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나는 이미 죽었고. (45/51)


#45. 나는 이미 죽었고.
2023.08.04.



 


“내가 뭘 숨겼던가요?”

샤를로프는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검붉은 머리칼이 구불구불 엉켰다.


“숨기는 게 없나?”

“거짓으로 숨긴 적은 없어요.”

뭔가를 숨기려고 의도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직접 이야기한 적 또한 없다.


‘그럼 숨긴 건가?’

모든 시작은 제 죽음이었고, ‘내가 한번 죽었어요.’ 하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면 침묵하는 게 맞다.

벤하민이 샤를의 어깨를 짚고 허리를 숙였다.


“호흡이 조금 느려졌군.”

“아…… 그랬던가요?”

“몸에 기력도 없고.”

“기력이 조금은 빠져서요. 약 기운이 독하네요.”

“황궁의가 준 안정제 말인가?”

아론이 호흡 안정제를 챙겨주었는데, 약 기운 덕분인지 숨이 한결 편안해졌다.


“약이 독한 대신에 효능이 좋아요.”

“나는 사람 몸이 이만큼 약하는 걸 몰랐어.”

벤하민은 여린 어깨를 보드랍게 어루만졌다. 힘주어 움켜쥐었다간 으스러질 듯 여린 몸이었다.


“이제 조사는 끝났나요?”

“몇 가지만 더.”

“…….”

“어릴 적, 남대륙에 다녀온 적 있나?”

“아니요.”

“혹은, 가주가 남대륙에 자주 다녔나?”

“그 또한 아니요. 제 아버지는 남대륙을 미개하다고 여겼어요.”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알겠다.

루퍼틱 병.

바깥에서 아론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적에 가주가 자리를 자주 비웠나?”

“네. 곁에 없었어요.”

“그럼, 그간 너는…….”

“거의 혼자였네요.”

그의 팔에 힘이 담겼다.


“조금 씁쓸해 보이는군.”

“나는 평범함을 바랐는데, 내 평범함은 이번 생에도 힘드네요.”

지난 죽음 뒤에도 크게 바뀐 건 없다.


“너는 꼭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것 같아.”

“어째서요?”

“말의 시제가 섞이거든. 내 시선과 네 시선이 엇갈리는 이유도 그 때문 같아.”

샤를로프는 숨을 삼켰다. 목 아래로 앓는 소리가 묻혔다.

이젠 없던 일로 잊힌 과거.

나만 홀로 기억하고 남들은 잊어버린 전생.


“샤를.”

그가 샤를의 쇄골에 입술을 눌렀다. 더운 숨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샤를로프.”

벤하민이 이름을 되뇌며 곱씹었다.

아니다. 그가 곱씹던 건 이름만이 아니었다.

벤하민이 살갗을 약하게 깨물었다. 쇄골에 따끔한 통증이 퍼졌다.


“으음.”

샤를로프는 목 안을 긁듯 앓았다.

허리에서부터 자극이 올랐다. 근육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가 옆구리를 단단히 받쳤다. 커다란 손아귀가 허리를 받쳐 안고 몸을 지탱했다.


“왜 계속 빠져나가려 해?”

“몸이 조금 뻐근해져서요.”

“잠결에 내게 입 맞추고 숨을 얽던 네가…….”

샤를로프는 팔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도 어색해하며 굳으면 어떡해.”

그가 샤를의 손목을 가져갔다.

손바닥을 또 약하게 깨물고, 입술로 뭉근하게 눌렀다. 그 촉감이 뜨겁고 보드라웠다.


“맥박도 너를 닮아서인지 작고 여려.”

그는 손목의 살갗을 또 깨물었다.


“며칠 자리를 비우게 될 거야.”

“마물 활동기 때문인가요?”

“아무래도. 사흘쯤 비우는데, 자리 비운다고 식사는 거르지 마.”

곧이어 침실 문을 두들겼다. 그 무렵, 둘의 대화도 끊겼다.


“폐하, 로스켈라입니다. 집무실로 기사단장이 찾아들었습니다.”

그 뒤.

이튿날 벤하민이 자리를 비웠다.

* * *

포퓨타 경계 1구역.

마물 크라켄이 다리를 뻗쳤다.


“크라켄의 먹물에 닿지 마라!”

포퓨타 사령관이 외쳤다.


“놈들의 먹물 주머니가 부풀어 오르면 거리를 벌려라!”

크라켄 먹물은 그 자체로 짙은 독기였다. 닿기만 해도 살갗이 부식했다.

