌다.

그간 이 꼴로 지냈으니, 그의 걱정을 얻을 만했다.


“최근 제 모습이 어땠는지 알겠네요.”

그런 샤를의 이야기에 벤하민은 침묵했다.

어쩐지 그의 속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그 속내에 뭔가 품은 거 같은데 흐릿하게 시야에서 감쳐둔 것 같다.

그런 벤하민을 살피던 때였다.

벤하민은 샤를로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채비를 끝내고 나와. 튜텨 가문 일로 그 아이가 해줄 이야기가 있다는군.”

벤하민이 시녀장을 들여보내며 떠났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지.”

막 깨어났다고 머리가 멍하다. 이마를 짚은 샤를로프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헝클였다. 어제 잠들기 전에 내가 뭘 했더라…….

어떤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기억이 흐릿했다.


“어제 폐하께서 수면초를 부탁하셨습니다.”

“아, 어쩐지 오랜만에 깊게 잠든 것 같아.”

잠든지도 모르고 잠들었다.

이후, 채비를 끝낸 샤를로프는 밖으로 걸음했다.


“폐하께서도 도착해 계십니다.”

시녀들이 문을 두 번 두들기고 열어주었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제보단 낯빛이 괜찮아졌구나.”

“……그날은 죄송했어요.”

헨리에타는 그날 밤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그 어둠이 저를 보았어요. 그, 그게 입을 벌려 마물을 토하고, 발 아래서 꺼내 달라 목을 빼냈어요. 그, 그 입으로 사람을 탐했는데…… 거기, 거기였어요. 아버지는 그 위에 서 계셨어요.”

뒤가 밟히던 이유가 이거였다.


“그건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거기서 너를 봤니?”

“……네. 보았어요.”

“네가 그분을 봤듯, 그분도 너를 봤겠구나.”

가주가 몰랐을 리 없다.

이 아이가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할 리 없고, 지금 혼자 여기 남았다는 것 또한 가주의 뜻에 가깝다.


‘일부러 살려 보냈군.’

샤를로프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떠날 때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

“그게, 귀가 먹먹해서 드문드문 끊겼어요.”

호흡을 끊어냈던 아이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아아, 그날을 기다리라 이야기했어요. 그 뒤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 아이도 그 이후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샤를로프는 벤하민과 시선을 나눴고, 곁에서 나지막한 명령이 떨어졌다.


“떠날 채비를 해둬.”

그가 아이의 발목을 확인하고 이야기했다.


“보호자가 곧 올 거다.”

“아……!”

“다행히 자리를 피해 괜찮다는군. 이후 간단한 신변조사가 필요할 테지만, 조사만 끝난다면 곧 만나게 될 거야. 황실 사저로 거처를 옮길 테니, 그길로 떠나면 돼.”

이젠 튜텨가 저택에 아무도 없다. 모두가 떠난 저택에 사람들 흔적도 지워졌다.


“이후, 도움이 필요하거든 바깥의 시녀에게 이야기해라.”

별실 문이 닫히고 둘은 고요히 나왔다.

샤를로프는 닫힌 문 너머를 눈짓하며 속삭였다.


“저 아이를 일부러 보내었군요.”

“……전령을 저 아이로 대신했어.”

둘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협약이 깨졌나요?”

“그랬다면 금제가 깨지는데, 이만큼 조용할 리 없지.”

“그럼 앞으로 깨질 예정인가요?”

“그 또한 확인해볼 일이다.”

어쩌면 서로 이미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이 추측을 확연하게 되짚어줄 증좌가 없었을 뿐이다.


“그를 곧 죽이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말을 흐렸다.

제 아비를 죽일지도 모르는 이에게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벤하민이 어둑한 암실을 지났다. 소독약 냄새가 짙었다.


“조사는 끝났나?”

지난밤, 사망 선고된 하인의 조사가 이어졌다.


“시신이 독에 중독됐습니다. 독기로 몸속이 썩어들어가는데, 마물이 내뿜는 독기를 닮았더군요.”

“혈액 결과는 나왔나?”

