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나는 이렇게 내려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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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는 이렇게 내려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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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는 이렇게 내려앉고.
2023.08.15.
“속이 복잡해 보이는구나.”
벤하민이 뒤에서 속삭였다.
혼절한 아이를 혼자 남겨두지도 못할 노릇인지라, 헨리에타와 함께 황궁으로 향한 길이었다.
“이젠 괜찮아요.”
“괜찮나?”
“복잡하던 것도 정돈되었어요.”
샤를로프는 담담히 속삭였다.
“황궁의는 아직인가요?”
“황실의료원에 기별을 넣었으니 곧 도착할 거야.”
샤를로프는 침대 맡 협탁에 몸을 기댔다.
곧 별실 밖에 기척이 찾아들었다.
“폐하. 황궁의께서 들었습니다.”
아론이 별실 문을 두들기고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홀로 누운 아이를 살피며 묵묵히 진찰을 끝냈다.
“충격으로 혼절하셨습니다.”
“몸에 상흔은 없나?”
“살펴보겠습니다만 말끔합니다. 팔이나 배가 멀쩡한 거면 괜찮습니다.”
보통 외부에서 무력이 가해진다면, 팔로 몸을 보호하기 마련이었다.
“적어도 외부충격은 아닙니다.”
“정신적인 문제인가?”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의식을 찾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그 부분도 깨어봐야 알겠습니다. 지금은 기력이 너무 쇠했습니다. 일단 깨우지 않고, 수면초를 처방하겠습니다.”
몸이 기력이 쇠해진 만큼 깊은 숙면을 취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럼, 약초를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론이 자리를 떠났다.
“손을 왜 떨어.”
“아, 몰랐어요.”
“그만 떨어.”
벤하민이 샤를의 손을 가져와 제 손에 포개었다.
“죽음 앞에서는 담담하더니, 이 아이 모습에 동요하는구나.”
“……아직 어리니까요.”
“너는 이 아이에게서 뭘 읽어냈을까?”
“글쎄요. 그 시절 내 모습을 엿보았을지도요.”
샤를로프는 팔을 뻗었다. 그 팔로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 아이는 쌕쌕대며 고른 숨을 골랐다.
“너는 왜 거기 혼자 남았었니?”
욕심에 눈이 멀어도 제 자식을 내팽개치고 떠날 사람은 아니었다.
“이 아이 친모 소식은 아직 없나요?”
“튜텨가 저택에 사람을 붙여 놓았으니, 이후 누군가 이 아이를 찾는다면 이쪽으로 기별이 올 거야.”
“가주는요?”
“그는 족적이 완전히 끊겼어. 정보관에서 족적을 쫓더라도, 아직은 찾기까지 시일이 더 필요해.”
“……잡혀도 곤란하고, 잡히지 않아도 곤란하겠군요.”
혈연으로 묶인 삶이란 그렇다.
지난 혈연관계를 끊어냈다고 여겨도, 바깥에서 보기에는 여전히 이어져 있는 게 혈연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이 아이가 깨면 다시 이야기하죠.”
샤를로프가 막 고개를 들던 때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어쩐지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
둘의 시선은 여전히 서로에게 닿아 있었다.
그의 눈짓은 속내를 샅샅이 꿰뚫었고, 이후 한숨을 토해내듯 이름을 불렀다.
“샤를.”
벤하민이 눈을 반쯤 감고 속삭였다.
“식사 때를 놓쳤어.”
“몰랐어요.”
“가볍게라도 배를 채워.”
굶주린 배가 제 존재감을 알렸다. 그건 꼭 허전함 같았다.
“힘 풀어, 샤를.”
“…….”
“손톱에 긁히잖아.”
샤를로프는 그제야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긁혔네요.”
“연고부터 바르는 게 좋겠군.”
샤를로프는 손아귀를 펼쳤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긁어놓았다.
따갑다. 이제야 그 살갗이 아려왔다.
“지금 너는 너부터 살피는 게 좋겠어.”
* * *
샤를로프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밀빵에 크림치즈를 발라 식사를 끝냈다.
협탁에 카모마일 한 잔이 놓였다. 샤를로프는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벽에 기댔다.
시녀 하나가 곁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불안하십니까?”
“아니다. 왜?”
“심중이 복잡해 보이십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런다.”
“차를 따뜻하게 데워 올까요?”