놈들 먹물이 튀자 군함 갑판이 검게 오염됐다.


“이놈들 다리가 너무 질깁니다.”

“잘 끊어내라. 그 다리에 붙들리면 바다로 끌려간…… 네놈은 거기서 뭣하고 섰어!”

크라켄이 말단병사의 허리를 꽉 조였다. 그 몸이 허공으로 솟고, 바다 아래서 수십 개의 크라켄 다리가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크라켄 다리가 갑판에 투두둑 떨어졌다.


‘히익!’

그 다리에 깔려 갑판에 떨어진 병사는 버둥대며 마물 사체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그 곁에 로브를 쓴 사내가 서 있었다.

장, 장교인가?

먹구름 탓에 그림자가 잔뜩 졌다.


“……첫 발령인가?”

“아, 이번에 처음 발령받았습니다!”

“고생이 많군. 갑판에서 등을 보이지 마라. 놈들은 그길로 네놈을 바다 아래로 끌고 내려간 뒤, 새끼들의 먹이로 던져줄 거다.”

벤하민이 로브를 벗으며 이야기했다.


“내 책사도 처음 파견 때 바다로 끌려 내려가고 죽을 뻔했었지.”

“폐하. 그 일이 아직도 회자됩니까? 처음 파견 이후로는 그런 적 없습니다.”

로스켈라는 억울하다고 항변을 늘어놓았지만, 정보관 정보사들은 그런 책사의 말을 끊었다.


“놈들이 아래에 숨었습니다. 이러다간 끝도 없으니, 폭약을 터트려 한 번에 끌어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폭약을 꺼내 놓고 장병들을 도와라.”

병사는 죽을 것만 같았다.


“이만 가보아라.”

병사는 그 이야기기에 잽싸게 도망쳤다. 허둥지둥 칼을 챙겨 마물에게 뛰어가는 게, 포퓨타의 일원다웠다.

잠시 뒤, 포퓨타 사령관이 곁으로 다가왔다.


“직접 확인한 성과가 있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다만, 독기가 너무 짙다.”

“활동기 때면 독기로 이 근방이 오염되는 건 흔한 일입니다.”

독기로 바닷길이 온통 검었다.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다.

벤하민은 갑판 아래에 뒀던 시선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토벌단 내부는 어떠하냐?”

“인력이 부족합니다. 활동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곧 황궁 3기사단에서 토벌단이 추가파견 될 거다. 그 외, 토벌에 필요한 건 황궁에 전보를 올려라. 보급품은 부족함 없이 채워줄 테니.”

마물 토벌단을 통솔하는 게 해군들이었고, 이들이 곧 경계구역의 방공호였다.

황실이 토벌단을 파견해도, 그 중추는 포퓨타 해군들이 이뤘다.


“어떱니까?”

“토벌단 통솔은 사령관 몫인데 그걸 왜 내게 묻나?”

“이전까지 폐하께서 직접 통솔했잖습니까? 토벌의 기틀과 기반을 다잡고, 지금 토벌단의 체계를 잡은 것 또한 폐하였습니다.”

“당연한 사실에 감사할 건 없다.”

“너무나 당연했기에 잊혔잖습니까?”

“잊혔다고 그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포퓨타 영지.

그곳에 자리한 포퓨타 경계 1구역.

포퓨타를 보호하고 마물을 토벌하는 게 포퓨타 사령관의 책무였다.


“모두 잊었기에 당연히 잊혔다고 여겼습니다.”

“잊힌 게 아니라, 포퓨타에 힘을 주기 싫었을 테지. 욕심 많은 이들은 그 힘이 나뉘는 꼴을 싫어할 테니 말이다.”

경계구역을 안정적으로 지켰기에 그 위험을 다들 잊었다.

과거 토벌체계를 잡고 토벌단을 통솔한 게 과거 벤하민이었다면,

그 체계를 이관받은 게 현 포퓨타 사령관, 포퓨타 백작이었다.


“마물 사체 채취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직접 오셨으니 직접 채취하시겠습니까?”

벤하민이 팔을 칼집에 얹었다.


“화약을 가져와라.”

“그건 모두 꺼내 놓았습니다.”

장교들이 화물에서 폭발약을 꺼냈다.


“터트려.”

폭약이 바다 아래서 터졌다. 그 아래로 크라켄이 빠르게 솟구쳤다.

벤하민이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

놈의 입에 칼을 쑤셔 넣고 횡으로 베었다.


“이놈 머리째로 보관함에 담아라.”