“시신의 혈액에도 독기가 녹아 있었습니다. 혈액도 검고, 몸속에 썩은 독기가 고스란히 고여 응고됐었습니다.”

정보관 정보사들이 보고사항을 고했다.

마물의 독기가 몸에 남아 있었다. 이 독기는 보통 마물들과 싸움 끝에 죽은 용병들의 시신에서 찾을 수 있는데, 시신의 혈액에 가장 짙게 잔류했다.


“쫓긴 겁니다.”

“쫓겼다면 저들이 놓쳤을 리 없다.”

“놓친 건 아닙니다. 이건 놈들이 놓아준 겁니다.”

정보관이 시신의 천을 들추었다. 그 발목의 살갗이 찢겨 뼈가 조각났다.


“발목은 뜯기고 찢겼고, 이 꼴로는 못 걷습니다. 혈액의 응고상태로 보면, 고인은 그 시각 이미 죽었었습니다.”

쫓기듯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고인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 죽음을 늦춰, 죽은 이를 보낸 겁니다.”

정보관이 보고를 끝냈다.


“마물의 시초이자 죽음에 관여하는 것, 그것은 고대 때 쫓겨난 흑주술의 영역입니다.”

“기정사실화됐군.”

“협약 위반입니다.”

아직도 고대협약의 금제는 여전했지만, 협약이 서서히 잊히며 그 틈 사이로 놈들이 몸을 끄집어냈다.

협약의 금제를 범했다.

죽은 이들이 금역을 밟고, 산 자들의 영역을 더럽혔다.


“이건 고인을 일부러 푼 겁니다.”

“퍽 대범하구나.”

“다른 실종자는…….”

“튜텨가 가주의 성향이 어떤지 기억하느냐?”

허영심에 찌든 놈이었다.


“그걸 다 죽였다면 저택에 시신을 흩뿌려놓고, 제 살육을 봐달라 읍소할 놈이었어.”

“내부 조사대를 파견하겠습니다.”

그 꼴로 홀연히 사라질 성정은 아니었다.


“……선황께서 작고하셨을 적을 기억하십니까?”

선황이 죽고 황위에 오르던 때, 그 죽음부터 이미 꺼림칙했다.

광기로 미쳐가던 선황은 임종 때 혈색이 검어지고 살갗이 썩더니, 그렇게 숨을 거뒀다.

생명력을 빼앗긴 듯 말라비틀어진 시신들과, 석연치 못한 죽음들이 계속 이어지던 나날들.


“지금과 거의 비슷했겠군.”

“그럼 저들도…….”

“저들을 이해할 것 없다. 이 꼴로 이끈 것 또한 놈들이었어.”

선황의 시신을 뜯어 볼 여력은 없으니 지난 죽음도 묻어놓았다.


“족적을 쫓아라.”

뜻하는 바는 확인하였고, 지난 추측도 기틀을 갖추었다.


“책사께서 찾아들었습니다.”

암실 문이 열리고 로스켈라가 들어왔다. 그는 암실에 짙게 내려앉은 약재 향에 콧등을 찌푸렸다.


“끝났습니까?”

“놈들이 금역을 범했다.”

어리석은 이들 몇몇이 균형과 질서를 어지럽혔다.

벤하민이 시신에 천을 덮어주며 고했다.


“삿된 이들을 찾아내어 죽여라.”

 

 

* * *



“조금 더 모른 척하고 싶었건만.”

샤를로프는 입술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더이상 모른 척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구나.”

되짚을 때였다. 그 죽음이 어째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저택에 묶여 지냈던 삶은 바깥과 극단적으로 단절되었다.

혼인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내 죽음도 외부 요인이었구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들과 닿았는가? 또, 그 끝은 어디인가? 끝이 있었던가?


“폐하. 폐하 듣고 계십니까?”

상념에 잠겼던 샤를로프는 어깨를 뭉근하게 풀어주었다.

그녀는 쇄골을 쓸어내리며 로브의 이음새를 풀었다. 암막후드를 뒤로 젖히고, 털로 된 목도리를 풀어내었다.


“직접 걸음 하실 것 없었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는 게 더 낫지.”

