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이질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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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질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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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질적인
2023.08.11.
특별할 건 없다.
지난 감정들은 마모됐고, 조금 피곤한 나날을 지나 보냈으며,
지금도 그런 시간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거기 앉아서 뭐 하느냐?”
“……그냥 있어요.”
오늘은 윈저가에 들러 어머니의 무덤을 찾았다.
샤를로프는 묘비에 머리를 기댔다. 단단한 비석은 샤를의 몸을 지탱했고, 이날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레안드로는 그런 외손녀의 뒷모습을 내려다봤다.
묘비 비석에 기대앉아 몸을 옆으로 기울였는데, 검붉은 머리칼이 언제 저만큼 길었는지 등을 모두 덮었다.
“활동기 예배의식에 다녀오는 길이냐?”
“아셨어요?”
“마물 활동기가 시작됐으니, 신전이 예배의식을 치를 때도 됐구나.”
샤를로프는 긴 옷소매를 추슬렀다.
붉은 옷감은 색채가 또렷했고 검은빛이 더 짙었다. 겹겹이 챙겨입은 예복은 채도가 낮았다.
“많이들 잊었는데 기억하시네요.”
“지금 제국은 거의 잊었지.”
“선대의 선대 때부터 모두 잊도록, 그 흔적을 지워냈으니까요.”
마물과 싸워온 이들과 그 죽음은 모두 덮어졌다.
과거 선대는 그 검에 깃든 명예와 존엄을 지워버리고, 그 희생도 묵언했다.
옛날 관례들은 그렇게 잊혔다.
“마물과 싸우고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의식행위예요. 지난 황실은 그 희생을 잊어도, 이젠 또 달라야죠.”
활동기를 맞으면, 황후가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는 게 관례였다.
낡은 관례였으며 이젠 실전되었지만, 본래 민심이 어지러울 시기에는 옛것을 찾아서 안정을 꾀하는 법이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 묘비 곁을 지키는구나.”
레안드로는 외손녀와 거리를 좁혔다.
흙을 밟는 걸음이 더뎠다. 그 걸음에는 주저함이 담겼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멈춰선 게, 그의 조심성을 보여주었다.
“……무심하기는.”
깔 것도 없이 흙바닥에 앉은 손녀는 제 친모의 묘비 곁을 지켰다.
“황가의 어른이 되어 황궁 예법과 규율을 어겨선 안 된다. 하인에게 깔 것을 가져오라 이르마.”
“곧 가봐야 해요.”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레안드로는 그 말을 내뱉고도 아차 싶었다. 그게 꼭 저 아이 발을 붙들어놓는 듯 들렸다.
“다음에 또 걸음할게요. 자리를 오래 비운 듯해서요.”
곧이어 황궁에서 동행한 호위들이 다가왔다.
레안드로는 그 모습을 보며 예법을 갖췄다. 다만, 그의 눈짓에 담긴 염려하는 기색은 여전했다.
“그럼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 * *
마차가 황성 중앙광장을 지나쳤다.
과거 진혼제를 지냈던 위령탑을 벗어나, 큰 시가지를 지나던 때였다.
“이런! 워워! 진정하거라!”
마부는 쩔쩔매며 말을 진정시켰다. 샤를로프는 마차 창턱에 기댔던 팔을 뗐다. 호위가 곁에서 문을 두들겼다.
창을 손끝으로 밀어 열자, 카타리나가 몸을 숙여 고했다.
“마차 바퀴가 빗물 구멍에 빠져서 그렇습니다. 송구합니다.”
“네가 내게 죄송할 일은 아니다.”
샤를로프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시간이 늦었어.”
목을 젖힌 그녀는 시가지의 자명종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첨탑의 시계 초침이 시각을 표시했다.
숄을 어깨에 덮고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그 속에 검붉은 머리칼이 숨어들었다.
황실 예복도 모습을 감추었다.
“저녁 무렵이라고 날도 추워지는구나.”
“나올 때만 해도 막 해가 뜨던 무렵이었는데 자리를 오래 비웠습니다.”
“신전 예배의식이 오후 늦게까지 진행됐으니 그럴 만했지.”
교황은 그 상징성 때문에 예배의식에 하넬리를 붙들어놓으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예배의식이라면 학을 떼던 하넬리는 그날 이미 술병을 들고 잠적했다.
“교황께서 고혈압을 앓는다더니 빈말은 아니겠어.”
그 말을 흐릿하게 끝맺던 때였다.
카타리나가 검집에 손을 올렸다.
