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제는 가물가물해.
(41/51)
41. 이제는 가물가물해.
(41/51)
#41. 이제는 가물가물해.
2023.07.21.
신년제 날이 밝았다.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중앙연회장이 오 년 만에 열렸고, 낡은 촛대와 테이블을 모두 바꿨다.
황제궁도 활기를 띠었다.
“사절단도 모두 중앙연회장에 자리했습니다.”
“연회장 내부는 어때?”
“잠잠합니다. 지난 마물 사태도 적당히 묻혔습니다.”
시녀들이 연회복을 입혀주며 이야기했다.
지난 소란을 고스란히 묻어버린 게 황실이었다. 샤를로프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이야기했다.
“타국 사절단을 초빙해놓고, 작은 소란에 휘둘려선 안 된다.”
“네. 폐하.”
“채비는?”
“끝났습니다. 이만 연회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붉은 머리칼이 유난히 짙었다. 꼿꼿한 뒷모습에 시선이 닿았다. 긴 머리를 엮어서 올렸는데, 목선이 희게 드러났다. 시녀들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환수는 어디 갔습니까?”
“글쎄. 또 혼자 있는 모양이야. 아직 새끼라고 낯을 가리나……. 사람 많은 자리를 꺼리더구나.”
그 아이는 사람들 곁을 싫어하던 것 같다.
샤를로프가 혼자 있을 때면 슬금슬금 다가와 맴돌고, 사람이 많을 때면 또 혼자서 훌쩍 사라지는 편이었다.
‘또 어디선가 혼자 있나?’
샤를로프는 상념을 저편으로 밀어놓았다.
붉은 연회복은 샤를 본인을 닮았다. 애당초 이 붉은 색감은 황후를 뜻했다. 핏빛으로 물든 노을처럼 더없이 짙고 화려한 색감이었다.
샤를로프는 복도를 천천히 지났다. 연회장으로 닿는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이윽고 걸음은 멈추었고, 황제궁 집무실에서 내려오던 벤하민이 물었다.
“왜 그러고 섰어?”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 중이었어요.”
벤하민은 목을 더듬거렸다. 제국식 연회복을 입은 그는 평소보다 딱딱한 분위기를 풍겼다. 목이 답답한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목의 이음새를 만지작댔다. 경직된 분위기에 시종들도 마른 침을 삼켰다.
“이만 연회장으로 가지.”
황제 부부가 나란히 연회장을 찾았다. 입구 시종이 황제의 입장을 알리며,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묵직한 연회궁 문이 열렸다. 조명에 흐려진 시야가 천천히 밝아지고, 황제 부부가 걸음을 디뎠다.
타국의 사절단도 모두 대화를 멈추었다.
“제국에 치유의 광명이 닿기를.”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끊겼던 음악이 다시 흘렀다.
황제 부부가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궁중음악단이 경쾌한 음악을 이어가고, 연회장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점점 더 아득하게.
모든 게 깊숙하게 가라앉는다.
중앙귀족과 사절단이 연회장에 녹아들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짙게 깔렸다.
“신년제도 오 년만이로군요. 폐하께서 즉위하고 처음…….”
“찻잔 하나부터 접시 하나까지 섬세한 손길이 닿았습니다. 꼼꼼하게 연회장을 채운 게, 그 섬세함이 느껴지는군요.”
온갖 잡음이 뒤엉켰다.
샤를로프는 홀로 까마득하게 가라앉았다.
점점 더 아래로.
물속에서 허우적대듯 호흡이 답답해져 온다.
샤를로프는 감정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귀가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아득함에 서서히 젖어 들던 때였다.
“샤를.”
샤를로프는 그제야 숨을 들이쉬었다.
벤하민이 옆 사람과 나누던 대화를 멈추었다. 그가 눈짓으로 ‘괜찮나?’ 하고 묻는데, 그의 곁으로 보좌진 일행이 가득했다.
“아, 불렀어요?”
“넋이 나갔군. 보좌진과 대화가 길어질 듯한데, 혼자 있어도 되겠나?”
“이런 자리에서도 과보호인가요?”
샤를로프는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다녀와요.”
“그럼 다녀오지.”
벤하민이 보좌관을 이끌고 떠났다.