저택 내부수색이 이어졌다. 하인들로 가득 찼던 저택이 황폐했다.

모두가 떠난 그 자리에 또 홀로 우뚝 남은 기분이었다. 카타리나가 그런 샤를로프를 살폈다.


“내 눈치 볼 것 없다.”

“……폐하.”

“가문과 의절하던 때 이미 관계를 놓았는데, 어떤 미련이 있어서 내가 이들에게 동정심을 보이겠어.”

샤를로프는 눈매를 나른하게 좁혔다.

적갈색 눈동자가 사위를 훑었다. 튜텨가 저택은 폐쇄됐다.

하인들은 사라졌고, 저들의 족적도 모두 끊겼다.

좋지 못한 인연이었기에 좋은 감정도 없다.

이 저택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특별히 짚이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나도 이들과 오래 지냈지만, 나는 이들을 잘 모른다.”

하인들이 바닥을 쓸던 빗자루와, 빨래터로 가던 빨랫감들,

그 외에도 서류와 깃펜이 바닥에 홀연히 놓여 있었다.


“그 흔적이 지워진 듯하구나.”

카타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애당초 아무도 없었다는 듯.”

샤를로프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때였다.

목에 털 머플러가 감겼다.


“혼자 다니지 말고.”

벤하민이 머플러에 매듭을 지어줬다.


“바깥에 계속 있겠나?”

“수색대 수색이 아직이어서 섣불리 걸음하기가 조심스럽네요.”

“이 정도 살펴보는 건 괜찮아.”

샤를로프는 그를 따라 저택에 발을 디뎠다. 걸음걸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바닥이 삐거덕댔다. 그 균형이 뒤틀려 몇몇 곳은 움푹 파였다.


“가지고 나올 물건은 없나?”

“이젠 없어요.”

“미련도 없고.”

“3층에만 올라가 볼게요.”

샤를로프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여기는 어머니가 죽어서야 떠난 독실이었다.


“어머니가 임종을 맞은 곳이에요.”

“……모두 덮어놓았군.”

모든 가구에 천을 덮어놓았다.

협탁에 골반을 부딪쳤다.

그 탓에 협탁이 열리며 천이 흘러내렸다.

여기저기서 다른 천들도 흘러내리고, 그 안의 전경이 눈에 담겼다.


“아아……!”

벤하민이 샤를의 시선을 가렸다.


“몹쓸 성향을 지녔군.”

죽은 새의 시신이었다.

하얀 시트에 똑같이 새하얀 새가 놓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어요.”

시신이라고 여겼지만 아니었다.

그건 본능적이었다. 저 녀석의 호흡을 느꼈다.

죽음이 녀석의 숨통을 옥죄었고, 그 숨은 서서히 멎어갔다.

붉은 핏물이 시트를 적셨고, 깃털이 허공에 날렸다.


“죽어가는군요. 숨은 붙어 있지만, 생명력의 생기는 끊겼어요.”

샤를로프는 그의 팔을 내렸다. 그 걸음을 느릿하게 디뎠다.


“흑주술로 억지로 붙들어놓았어. 흑마력은 죽음에 관여하고, 죽음에 관여 당했다면 그 끝은 이미 정해졌어. 곧 죽음에 먹힐 거야.”

곧 정보관 정보사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잔류 흑마력이 느껴집니다, 폐하!”

유리가 착착착하며 깨지고, 파편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제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놓지 못했고.”

흰 새가 부리를 겨누며 눈매를 길게 찢었다.


“삿된 힘을 빌려”

그 깃털이 서서히 썩어들어가고, 비릿한 혈향을 풍겼다.

찢어진 혀로 샤를의 손목을 감싸고, 부리를 박아넣었다.

그 부리가 이미 썩어 짙은 독기를 풍겼고, 그 독기로 살갗을 태워냈다.


“나를 죽이거나,”

살갗이 찢겨 나갔다.


“내 살갗을 찢어발겨 제 존재를 박아넣을 요량이군요.”

새의 눈이 찢어졌다.

네가 올 줄 알았다.

너를 기다렸다.

하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애석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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