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번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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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번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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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번식기
2023.07.28.
벤하민이 칼날을 비틀어 찔렀다. 그가 손목을 비틀자 위력이 더욱 매서워졌다.
그건 짙은 살기였다. 서로를 찢어발기듯 살기가 넘실거렸다.
칼날은 눈앞의 이의 목을 베어내려고 혈안이었다.
“빌어먹을.”
타탄테는 목을 젖히며 입술을 짓이겼다.
“네놈 검기는 주인을 닮아서 성질머리가 더러워. 어딜 뻗칠지를 모르겠어. 네놈 지금 내 목덜미 노리면……! 그렇다고 급소를 노리는 건 너무하잖는가!”
타탄테는 질색하며 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빗겨나가며 서로의 칼등을 스쳤다.
칼등이 빗겨 가며 거칠게 마찰했다.
벤하민은 손목을 비틀어 강하게 내리쳤다. 화려한 기예는 없다. 묵직하게 쾅쾅 내려쳤다.
“네가 못 피할 놈은 아니잖아.”
“곧 본국으로 귀환하는데, 내 몸에 지금 칼자국이라도 내겠다는 건가?”
서로를 알기에 급소를 노리는 데 거침이 없다. 타탄테는 끌끌 대며 이야기했다.
“몇 년 사이에 기세가 날카로워졌어.”
타란국 시종들이 본다면, 타국의 황제랑 진검으로 대련을 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고 꾸짖겠지만 어쩌겠는가?
“검이 사람을 죽이는 검으로 변했군. 급소를 단칼에 찔러넣듯 군더더기 없이 살수를 펼치고, 내가 알던 그대가 맞나 싶어. 마물을 베던 검과는 분명히 다른데, 황위에 그냥 앉은 건 아니었군. 황위에 앉기까지 고생을 좀 했던 모양이야.”
칼날이 타탄테의 뺨을 스쳤다. 타탄테는 뺨을 짚으며 핏물이 밴 피부를 닦아냈다.
“도발하다간 다음에는 내 목이겠어.”
“지금이라면 네놈 목을 잘라내도 어려울 건 없겠지.”
살갗을 가르는 살기는 언제라도 서로의 목을 앗을 것 같았다. 저 무정한 놈은 말없이 제 목만 노려온다.
“예전보다 검기에 담긴 힘이 허술해졌군. 지난 오 년간 놀았나?”
“타란국은 경계구역에 둘러싸인 나라인데, 내가 놀기만 했겠나? 마물과 싸우는 건 사정이 다르다는 데도, 네놈이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또 볼품없이 느껴지잖아.”
벤하민이 타탄테의 복부를 걷어차며 혀를 찼다.
“또 머리가 비었어.”
날것 그대로의 검기가 사방으로 뻗쳤다. 살갗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살기에 타탄테도 기함했다.
“각박한 놈 같으니라고.”
“예전부터 옆구리가 계속 빈다고 이야기해도 고쳐지질 않는데, 칼로 찔러보라고 일부러 열어주었나? 팔뚝에서부터 어깨까지 비잖아. 이대로 옆구리를 베어내고, 어깻죽지까지 잘려나가야 정신 차리겠어?”
벤하민이 타탄테의 옆구리를 칼등으로 찔렀다.
“오른쪽 어깨를 똑바로 방어하라 이야기했잖아.”
“늘 느끼지만 악독하고 잔인한 검술이야. 네가 마물 사냥 때면 들개처럼 날뛰던 모습을 자주 봐왔지만, 너도 굉장히 독해.”
짙은 살기에 쇠꼬챙이로 뼛속까지 관통당한 기분이었다. 타탄테는 대련복을 탈탈 털어내며 본론을 꺼냈다.
“……포퓨타 해안 인근으로 지나오면서 느꼈는데, 인근 마물들이 거칠어졌더군. 또, 크라켄 다리를 잘라내는데, 고무라도 잘라내듯 뻑뻑했어. 놈들이 변이한 모양이야. 경계구역 마물은 자주 변형하고 바뀐다지만, 조금은 살펴봐. 지난 황궁 소동도 그렇고, 아무래도…….”
“놈들의 활동기인가?”
벤하민은 짧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혀를 찼다.
“독기가 점점 짙어진다면, 놈들이 활동기에 접어든 게 맞아.”
“곧 토벌단을 조성해야겠군.”
“경계구역 틈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고, 독기 침식도 부쩍 심해졌어. 놈들을 조심해.”