아스터 외숙부와 레안드로 외조부께서는 다른 일행들과 대화 중이고, 중앙귀족과 사절단도 저들끼리 대화 중이었다.
‘이만하면 됐나?’
이쯤이면 자리는 지킬 만큼 지켰다.
“폐하, 폐하!”
“……불렀나?”
시종이 쩔쩔매며 이야기했다.
“부쩍 넋을 놓는 일이 잦아지셨습니다.”
“사람이 많은 자리는 어쩐지 피곤한지라.”
“송구합니다. 사절단까지 초빙해놓은 자리라 딱딱하지요.”
샤를로프는 손을 들어 시종의 다음 말을 막았다.
“위스키 한 잔 주렴.”
“괜찮으시겠습니까?”
“답답해서 목이라도 축여야겠어.”
유리잔에 호박빛의 술이 담겼다. 그걸로 목을 축이는데, 긴장감으로 굳었던 근육이 서서히 풀어졌다.
이명으로 먹먹해졌던 귀도 또렷해졌다.
샤를로프는 술잔을 손아귀에 올렸다. 손끝으로 유리를 톡톡 두들기는데, 기척이 다가왔다.
“제국은 올 때마다 점점 더 번성합니다. 황성을 지나오던 길에 본 제국민들 만면에 여유가 가득하더군요.”
타란국의 타탄테였다. 이국적인 차림의 사절단이 뒤따랐다.
“작은 타란이로군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음, 그 아이는……. 곁에 안 보이는군요.”
샤를로프는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환수라면 낯을 가려서 여기 없어요. 사람들 곁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더군요.”
“본래 환수란 그렇습니다. 오만하고 거친 놈들이지요. 또, 새끼 환수일수록 각인대상의 내면에 영향을 받는지라, 주인의 성향을 따라가는 경우도 많고요.”
타탄테는 흐음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과거 환수들이 멸종되기 전에는 사람들 틈에서 섞여 살았다지만, 이것도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환수가 멸종한 건 고대 때다.
옛적에 고대의 신들이 흑주술과 마물을 땅 아래로 내려보내고, 제국 땅에 성역을 공표했다. 이 땅 위에서는 삿된 것들이 영역을 탐해선 안 된다고.
그 무렵, 환수도 같이 멸종됐다.
지금 이 땅에 남은 환수는 또한 몇 안 됐다.
고대 건국 일화는 잊혔고, 고대협약 또한 옛적 이야기로 치부됐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기억하는 이들도 없다.
“이번 친교로 뜻깊은 인연을 맺은 듯합니다. 그 아이가 폐하께 뜻깊은 인연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타탄테가 사절단을 이끌고 떠났다.
신년제도 끝자락을 향해 달렸다.
“잠깐 혼자 있겠다.”
“……혼자요?”
“뒤따를 것 없어.”
샤를로프는 연회장을 고요히 빠져나왔다.
* * *
“왜 홀로 나와 계십니까?”
샤를로프가 복도 한쪽에 혼자 서 있는데, 카타리나가 근위대 제복을 입고 그림자 아래서 걸어 나왔다.
“이만하면 자리는 잘 지킨 듯해서. 잠깐 자리를 피해줘.”
“폐하…….”
“적당히 거리만 둬. 사절단을 초빙해놓고, 호위를 물릴 만큼 내 안위에 둔감하지는 않아.”
카타리나가 다시 그림자 아래로 숨었다. 지척이 고요해졌다.
“혼자가 되길 기다리던 거 같은데 나오렴.”
샤를로프는 복도 한쪽에 서서 속삭였다.
“호, 혹시 제가 방해됐나요?”
저편 복도에서 제 의붓동생이 고개를 내밀었다.
“네가 내 곁을 맴돈들 네게 해줄 건 없다는데도.”
“아, 아니에요! 폐하! 저는 폐하께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럼 길 잃은 강아지처럼 내 곁을 맴돈 이유가 따로 있겠구나.”
헨리에타가 눈을 끔뻑거렸다.
“대놓고 봐달라하는데 모르는 게 더 힘들지 않겠니?”
“죄, 죄송해요. 귀찮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네 아버지와 같이 왔니?”
“아버지는 아파서 오늘 참석하지 못하셨어요. 대신, 어머니와 같이 왔어요.”
“그럼 돌아가렴. 네 어머니가 찾겠구나.”
