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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홀로 (42/51)


#42. 홀로
2023.07.25.


표트르는 목을 박박 긁었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서랍장에 무릎을 부딪친 그는 제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하인들은 그런 가주를 피했다. 하인이 몸을 벌벌 떠는데, 가주는 느린 걸음으로 발목을 질질 끌었다.

그런 음산한 기운에 하인들도 도망치듯 떠났다.

끼긱.

표트르는 저택 바깥의 흙길을 디뎠다. 비틀비틀 걷던 걸음이 뒤엉켜 그길로 꼬부라졌다.

그가 목을 떨구는데,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제 시야에 닿은 구둣발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젖혔다.


“꼴이 만신창이군.”

로브로 몸을 꽁꽁 감싼 사내였다. 낮은 목소리는 중년인의 목소리였고, 곁에는 등이 굽은 노인이 함께했다. 중년인이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모두 잃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꼴이 볼 만하다. 고대 숭배자들이 본다면 비웃겠어. 어둠에 더 침식됐다간 버러지처럼 기어 다니겠군. 시간이 되었다.”

“…….”

“곧 문이 열린다면, 네놈도 이만 깨어날 때다.”

중년인은 지팡이로 표트르의 어깨를 누르며 속삭였다.


“깨거라.”

어둑한 그림자에서 다각다각하며 머리뼈가 기어 나왔다. 그것이 이빨로 표트르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기함한 표트르가 몸을 허우적대는데, 그 아래서 손이 표트르의 목을 졸랐다.


“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고함이 저릿하게 울렸다. 이 고함은 저택까지 닿지 못했다.


“이놈이 마지막 숭배자가 맞습니까?”

“제 본질을 잊었을 뿐, 놈은 이미 어둠에 닿았구나. 흑주술이 가장 깊은 어둠에 닿는다면, 이들 숭배자는 가장 짙은 어둠에 닿는다. 제 본질을 잊더라도, 어둠에 침식된 영혼이란 제 본질을 따라가길 마련이다. 타락하고 더럽혀지고, 종내에는 파멸하겠지.”

노인은 의심된다는 듯 이야기했다.


“이 버러지로 괜찮겠습니까?”

“지금은 이 버러지 손이라도 빌려야, 땅 아래로 쫓겨난 혈족들을 조금이라도 일찍 끌어올릴 게 아니냐?”

표트르는 꺽꺽대며 무너졌다.


“깨거라. 지금 이 모습은 보기 꼴사납구나.”

“…….”

“고대협약이 힘을 다했다. 땅 밑으로 내 혈족들을 모두 쫓아냈던 지긋지긋한 협약이 뭉개졌어. 아……. 너무나 늦었구나.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고대협약으로 흑주술이 땅 밑으로 쫓겨나고, 흑주술사들도 모두 멸했다.

협약의 집행자는 흑주술에 금제를 걸었고, 이 금제는 흑주술이 땅 위에 도래하는 걸 금했다.

그런데,

지난 고대협약의 족쇄는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사람들은 고대협약의 본질을 잊었으며, 협약의 금제를 기억하는 이들도 없다.

본질이 잊혀진 고대협약도 서서히 약해졌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이젠 이 협약을 깨고 쫓겨났던 이들을 땅 위로 불러올리자꾸나.”

 

 

* * *

신년제 예복을 하나둘 벗었다.

붉은 옷감들을 한 꺼풀씩 벗겨낸 시녀들이 머리 장식도 풀어냈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내고,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꾹꾹 눌러 말렸다.


“소화제를 가져다줘.”

시녀장이 걱정스럽게 살폈다.


“속이 편찮으십니까?”

“걱정할 수준은 아니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황궁의를 모셔오겠습니다.”

“괜찮으니까 번잡하게 굴지 말고 조용히 다녀와.”

시녀장이 눈짓하자 시녀 하나가 방을 나섰다.

젖은 머리는 금방 보송보송해졌다.


“폐하. 소화제를 가져왔습니다.”

심부름을 보냈던 시녀가 소화제를 챙겨 가져왔다.


“그것만 내려놓고 나가봐.”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샤를로프는 대답 대신 팔을 내저어 시녀들을 물렸다.

협탁에 한쪽 팔을 얹고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촛불이 일렁이고 노르스름한 불빛이 어스름하게 앉았다.

협탁 아래 서랍장에 시선이 닿았다.

서랍을 열자 낡은 종이상자가 하나 있었다. 낡은 종이상자가 으스러지랴, 그걸 조심히 꺼내려던 때였다.