“폐하. 불온한 기척이 느껴집니다.”
근위대가 검집을 꽉 움켜쥐고 언제든 뽑아낼 태세를 갖추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아, 어쩐지 익숙한 이였다. 튜텨가에서 일하던 하인이었는데, 그가 끈에 묶인 허수아비처럼 몸을 계속 꺾어댔다.
“……조용히 보내거라.”
“아, 아가씨. 저입니다. 저, 저, 튜텨가에서 아가씨를 모셨었습니다. 저, 저를 잊으셨습니까?”
그 얇은 목소리는 목에 자갈을 넣어 박박 긁듯 괴이했다.
“아는 이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듯 보이는구나.”
“어찌할까요?”
“황궁 시가지다. 어수선하게 굴지 마라.”
“그럼, 은밀히 치워 놓겠습니다.”
근위대가 놈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길로 이끌었다.
놈은 발목을 절었다. 그게 꼭 짐승에게 물려 뜯긴 듯했다. 살갗은 검게 썩고 발목은 접질려 비틀렸다.
놈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 핏대는 검었다. 안구에 검은 혈색이 돌고, 그건 놈의 생명력을 좀먹었다.
“저 꼴은 뭐란 말이냐?”
그날 친부도 그렇고, 튜텨가와 또 이렇게 엮였다.
끊어낸다고 끊어냈는데, 애당초 끊긴 적도 없던 건가?
그 걸음이 방향을 바꾸었다.
샤를로프는 놈의 뒤를 따라 골목길로 직접 걸음했다.
“험한 모습입니다.”
“저런 꼴로 내 앞에 나타났다면, 그런 이유 또한 있을 거다.”
놈이 물에 젖은 솜처럼 짓뭉개졌다.
“그럼, 내가 직접 살피는 게 옳아.”
샤를로프는 말끝을 흐리며 팔을 내저었다.
“길목을 막지 마라.”
놈은 팔로 제 목을 긁었다. 그 가려움이 해소되지 않는 듯 손톱으로 살갗을 후벼팠고, 바닥에 굴러 이마를 긁어댔다.
눈에 핏발이 서더니, 안구에 피가 고였다.
“……숨, 숨겨주십시오. 가, 가주께서 저를 찾으시면 죽일 겁니다. 부, 부디, 지난 인연을 잊지 마시옵고. 허억!”
놈은 스스로 목을 졸랐다.
“끅끅!”
카타리나가 샤를의 시야를 가렸다. 다만, 샤를로프는 이미 죽은 이의 시신을 본 뒤였다.
‘이런 모습을 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 시선이 죽은 이의 시신에 닿았다.
익숙한 이였다.
그 감정이 좋지 못했고 이들을 저주하긴 했어도, 이런 죽음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죽었습니다.”
“호흡과 맥박이 모두 끊겼나?”
샤를의 억양은 담담했다. 죽음을 입에 담는 이들은 대개 동요를 보이지만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 모습은 이질적이었고, 카타리나가 놈의 맥박을 다시 손으로 짚어 확인했다.
“맥박이 끊겼습니다. 아는 이가 맞습니까? 혹여, 다른 이와 착각한 건 아닙니까?”
“익숙한 낯을 보니, 튜텨가의 하인이 맞다.”
샤를로프는 목을 긁듯 낮게 읊조렸다.
“이상하구나. 왜 이런 꼴로 여기서…….”
“병색이 완연합니다.”
샤를로프는 눈매를 좁혔다.
“마차는 채비가 끝났나?”
“바퀴가 으스러져 교체하려면 조금 더 걸립니다.”
“그럼, 황궁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려라. 튜텨가에 다녀와야겠다.”
그 집안에 제 발로 걸음하는 날이 예정보다 일찍 찾아들었다.
* * *
튜텨가 대문이 열렸다.
애당초 잠겨 있지도 않다.
‘조용해.’
기척이 없다. 내부가 너무 고요했다.
‘어째서…….’
해가 질 무렵이면 가장 떠들썩할 때다.
장작을 패오고, 식사 준비로 음식 냄새를 솔솔 풍길 무렵이었다.
그런 기색은 없다. 사위는 어둠에 잠겼고, 빈 저택만이 사람을 맞이했다.
“여기 계십시오. 안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근위대가 대문을 넘었다.
샤를로프도 근위대를 따라 문턱을 넘었다.
사람이 없다.
조금의 위기감도, 조금의 불쾌감도 없다.
예전에는 이곳이 답답하고 감옥 같았는데, 지금 이곳은 황량한 벌판 같았다.