샤를로프가 먼저 등을 돌렸다. 등 뒤의 기척은 하찮고 작았다. 이만 떠나려는데 발목이 무거웠다.
“……그런데 아프다고.”
“네? 네!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요.”
“그가 이 시기에 특별히 아플 일이 없는데 어째서?”
“이유를 몰라요. 주치의도 이유를 모른댔어요. 병증은 밤이면 특히나 심해져요. 낮에는 그래도 맨정신일 때가 많은데, 밤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앓고, 어딘가 넋 놓고 집 안을 돌아다니시는데, 하인들도 무서워해요.”
“언제부터 그러니?”
“며칠 됐어요. 집안이 살얼음판이에요.”
샤를로프는 제 드레스 자락을 붙든 손길을 느꼈다. 헨리에타가 작은 손으로 붉은 예복을 움켜쥐었다.
이 아이는 이게 황궁 예법에 어긋남을 안다. 무례임도 안다.
‘다만, 저 아이의 마음이 그만큼 여유롭지 못했을 뿐.’
샤를로프는 아이의 손을 겹쳐 잡았다.
“아버지가 이상해요. 어디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저는 어쩌면 좋을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헨리.”
헨리에타는 제 애칭에 흠칫했다. 제 어머니가 어린 시절 불러주던 애칭이었다.
“너는 어쩌고 싶니?”
“저도 모르겠어요.”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그거도 모르겠어요.”
“그럼 나를 왜 찾아왔니?”
헨리에타가 두 눈을 붉게 물들였다.
“아, 아버지를 용서해주세요. 다 제 잘못이니까 용서해주세요. 그럼, 아버지도 달라질 거예요.”
“아니.”
“…….”
“내가 이미 잘라낸 인연이다. 그럼 그걸로 끝이야.”
샤를로프는 마지막 조언을 건넸다.
“네 아버지는 이미 교양도 잊고 체계도 잊었다. 품격을 잃고 기품도 잃었다. 황가의 예우를 잊으면서, 위계질서 또한 잊었다. 해답은 거기 없어.”
“……무정하십니다.”
“용서를 논하기엔 늦었어. 내가 어머니 병상을 지킨 게 몇 년이라 여기니?”
어머니 병상을 지킨 게 십여 년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망가진 어머니의 눈을 직접 감겨드린 게 샤를로프였다.
“나도 생전 어머니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아. 옛날 그 모습이 가물가물해.”
“죄, 죄송해요.”
“네가 사과하지 않아도 돼. 이젠 다 지난 일이고, 모두 옛날이야기일 뿐이야.”
네게 죄는 없다. 어른들의 죄일 뿐.
그 묘지를 더럽힌 건 어른들이었고, 너는 그들 피를 이어받았을 뿐이잖아.
“그냥 나를 미워하렴. 그게 차라리 네 마음은 더 편할 거다. 나 때문에 네 아버지께 미움받지 마. 나는 네게 해줄 게 없어. 내가 해줄 이야기는 이것뿐이라 미안하구나.”
이 아이를 탓하진 못한다. 그 사실이 답답하게 옥죄어온다.
“폐하. 괜찮으셔요?”
“너를 걱정 시킬 수준은 아니야.”
“그, 그래도…….”
“카타리나, 이 아이를 보호자에게 돌려보내고 오너라.”
카타리나가 그제야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저, 저 혼자서 돌아갈게요.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오, 오늘 일은 잊어주세요.”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게요. 폐하께 이런 이야기를 해선 안 됐는데, 제가 마음이 급해 결례를 범했어요.”
울먹거리는 녀석의 걸음이 위태롭다.
“따라 다녀와.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그럼 잠깐만 여기서 계십시오.”
헨리에타가 서서히 멀어졌다. 그의 기척이 떠났다.
복도 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 밤하늘이 어둑하게 잠겼다.
“너는 어디서 혼자 있다가 오는 길이니?”
발아래서 흰 털 뭉치가 머리를 비볐다.
작은 앞발로 턱을 긁는데, ‘끼웅’ 하고 목을 기울이는 게 순진무구했다.
밖은 한없이 적막하고 고요했다. 모든 게 단절된 듯 홀로 뚝 떨어져나온 기분이었다.
그래도, 밤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지금 괜찮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