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무덤 가까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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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무덤 가까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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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무덤 가까이에
2023.08.08.
투두두둑. 어깨를 때리는 비는 점점 거칠어졌다.
빗길을 뚫고 도착한 이들은 경계 1구역으로 떠났던 정보관 정보사들이었다.
“샤를.”
벤하민이 로브를 벗고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그는 눈매를 좁히며 표트르를 흘겼고,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샤를로프에게 닿았다.
“다 젖었군.”
시녀장은 사색이 됐다.
“소, 송구합니다, 폐하!”
“덮을 것을 가져오너라. 아직은 바람이 차갑다.”
시녀들이 담요를 가지러 떠났고, 표트르가 약식으로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군.”
그의 시선이 지팡이로 향했다.
표트르가 지팡이를 짚은 팔에 힘을 주었다. 팔목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지팡이를 짚은 몸은 이미 비스듬히 기울었고, 왼쪽 발목이 바깥으로 비틀린 게 여실히 느껴졌다.
“거동은 괜찮나?”
“아직 몸이 미욱해서 그렇습니다. 곧 회복될 터이니 염려 마십시오.”
저 꼴로 빗길을 지나온 부분도 석연치 않다.
“폐, 폐하! 귀환하셨습니까!”
시종장이 황제의 귀환 소식을 듣고 궐에서 뛰어나왔다.
마부가 그의 군마를 이끌고, 벤하민은 장갑을 벗어 시종에게 건넸다. 시종이 그의 장갑을 챙겨 넣었다.
“내일 귀환하실 예정 아니었습니까?”
“일정이 그렇게 되었다.”
“전령이 지금 막 도착해서 귀환 소식 확인이 늦었습니다. 갈아입을 옷가지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로브를 벗자 빗물이 주르륵 흘렀다. 빗물을 털어내던 벤하민이 샤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주 이러는 건 습관인가?”
“본의 아닌 우연이에요.”
“이런 우연이라면 자주 겹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겠어. 내가 자리를 비울 때면 이런 모습을 자주 보이잖아.”
시녀들이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었다.
“날이 안 좋군. 오늘은 이만 퇴궐하길 권하지.”
표트르는 눈매를 찢었다.
“이 아비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후, 때가 되거든 찾아뵙겠습니다.”
표트르 곁에 섰던 하인이 ‘히끅’ 하고 딸꾹질을 삼켰다.
가문에서부터 동행했던 하인은 덜덜 떨며 경련했다. 그의 몸이 마른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지팡이를 짚은 팔이 딱딱, 하고 바닥을 긁었다.
“이만 돌아간다.”
그 하인이 허둥대며 가주의 뒤를 따랐다.
* * *
“튜텨가 마차가 막 황궁을 떠났습니다.”
정보관 정보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튜텨가에 사람을 붙여놓아라. 내부를 조금 더 살필 필요가 있겠구나.”
벤하민이 걸음을 빠르게 재촉했다.
그의 발아래 물웅덩이가 파였다. 군화에 질척한 습기가 스몄다. 그가 걷는 길목을 따라 발자국이 선명히 찍혔다.
침실 문이 열렸다.
샤를로프가 그 기척에 몸을 돌렸다. 뺨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정수리 위로 수건이 톡 떨어졌다.
“물에 젖은 생쥐가 되었어.”
바깥의 한기가 그의 손에 스몄다.
그가 묵직한 손으로 샤를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내일 도착하는 일정 아니었던가요?”
“마물 사체 채취가 끝나는 대로 일정을 마무리 지었어. 그 일정을 조금만 더 늦췄어도 험한 꼴을 봤겠어.”
수건이 샤를의 시야를 가렸다. 그 때문에 그의 시선을 피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비 때문에 귀환이 더 늦어질 줄 알았어요.”
“황실을 오래 비워 놓으면, 내 시야 밖의 너는 늘 이런 꼴로 있었으니까.”
벤하민이 마음에 안 든다며 혀를 찼다.
“안팎으로 아주 엉망이군.”
“단단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어조이네요.”
“빗길을 뚫고 달려왔더니, 너는 이런 꼴을 보여주고.”
벤하민이 시선을 가렸던 수건을 끌어내렸다.
“내가 마음 놓을 여유가 없었잖아.”
젖은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엉켰다.
“혈색이 검더군.”
“아버지 말씀이시죠?”