벤하민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칼을 갈무리했다.

토벌단이 마지막 크라켄의 입안에 칼을 꽂으며 끝냈다.

크라켄이 입 밖으로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놈은 거품을 내뿜으며 물속으로 서서히 잠겼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 넓은 바다 아래에 경계구역이 묻혀 있는데, 이 아래에 뭐가 있는지 독기가 계속 새어나오잖습니까? 이 독기도 바닷물을 타고 밖으로 퍼지지 않고, 이 안에서만 퍼지고요.”

“밑에 뭐가 묻혔는지 모를 일이군.”

“네. 때때로는 이 아래로 내려가 보고 싶습니다.”

폭풍우가 오려는지 파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 * *

석연치 않다.


‘마물의 무덤이라…….’

마물과 죽음이 가까이 닿는다면 겪던 무덤이라.

내게는 접점이 없다.

너는 뭘 겪은 거야, 샤를.


‘끼웅.’

흰 털뭉치가 샤를의 곁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네 이름은 랸이다. 이 이름 외에는 네게 어울리는 이름이 없어.’

랸, 고대어로 하얀 영혼이란 뜻이었다.

그 외, 다른 이름은 안 될 것 같았다.

랸은 제 이름이 불리면,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곳이 제 자리라는 듯.

익숙하게 샤를의 곁을 찾았다.


“폐하 여기 계셨습니까?”

시녀들이 샤를의 곁으로 다가왔다.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자리를 피하십시오.”

샤를로프는 황궁 문서고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투두두둑. 곧이어 비가 쏟아졌다.


“제가 쓸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처마 아래에 계십시오!”

그렇게 처마 아래서 비를 피했다.

진흙의 질척질척한 그 눅눅함이 발목을 집어 끌었다.

그림자가 유난히 짙었고, 샤를로프는 그 그림자에 꼭 발을 디디는 것만 같았다.

그게 발목을 붙잡아두었다.


“랸 그만둬.”

랸이 뽀얀 앞발로 진흙을 꾹꾹 눌렀다. 흙바닥을 매섭게 내려찍더니, 흰 앞발이 금방 검어졌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폐하! 궐로 모시겠습니다!”

쓸 것을 가지러 떠났던 시녀들이 돌아왔다.


“날이 점점 안 좋아집니다.”

“흙내음이 본래 이만큼 짙었던가?”

샤를로프는 눈매를 좁혔다. 몸이 끌려내려가는 것 같다.


“랸 이리로 와.”

아직 해도 지기 전인데 날이 너무 어둡다.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


“이런! 폐하!”

쓸 것이 뒤집혀 허공으로 떠올랐다.

비바람이 옆으로 몰아닥쳤다. 호흡이 서서히 멎었다.

그 이유는 지척에 있었다.


“이런, 이 아비가 때를 잘못 맞췄구나.”

기척이 다가와 섰다.

표트르가 지팡이를 짚고 다가왔다.

물에 젖은 흙내음.

짙고 음산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었다.

둘의 걸음은 우연히 닿았다.


“아, 이 아비가 병색이 완연하여 그간 뜸했습니다.”

표트르는 혈색이 조금 검었다. 손 밑은 검고, 그의 눈은 황달기로 노랬다.


“지팡이를 짚으시네요.”

“아, 그저 때가 왔을 뿐입니다.”

표트르는 지팡이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광기가 깃든 눈은 샛노란 빛을 발했다. 탁한 기운이 그를 집어삼키듯 몸집을 부풀렸다.

까드득.

그가 어금니를 짓이겼다.


“곧 때가 온다.”

표트르가 샤를과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은 거뭇거뭇한 그을음이 가득했다.

이 또한 본래는 더 심했지만, 거의 지워진 듯 흉터처럼 자리했다.


“나는 너를 되찾아올 것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 어긋났다.

그의 눈이 샐쭉해졌다. 입과 눈이 얇게 가늘어졌다.

과거에는 깊이 모를 적대감과 혐오감에 시달리던 사람 같았다면.


‘지금은 균형을 다잡은 것 같군.’

마치,

본래 이렇게 될 사람이라는 듯.


“흙은 천하다고 손에 댄 적도 없던 분께서 그 꼴은…….”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표트르가 눈매를 가늘게 찢었다.

어둡다. 모든 게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림자는 짙었고, 이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어둑한 그늘이 아가리를 쩍 벌렸고, 그가 호흡을 가늘게 삼키던 때였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인가?”

그 호흡을 누군가 끊어 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