“속이 안 좋나?”

“그냥, 미리 마셔두는 거예요.”

침실문이 열리고, 가운 차림의 벤하민이 돌아왔다.

약병을 딴 벤하민이 곁에서 내밀었다.


“황궁의에게 보이지 않고.”

샤를로프는 약병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약초물에서 독한 약초 향이 풍겼다.


“아론표 특제 소화제네요.”

“약병만 봐도 아나?”

“이 잡초를 씹어먹는 것만 못한 풀 맛은 아론표가 맞아요.”

샤를로프는 약병 뚜껑을 가져와 닫았다.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꼭 추억거리라도 떠올리는 표정이군.”

“어쩌면 추억이었을지도 몰라요.”

제 손으로 허망하게 놓쳤던 추억 말이다.


“방금은 뭘 꺼내 보던 중이었지?”

“……어린 시절 그림이에요.”

흑연으로 그린 그림들은 모두 세월이 지나 닳고 닳았다.

도화지도 색이 모두 바랬다.

여기에는 앳된 갓난아이부터 열아홉 무렵 때까지, 어린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시절 내 모습은 붉었다. 붉디붉은 색깔로 색칠한 것 같았다.


“그 애는 이번 생에도 나를 곤란하게 하네요. 그 애 곁에서는 내가 몹쓸 사람이 되어버리는 듯해요.”

벤하민이 샤를을 빤히 바라보았다. 짙은 눈동자가 뺨을 훑었다. 허공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


“불붙겠어. 조심해.”

이번에는 그가 시선을 먼저 피했다.

곁에서는 촛불이 일렁였다.


“고마워요.”

“왜 또 넋을 놓았어?”

벤하민이 샤를의 어깨를 눌렀다.


“이건 그건가?”

“네. 어릴 적 그림이요.”

“지금 보는 건 몇 살 무렵이지?”

“이건 다섯 살 무렵이네요. 아래에 글자가 적혀 있어요.”

“네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벤하민이 몸을 느긋하게 수그리며 속삭였다.


“작고 여려.”

“아이잖아요.”

“지금과 똑같아.”

“그런가?”

“대신 앳되군.”

젖살이 아직 빠지기 전이라고, 뺨이 통통하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얼굴은 아니구나.”

“내게 좋은 기억이 없던 시절이라서요.”

“어째서?”

“이유라…….”

샤를로프는 어릴 적 그림을 하나둘 넘겼다.


“병자를 오래도록 간병한 적 있나요.”

열아홉 시절. 나조차도 한계에 맞부딪쳤던 시절이었다. 가장 어둑하면서도 침전된 눈을 지닌 내가…….


“차라리 죽여달라 빈 적이 있어요. 몸을 비틀며 발작하던 엄마가 서서히 무너지던 게 너무 참혹해서요. 그만 아프게 해달라. 얼른 데려가라, 그만 좀 괴롭혀라, 이젠 놓아달라. 차라리 죽여달라 빌던 엄마의 모습이……. 진통제를 찾으며 울부짖던 모습이 보기 두려워져서요.”

“…….”

“그 시절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샤를로프는 그림을 접어두었다.


‘기억나버렸구나.’

벤하민이 샤를의 뺨을 한번 쓸더니 물었다.


“못 볼 걸 본 표정이군.”

“예정대로라면, 내 손에 들어올 그림이 아니거든요.”

이번 생에는 이게 제 손에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그림이구나.’

죽기 하루 전날에 그렸던 그림이었다. 기억도 하기 싫었다.


“모두 잊고 지냈어요. 거의 다 잊었다고 여겼는데, 지금 떠올리면 마냥 다 잊은 건 또 아니었어요.”

샤를로프는 상자를 덮었다. 그녀가 상자 덮개를 어루만지는데, 가운을 입은 그가 맞은편에 앉았다.


“아버지께서 아프시다네요.”

“튜텨 후작 말인가?”

“그간 너무 조용한 게 이상하던 참이었는데……. 그 아이가 자세한 이야기를 안 해주었지만, 내게 고할 수준이면 무언가 있단 뜻이겠죠.”

밤이면 식은땀을 흘리며 앓고, 혼자 넋 놓고 저택을 배회하고, 어딘가 홀린 사람 같았다라.


‘이 모습을 전생에도 봤던가?’

그런 기억은 없다. 어쩌면 전생과는 다른 선택을 하며, 이생의 흐름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 * *

대신전 복도를 어린 신관이 뛰어갔다.