“발목을 접질렸는지 발을 절고, 바깥으로 비틀려 꺾였어. 꼭 발목뼈가 완전히 한번 나갔던 사람 같더군.”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라도, 몸의 중심이 바깥으로 기운 건 숨기지 못한다. 발목이 비틀리면 그만큼 몸의 중심도 옮겨간다.
그는 튜텨가의 가주를 떠올리며 이야기했다.
“그간 바깥 걸음이 뜸하더니 병색이 완연해졌어.”
“아프다더니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네요. 그간 성정을 떠올린다면, 저 꼴로 황궁 문턱을 밟을 분이 아닌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샤를로프는 입가를 더듬으며 비소를 지었다.
“기억과는 사뭇 다르죠.”
제 살을 파먹으며 서서히 망가져가던 이였다.
그 끝자락에 닿은 듯, 그 꼴도 엉망이었다.
“다만, 그 모습이 본래 모습이라는 듯…….”
균형을 되찾았다면 착각일까.
샤를로프는 말끝을 흐렸다.
눈이 시렸다. 그녀가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는데, 그의 팔이 샤를의 턱을 고정했다.
“어디 봐.”
“흙이 조금 들어갔는가 봐요.”
조금 전부터 그랬다. 그가 붉게 충혈된 눈을 들여다보며 눈매를 어루만졌다.
“바깥에 오래 있어서 그렇잖아.”
굳은살이 박인 손이 눈두덩이를 쓸었다. 거칠한 손길에 살갗이 까끌까끌했다.
바깥의 한기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 차가움에 어깨를 떠는데, 그의 시선이 어깨에 닿았다.
“목욕물 준비는 아직인가?”
“지금 막 준비 끝났습니다. 일단 몸부터 녹이십시오, 폐하.”
시녀장이 조심히 다가와 권했다.
“씻는 게 먼저겠군.”
샤를로프는 이미 핏기가 질려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 * *
시녀장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흰 침의를 입은 샤를로프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다.
수건을 내려놓은 시녀장이 빗을 가져와 머리칼을 빗었다.
거울에 비친 여인은 낯빛이 창백하더라도 고고했다.
목선은 얇고 흔한 목걸이 하나 걸치지 않더라도 무게감이 흘렀다.
시녀장이 곁눈질로 거울 곁을 흘끔거리며, 빗질을 이어갔다.
“잠들었나?”
“…… 네. 폐하.”
“내가 눕힐 테니 나가봐.”
시녀장이 빗을 내려놓았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벤하민은 샤를의 허리에 팔을 넣어 들어 올렸다.
잠든 이의 무게는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무게감조차 없는 황후는 ‘이래도 되나?’ 하는 의구심만 안겨주었다.
‘떠나기 전보다 더 말랐군.’
목욕하는 내내 같이 있었다. 저 몸이 얼마나 가늘고 여린지 잘 안다.
비에 젖은 몸을 온수로 녹여냈고, 샤를로프는 목욕 이후 꾸벅꾸벅 졸았다.
‘……기분 탓인가? 활동기에 접어들며 잠이 많아졌군.’
벤하민은 샤를로프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침대 시트가 아래로 꺼지고, 옆으로 돌아누운 샤를이 이불에 뺨을 묻었다.
베개를 목 뒤로 넣어주자, 얕은 한숨이 터졌다.
“아무것도 안 했어.”
그저, 곁에 있었다.
벤하민은 그 곁만 지켰다.
그게 그의 몫이었다.
‘목도 가늘고.’
벤하민은 샤를의 어깨를 감싸고 몸을 수그렸다. 목덜미에 밴 체향을 맡던 그는 검붉은 머리칼을 손가락에 걸고 어루만졌다.
“정보관과 회의가 있어서 나가봐야 해. 먼저 자고 있어.”
벤하민은 이불에 파묻힌 샤를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침실에서 나오자 시종들이 따라붙었다. 시종장이 겉옷을 가져와 챙겨주었다. 그는 커프스단추를 단정히 뀄다.
“정보관 정보사들이 모두 집무실에 도착했습니다.”
벤하민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스켈라가 곁으로 다가와 합류했다.
집무실에 서류가 가득 쌓였다. 회의실 탁자를 길게 일자로 뻗어 있었고, 정보관 정보사들이 여럿 자리했다.
“마물 사체 검안은 끝났나?”