경계구역 마물은 활동기와 회복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이 독기는 활동기가 되면 점점 더 짙어진다.
지난 오 년간은 회복기로 마물의 독기가 옅은 편이었다.
이 덕분에 마물 사냥주기도 느슨하게 잡혀있었지만, 회복기가 끝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 년이 지났다. 곧 활동기가 시작된다.
놈들은 이 활동기에 변형을 거듭하며 마수화가 되어갔다.
“최근, 마물들의 태동이 심상치 않아.”
“바깥 꼴을 봐서는 경계구역은 더 난해하겠어.”
마물은 독기에 끌리고, 독기는 흑주술에서 시작됐다. 흑주술이 이 땅에서 쫓겨나며, 마물도 모두 땅 아래로 쫓겨났고, 그간은 그 균형이 유지됐었다. 그런데 저놈들이 요즘 땅 위를 기어다닌다.
“거슬리는군.”
벤하민은 목을 꺾으며 검기를 피했다.
“……네놈은 품위라는 건 버렸나?”
“내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네놈을 언제 이기겠어.”
벤하민은 타탄테의 복부를 걷어차고, 놈의 검을 거칠게 내려쳤다.
뱀처럼 예리한 검날이었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칼날은 꼭 끝자락에 독이라도 묻힌 듯 살의 가득했다.
그의 검끝이 멈춘 건 조금 뒤였다.
“샤를.”
벤하민이 살의를 거뒀다.
* * *
샤를로프는 눈앞의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믿는 모양이구나.”
저 칼끝이 서로의 목숨을 앗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뺨을 할퀴는 검기가 매섭다. 살갗을 찌르고 찢어놓는 것 같다.
샤를로프가 뺨을 더듬어 내리는데 피부가 얼얼했다.
저 멀리 있는데도 살의가 살갗을 찌르는 게, 시종들이 본다면 기함하겠다.
“매섭군요.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만 가자.”
그녀가 막 걸음을 돌리던 때였다. 머리맡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왔으면 이야기해야지.”
익숙한 체취가 훅 끼쳤다. 어깨를 감싸는 팔이 묵직했다.
고개를 젖히자 벤하민이 곁에 서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흘렀다. 그걸 손등으로 닦아주는데, 곁으로 기척이 하나 더 다가와 섰다.
“제국에 치유의 광명이 닿기를. 또 뵙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깨어 계시네요.”
“반가워요, 작은 타란.”
타탄테는 검집을 갈무리하고 대련복을 재정비했다. 그는 너덜너덜하게 찢긴 제 대련복을 보며 앓았다.
“이번에도 내가 졌군.”
“네놈 옆구리 빈다니까 이야기해도 고쳐지질 않아.”
“타란국 전사들은 칼에 찔릴 걸 각오하고도 덤벼드는 용맹한 이들이야. 그런데, 네놈 칼날은 회복이 안 돼서……. 덕분에 항상 지는군. 독을 쓰는 거도 아닌데, 칼날에 찔리면 몸이 굼떠지고 느려지잖아. 불쾌해서 찔리기 싫다. 살기 좀 죽이고 살아라.”
샤를로프가 눈을 끔뻑거리는데, 타탄테가 대신 설명했다.
“서로 친우 사이입니다.”
타탄테는 오묘한 눈으로 샤를과 눈을 맞췄다.
“살기에 닿고도 괜찮으십니까?”
“그만큼 심약한 성정은 아니어서요. 또, 폐하께서 금방 갈무리해주어서 괜찮았어요.”
벤하민이 칼을 칼집에 꽂아 넣으며 이야기했다.
“대련은 이쯤에서 끝내야겠군. 타란국으로 아침에 곧장 떠나나?”
“다들 채비가 끝나면…….”
“그건 괜찮겠어. 저쪽은 이미 떠날 채비가 끝났는데, 타란국 시종들인가?”
시종들이 질색하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저놈들은 윗전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어.”
벤하민이 샤를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내려다봤다. 그는 타탄테의 시야를 적당히 막아서며 이야기했다.
“속이 검은 놈이니 가까이할 필요 없어.”
“내가 뒤에서 듣고 있음을 잊지 말아줘.”
타란국 시종들의 앓는 소리가 더 커졌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겠어. 지금 출발한다면 포퓨타 해안은 오늘 저녁이면 통과하겠군. 급하게 출발하느라 인사는 여기서 나눠야겠다.”