“하넬리 대신관님 여기 안 계십니까?”

“그분을 왜 여기서 찾느냐?”

“어디도 안 보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찾으시는데 어떡합니까?”

“홀로 또 어딜 가셨나……. 어디서 술이라도 잡수시는가?”

성당 밖에서는 종소리가 울렸다. 신년제가 끝난 시각에 맞춰 하루가 저물었다. 날도 어둑했고, 신년제 방문객들도 모두 떠났을 시각이었다.

그 시각,

고요한 발길이 잔디를 밟았다.


“술맛도 다 떨어졌고.”

평신관의 예감은 적중했다.


“이놈들이 귀찮게 붕어들처럼 따라다녀서는 줄줄이 엮어서 밖으로 내쫓지도 못하고 번거롭구나.”

교황이 듣는다면 목덜미를 짚고 기함할 이야기였다.


“술도 다 떨어져서 뜯어낼 신도들도 없고.”

술병을 들고 흔들던 하넬리는 팔을 떨궜다.

그는 홀로 기도실을 찾았다. 신도들이 모두 떠난 기도실은 촛불로만 길을 밝혀 놓았다.

흰 신관복이 걸음걸음마다 사부작댔다.

신관복에는 고대협약의 상징을 금실로 수놓았고,

기도실 촛불이 일렁일 때면 금실 자수가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드문드문 비쳤다.


“또또! 술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네가 대신관이라는 자각은 있느냐? 다른 날도 아니고 신년제다. 내가 기도실에 얼굴 비추라! 누누이 이야기했거늘!”

“이런. 교황께서 이러실 줄 알고, 제가 곧 찾아뵐 예정이었습니다. 고혈압 옵니다. 몸조심하셔야지요. 이 제자가 성하의 몸 건강을 이리도 살핍니다.”

교황은 신음을 꾹 눌렀다.


“……너, 뭘 본 게냐?”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하넬리는 홀로 속삭였다.


“또 홀로 촛불처럼 타들어 가는 이를 봤습니다. 제 몸에 불을 질러 스스로 또 빛을 발하고, 남들을 구제하고 본인은 구제하지 못하는 불운한 영혼을 봤을 뿐입니다.”

교황은 침음을 삼키며 앓았다.


“너희는 또 홀로 외로운 길을 걷겠구나.”

쫓겨났던 이들이 협약의 금기를 긁고,

삶과 생(生)을 탐하며 죽지 않았던 이들이 이 땅을 밟기 시작했다.

* * *

땅의 기운이 목덜미를 훑는다. 목을 옥죄고 서서히 졸랐다.

숨이 답답하게 막혀왔다.

샤를로프는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이불을 쥐어뜯던 그녀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아…….”

시야가 뒤집혔다. 이불에 파묻혀 융단 위를 나뒹굴던 몸이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얌전히 깨도 좋을걸.

허리가 욱신거렸다. 끙끙대며 머리를 쓸어넘기는데, 새벽녘이 밝았다.

밖에서 침실 문을 두들겼다.


“폐하 괜찮습니까?”

이튿날 새벽녘이었다.

눈이 저절로 떠졌다. 고개를 들자 사위가 고요했다.

침구를 더듬거리던 샤를로프는 옆자리에 내려앉은 한기를 깨달았다.


“어딜 나간…….”

차가운 한기가 내려앉았다.

소파에 걸쳐둔 숄을 어깨에 두르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흰 털 뭉치가 발아래서 제 머리를 비볐다. 앞발로 제 졸린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따라붙었다.

그녀가 어둑한 복도를 걷는데, 저편에서 촛불이 일렁거렸다.


“어디 가십니까?”

카타리나가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기척이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너무 조용해서……. 폐하께서는?”

“연무장에 나가 계십니다.”

“이 이른 시간부터 말이냐?”

샤를로프는 걸음을 돌렸다. 느린 걸음이 이어졌다.

허리는 꼿꼿하게 폈지만, 곁에서 걷는 이는 없다.


“어디로 가십니까?”

“바깥에.”

“아직은 날이 춥습니다. 그대로 나가실 겁니까?”

두꺼운 외투를 더 둘렀다.

마른 흙바닥을 밟자, 자잘자잘한 자갈이 부스러졌다.

새벽녘이라서 아직 어두운 연무장.

저편에서 거친 마찰음이 들렸다.

걸음이 점점 연무장에 가까워졌다.

검기가 사방으로 뻗치고, 날것 그대로의 살기가 몰아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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