“괜찮다. 잠시 이러다 말 거야.”
샤를로프는 고개를 기울여 창밖을 살폈다.
“내가 몹쓸 버릇을 들여놔 그렇다.”
그 속이 어지러울 때면, 늘 똑같이 억눌러왔다.
몹쓸 습관이다. 제 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도, 그 비명은 소리 없이 묻혔다.
몸이 마비되어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그 비참함을 억누르기 바빴다.
‘몹쓸 짓이었구나.’
그런 짓을 말려줄 사람이 없었기에, 지난 삶도 그렇게 끝났다.
“침구는 그쯤 정돈해 놓고 나가봐.”
“혹여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샤를로프는 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팔을 내저었다.
“혼자 있겠다.”
“그럼 바깥에 있겠습니다. 찾으실 일이 있거든 설렁줄을 당겨 주십시오.”
시녀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그 기척이 멀어지던 때였다.
‘끼웅.’
좁은 협탁 아래서 흰 털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앞발로 바닥을 어슬렁거리던 그 아이가 몸을 포르르 털었다. 뽀얀 솜뭉치가 귀를 뾰족 세웠다.
‘끼웅.’
랸은 샤를의 발등을 앞발로 꾹꾹 눌렀다.
“…….”
몸이 근육통도 아닌데 꽉 뭉친 듯 뻐근했다. 어쩐지 가슴 한쪽이 거북하고 속이 답답했다.
손끝이 파리하게 질렸다.
찻잔을 든 손가락이 약하게 떨려왔지만, 이건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샤를로프는 그 동요를 감추었다.
손을 덮어 떨림을 억누르고 숨겼다.
“아아.”
따뜻한 찻물이 식도를 훑었다.
난롯불을 높여놓아서 몸에 닿는 열기들이 화끈거렸다.
‘불안감이던가?’
찻물이 불안감을 나른하게 억누르며 내려갔다.
카모마일 특유의 은은한 사과향이 퍽 괜찮았다.
떨지 마라.
아직은 괜찮다. 그저, 작은 소란이었을 뿐이다.
‘너는 네 몸을 혹사하는 버릇이 있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샤를로프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아래로 떨구는데, 랸이 손등을 핥았다.
“네게 위로를 받을 정도는 아니야.”
랸은 끙끙대며 몸을 타고 올랐다. 제 발톱에 긁히랴, 발가락을 오므려 발톱을 숨기고, 앞발로 무릎을 꾹꾹 눌렀다.
랸이 혀로 샤를의 턱을 핥았다.
‘끼웅.’
끙끙 앓으며 곁을 떠나지 못하는데, 그 아이는 샤를의 목에 제 뺨을 기댔다.
“너는 꼭 나를 읽어내는 것 같아.”
샤를로프가 고요히 목을 떨구는데, 짧은 꼬리가 샤를의 이마에 닿았다.
툭툭, 가벼웠다.
어루만지듯 보드랍고 조심스러웠다.
작고 앳됐다.
그런 작은 아이가 끙끙대며 닿아오는데, 이 아이 나름의 위로 같다.
랸은 짧은 콧등으로 샤를의 코를 콕콕 찔렀다.
“괜찮다, 나는.”
작게 속삭이던 무렵이었다. 낯익은 기척이 다가와 섰다.
“집무실에서 오는 길이에요?”
“업무를 끝내고 오는 길이었다면 제복 차림이었을 테지. 답답해서 연무장에 다녀오는 길이었어.”
샤를로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벤하민이 얇은 침의 차림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그의 기척을 느낀 듯, 랸이 무릎에서 포르르 내려왔다.
“그 아이는 네 곁이 아니면 거부하는구나.”
“거부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자리를 비켜준 거예요. 당신이 제 곁에 오면, 일부러 곁을 내어준다는 느낌이 짙더라고요.”
랸이 익숙하게 문을 긁자 시종이 대신 열어주었다.
‘끼웅.’
이전에도 자주 저랬던지라, 시종들도 무덤덤해졌다.
“어쩐지 머리가 몽롱하네요.”
“피곤한가 보군.”
“그렇다고 잠은 잘 안 와요.”
“어째서?”
“……좀 뻐근해서요.”
“그래서 심신안정에 좋은 카모마일인가?”
“차는 금방 식네요.”
“찻물을 데워 오라 이야기하지.”
샤를로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자야죠.”