“막 끝났습니다. 마물핵이 자리했습니다. 직경 1cm로, 활동기 초기임을 참작하더라도 진행 속도가 빠릅니다.”
보관함에 놓인 마물 사체는 검은빛을 띠었다. 독기로 부식됐다는 뜻이었다.
“고대협약을 기억하나?”
“……흑주술과 마물을 쫓아냈다던 조약 말씀이십니까?”
“협약이자 금제이며, 협약의 집행자가 서로의 영혼을 묶어 증명하였지. 살아 있는 이들은 땅 위를, 죽은 이들은 땅 아래로. 서로에게 관여하지 말고, 서로에게 섞여들지 말고 나뉠 것.”
고대협약 집행자는 이 땅을 불가침영역으로 지정해놓고, 놈들이 이 땅을 밟지 못하도록 금제를 걸어놓았다.
마물은 독기에 끌리고, 독기는 흑주술에서 시작됐다. 흑주술이 이 땅에서 쫓겨나며, 마물도 모두 땅 아래로 쫓겨났고, 그간은 그 균형이 유지됐었다. 그런데 저놈들이 요즘 땅 위를 기어 다닌다.
“누군가 고대협약의 금기를 도외시하고.”
“…….”
“놈들을 땅 위로 끌어올리려고 든다.”
고대협약으로 엄히 금지됐던 일이었다.
너무나 익숙하기에 다들 잊은 협약이며,
그 존재가 당연했기에 흐릿해진 역할이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에 다들 잊었고, 협약의 가치도 무뎌졌다.
“포퓨타 경계 1구역에 황궁 3기사단을 파견한다. 토벌단 일행에 정보관 정보사도 참관해, 포퓨타 일대의 정황을 보고하도록 해라.”
모두가 떠나고 벤하민은 집무실에 홀로 남았다.
서류 잉크가 손목에 묻어 번졌다. 그가 셔츠를 걷어내며 눈매를 찌푸리는데, 곧이어 집무실 문이 열렸다. 로스켈라가 문틀을 손등으로 두들기며 기척을 냈다.
“날이 굉장히 습하군요.”
“……확실히 종일 비구나.”
“활동기 초기면 꼭 이러잖습니까? 날이 좋던 적이 드물지요. 길목이 얼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비 때문에 집무실이 눅진하게 가라앉았다.
로스켈라가 재킷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잉크부터 닦으십시오. 늦게 지우면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벤하민은 손수건으로 잉크를 닦고, 짧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심중이 복잡하셔도 겉으로 보여선 안 됩니다.”
로스켈라가 집무실 문을 닫고 서류를 정돈했다.
“걱정됩니까?”
“뭐가 말이냐?”
“토벌 말입니다.”
“네놈은 심중이 복잡하여도 숨기라더니 그건 왜 묻나?”
“그냥 심복으로서 여쭙는 겁니다.”
“토벌은 익숙한 일인데, 걱정할 일은 아니지.”
“작은 변수가 섞였잖습니까?”
“네놈 말대로 작다. 작고 사소하다면 바뀌는 건 없어.”
활동기에 접어들면 토벌단이 파견되고 임무를 행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로스켈라는 입을 뻐끔거렸다.
“할 말을 잃게 하는군요.”
벤하민은 느른한 손짓으로 팔목을 만지작댔다.
그의 눈이 낮게 침전됐다.
늘 싸워왔기에 흉터와 굳은살이 지워질 일 없는 팔이었다.
샤를로프는 그런 그와 대조적이었다.
“망설임이 보입니다.”
“그런가?”
“앞만 보던 분께서 자꾸만 뒤를 살피는군요.”
“뒤에 남겨둔 이가 밟혀서일지도 모르겠군.”
망설임이 담긴 발목은 점점 무거워졌고, 발길을 돌려 뒤를 살폈다.
“뭔가를 놓쳤다는 표정이로군요.”
“아마도 그 표현이 맞겠구나.”
“놓친 건 다시 되짚으면 될 일입니다.”
로스켈라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황후께서 밟히십니까?”
“아무래도”
“그, 무덤 때문입니까?”
“죽음 가까이 서 있던 이들이 닿던 곳이다. 그녀가 닿으면 안 될 곳이었고, 그녀가 발을 뻗는다고 다다를 영역도 아니었어.”
벤하민은 그런데도 이런 기분을 지워낼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꼭 죽음 가까이에 서 있는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