“기척이 없어.”
사람이 지내던 곳이면, 이들이 자리를 비웠어도 그 자취가 남는 게 맞다.
여기는 모든 게 끊겼다.
“하루만이군.”
제복을 입은 이들이 저택 문턱을 밟았다. 황궁에서 나온 정보관 정보사들이었다.
벤하민이 정보관 속에 섞여 저택을 샅샅이 담아냈다.
“놈이 발을 뺐어.”
“그 꼴로 사라질 줄은 몰랐습니다.”
“병색이 완연하여 도망갈 줄 누가 알았겠느냐?”
황후의 친가라 고요히 접근한 게 화근이었다. 놈은 이미 떠난 뒤였다.
“내부 기척은 끊겼고, 족적은 파악됐나?”
“밖으로 나간 족적은 없습니다.”
“그럼 내부에서 끊겼군.”
벤하민이 눈매를 좁히며 정보관에게 일렀다.
“저택을 살펴라.”
“살펴보겠습니다.”
정보관 수색대의 조사는 빠르게 이어졌다. 곧, 정보사 하나가 저택에서 나와 보고했다.
“집이 비었습니다.”
“하인들은?”
“모두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벤하민이 눈매를 좁혔다.
“다른 기척은 없나?”
“작은 기척은 하나 느껴집니다.”
정보관 정보사가 저택 내부를 눈짓하며 고했다.
“작은 방인데 확인하려니까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문을 억지로 따려는데 울음소리가 들려…….”
어쩐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내가 들어가 보죠.”
저택 구조는 익숙했다. 갑갑한 이 집안에 묶인 지난 세월은 눈을 감고도 길목을 찾게끔 이끌었다.
긴 복도가 이어졌다. 촛불은 모두 꺼졌고 어둑한 어둠만이 남았다.
‘흐윽. 흐윽.’
문고리를 잡자 호흡이 끊겼다.
“나야.”
여전히 문은 잠겨 있었다.
“들어갈게.”
카타리나가 검집으로 문고리를 내려치자 문이 열렸다. 내부는 어둠에 잠겼다.
그 아이는 숨어 있었지만, 여기서 그만한 아이가 숨을 곳이라고는 하나였다.
‘어릴 적 내가 그러했듯.’
샤를로프는 협탁의 식탁보를 들추었다.
“이젠 숨바꼭질할 나이가 아닌데 잘 숨었구나.”
그 아이는 공포에 질려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낯빛은 희게 질렸고, 식은땀이 흘러 아이의 목을 적셨다.
“기력이 너무 쇠했습니다. 바깥으로 데려가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겠군요.”
카타리나가 곁에서 조언했다.
동공은 이미 풀렸고 손끝은 너덜너덜 찢겼다. 이빨로 계속 손끝을 깨문 듯 손가락이 엉망이었다.
“이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시. 싫어요. 안 돼. 나가면 아, 아파요.”
“아프지 않아.”
“다들 아프댔어요.”
“이젠 여기 아무도 없어, 헨리에타.”
헨리에타는 작은 몸을 협탁 아래에 끼어 넣었다.
짧은 진갈색 머리칼이 엉망으로 엉켰다. 아이는 이미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숨을 헐떡이는데 호흡이 가팔라졌다.
“아.”
샤를로프는 작게 숨을 토해내며 앓았다.
‘내가 익숙하게 이곳을 찾은 이유.’
이 아이는 자신을 닮았다. 가장 음울하던 그 시기의 자신을 말이다.
그래서 이 아이가 밉지만 미워하지 못하고, 싫지만 싫어하지도 못한다.
‘우리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던가?’
뒤로 기척이 다가와 섰다.
“내부가 비었어.”
벤하민이 짧은 머리칼을 헝클이며 다가와 섰다.
“다른 기척은요?”
“기척도 지워졌고.”
“그럼, 이 아이 혼자뿐이군요.”
이 아이를 여기에 혼자 두면 안 되지 싶다.
샤를로프는 협탁 아래로 손을 뻗었다. 여린 손목이 유난히 가늘었다. 그래도 내뻗는 팔은 단단했다.
“나가자. 이리로 와.”
“…….”
“꺼내줄 테니 나와.”
“혼자는 싫어요.”
“함께 나가자.”
이 아이를 보는데 왜 자신의 기분이 우울해지는 모를 일이다.
이 아이가 자신을 닮아서인가.
“……나가고 싶어.”
헨리에타가 마지막으로 속삭인 이야기였다.
그 뒤, 그 아이는 그대로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