“또 그 길로 지나나?”
“늘 이야기하지만, 그쪽 길이 그나마 이틀이나 거리를 좁혀주잖아.”
마물 때문에 이틀씩이나 바닷길을 더 건넌다는 건 곤욕이었다. 놈들 다리를 뜯어서 문어 다리처럼 질겅질겅 씹어준다면 모를까.
“환수도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께서 즉위하던 날 태어난 아이입니다. 타란국은 인연을 믿는 나라이죠. 이 아이가 여기 왔다면, 필히 이번 인연에도 이유가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끌끌. 성깔이 더럽지만 제 주인만 잘 따른다면 괜찮지요.”
흰 털 뭉치가 발아래서 고개를 내밀더니, 꼬리를 탕탕 쳤다.
“……꺼지라고 내쫓는군요. 이쯤에서 인사를 나눠야겠습니다.”
타란국 사절단과의 인사는 여기서 나눴다.
격식을 내려놓았고, 이젠 떠날 때라는 듯 작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타탄테는 사절단 대표로 마지막 예우를 표했다.
* * *
타탄테는 떠날 채비를 모두 끝내놓고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이 황제궁에 닿았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게 기이하군. 저 초연함이 어디서 오는지가 궁금하구나. 지난 마물사태도 없던 일로 묻어버렸고, 내부분란을 완전히 차단해 놓았어. 잡음이 나갈 일 없도록 철저히 관리하는 게 아주 노련해.”
“누가 말입니까?”
“황후 말이다.”
“……존칭도 없이 무슨 무례입니까?”
타란국의 시종들은 오늘도 근심만 늘어갔다.
“황궁의 심장부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절단의 대표로 자리했다면, 격식과 품위를 지키십시오.”
“이상해서 그런다. 너무나 이상하잖느냐? 환수란 오만한 이들이다. 쉽게 길들여지지 않고, 특히나 힘에 절대적이다. 순수혈통일수록 강한 혈통에 이끌리고, 특히나 늑대 환수는 자아도 강하다. 그런 환수가 택한 주인이라지만 너무 유약하잖아.”
“유약한 성향은 아닙니다.”
“내 눈에는 유약해.”
“그건 그렇습니다. 황제 쪽이 아닌 황후 쪽을 택한 건 의외로군요.”
젊은 황제가 즉위하던 때 태어난 환수였다.
“이 인연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환수는 주인을 직접 택한다. 저 여인을 택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국혼이라고 듣고도 믿지 못했는데 민망하군.”
“……네?”
“너는 느끼지 못했느냐?”
타탄테는 연회궁에서 마주친 황후를 떠올렸다.
검붉은 머리칼에 적색 예복이었다.
붉디붉은 노을과도 같은 여인이었다.
“두 사람 닮았잖아.”
재수 없게도 서로의 본질을 닮아 있었다.
* * *
“폐하. 또 시종들도 없이 다녀오셨습니까?”
시종장이 쩔쩔매며 황제 곁으로 따라붙었다. 기척에 예민한 황제가 홀로 다니는 건 평소에도 잦은 일이었지만, 아직 사절단이 다 떠나기도 전이었다.
“연무장에 다녀오십니까?”
“새벽이면 늘 다녀오는데 왜 부산스러워.”
“시종도 없이 걸음 하시니 그렇지요.”
벤하민은 마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시종장을 내려다봤다.
“계속할 건가?”
“죄송합니다.”
시종장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시종들은 감히 범해선 안 될 영역이 있었다.
“따뜻한 차를 내올까요?”
샤를로프는 외투를 벗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녀장이 외투를 받아들며 벤하민을 흘끔거렸다.
“침실로 가져와.”
“알겠습니다, 폐하.”
“몸도 차면서 그러면 안 돼.”
젊은 황제는 황위에 앉고 황궁 권위를 완전히 새롭게 다 잡았지만, 황후 곁에서는 달랐다. 그걸 가장 가까이서 느끼는 이들이 시종들이었다.
침실로 들어가자 열기가 훅 끼쳤다. 샤를로프는 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따뜻하네요.”
“너무 둔감한데……. 예전부터 밤에 추위를 많이 타서 난롯불에 특별히 신경 쓰라 해뒀는데, 새벽에 밖에 나올 일이 없어서 잘 몰랐나 보군.”
그 뒤, 시녀장이 차를 내왔다.
타란국 사절단이 모두 떠났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