샤를로프는 무던한 손짓으로 찻잔을 쓸었다.
“튜텨가 조사는 끝났나요?”
“대략적인 부분은.”
“……그 아이는요.”
“의식은 깼어. 이후 불안해하기에 수면초를 조금 더 처방했고.”
샤를로프는 눈을 감았다. 목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석연치 않은 일들이 이어지네요.”
“본래 모든 일에는 상관관계가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는 법이잖아.”
벤하민이 젖은 수건을 내려놓고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기분이 저조하군.”
“외가에서 어머니를 뵙고 오던 길이었어요.”
“가족들은 봤고?”
“외조부만요.”
“…….”
“어머니 곁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요. 문득 알겠더라고요.”
“무엇을.”
“내가 아팠구나.”
내 삶이 고단했구나.
“균형을 갖춘 듯 보여도 그게 아니었고, 지난 일들에 내심 피곤했어요. 아직은 그 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지난 과거를 되짚는 게 이런 나를 보여주는구나 싶었죠.”
“…….”
“이런 불안정한 속을 꺼내기 싫어 입을 다물었고.”
또, 홀로 속에만 묻어놓았다.
“나는 지금 이 꼴이 됐어요.”
그 답답함을 억누르던 이는 그걸 표출하는 법을 잊었고, 제 감정을 깎던 법만 기억했다.
“예전에는 조금 아팠어요.”
“…….”
“숨을 내쉬는 순간순간이 답답했고, 내 삶이 얽매인 사실이 조금은 억울했어요. 나는 평범함을 바랐지만, 그 평범함조차 허락받지 못했고.”
내 삶이 망가진 게 보이지만 고칠 길이 없으며,
내 길이 어긋난 게 보이는데 돌아갈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밑바닥이 있다고 여겨요. 인생의 최악은 어느 지점에서 끝난다고……. 그런데 나는 그러질 못했어요.”
“어째서.”
“내 밑바닥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고, 나는 아래로만 계속 내려갔으니까요.”
삶이 끝난 뒤에야 밑바닥에 닿았다. 그 밑바닥이 죽음이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이젠 모두 없던 일이 됐다.
지난 죽음도.
지난 삶도 과거의 파편이 됐다.
“앞으로도 점점 더 괜찮아지겠죠.”
“자기세뇌와도 같은 말이군.”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멀쩡할 리 없잖아요.”
* * *
깊은 무의식 속이었다.
“아가”
아,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었다. 너무 그립다.
“아팠구나.”
“…….”
“너를 혼자 둬서 미안하다.”
샤를. 샤를로프. 나의 아가.
검붉은 머리칼이 뺨을 간질거렸다. 짙은 색체가 시야를 채웠다. 붉다. 온통 붉게 물들어갔다.
“혼자 남겨둬 미안해.”
그건 자책이었다. 뼛속 깊이 사무친 자책감이 짙다.
“아가. 나의 아가.”
“괜찮아.”
“샤를.”
“나는 괜찮아.”
샤를로프는 눈을 고요히 감았다.
벤하민은 잠든 이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고른 숨을 내뱉는데, 그 호흡이 미세하게 떨려온다.
“나를 찾아올 때의 각오는 어디 가고.”
지금 너는 왜 서서히 무너져가는 듯 보일까.
갈 길을 잃은 듯 망망대해를 헤매는 모습과도 같다.
그간 유지해온 균형을 잃고, 그 몸은 서서히 내려앉는다.
“지난 몇 년간은 무덤에서 벗어나듯 버둥대며 발목에 닿은 이들을 끊어냈다면.”
이런 눈짓을 하는 이들은 대개 비슷했다.
“지금 너는 그런 구심점을 잃었구나.”
벤하민이 샤를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바깥에 있느냐.”
“네. 폐하.”
“수면초를 가져오너라. 오늘은 황후에게도 수면초가 필요하겠구나.”
조금 더 깊게 잠들도록.
호흡이 나른히 풀렸다.
굵은 손으로 샤를의 이마를 덮었다.
“네 걸음은 내가 붙들어놓을 테니.”
시녀가 수면초를 가져와 침대 맡 협탁에 올려놓았다.
그는 성냥을 태워 수면초에 불을 붙였다.
“편히 잠들어도 된다.”
흰 침구에 붉은 물감을 떨군 듯,
그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나는 너를 놓을 마음이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