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그런 네가 밟혀. (40/51)


#40. 그런 네가 밟혀.
2023.07.18.



“너는 네게 각박해. 무기력하게 점점 가라앉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면.”

벤하민이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네가 밟혀, 샤를.”

벤하민이 하는 이야기는 모호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샤를로프는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벤하민은 자리를 비웠다.

그 뒤로 황궁의가 다녀갔다.

약초를 달인 물을 두 접시나 마셨다. 쓴 풀잎을 갈아 마신 것보다도 독했다.


“좋은 약재를 달였습니다. 그대로 쭉 마십시오.”

샤를로프는 쓴맛에 눈매를 찌푸렸다.


“이건 늘 느끼지만 뭐로 만드는가 싶어…….”

“몸의 기력을 보강해주는 약재입니다.”

“내가 감기 때면 먹던 약재라는 건 알겠지만, 이건 약재가 너무 독해.”

“몸에 좋은 건 본래 쓴 법입니다.”

아론이 약 그릇을 받아들고, 샤를로프에게 알사탕을 건넸다.


“마음이 쓰이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샤를로프가 알사탕을 입에 물고 가만히 있는데, 아론이 물었다.


“누가 내게 각박하다고 이야기하는데, 내 어디가 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서.”

“폐하께서는 잘 모르시군요. 저는 왠지 알 것 같은데요.”

아론은 끌끌대며 약 그릇을 챙겼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을 되돌아봐주십시오.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알게 될 겁니다.”

침실은 고요했다. 따뜻한 난롯불을 틀어놓았다.

긴 머리칼을 빗어 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폐부 깊숙하게 온기가 스몄다.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샤를로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억나는 건 없구나.”

샤를로프는 팔을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뻐근한 목 근육이 느슨하게 풀렸다.

그녀가 목덜미를 더듬거리며 소파에 기대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폐하, 윈저가에서 외조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샤를로프는 숄을 덮어쓰고 들어오라 이야기했다.


“식사는 하셨어요?”

“그래. 시간이 몇 시인데 너는 괜찮으냐?”

“네. 걱정하실 일은 없었어요.”

레안드로는 약초 향이 밴 침실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다친 곳은 없는…….”

“폐하께서 이미 이야기했겠지만, 어디 다친 건 아니에요. 비를 조금 맞아서 혼절한 것 같은데, 괜히 할아버지께 걱정만 안겨드렸네요.”

“아아, 괜한 걱정이라니 그게 무슨……. 아아아, 무슨 말이냐?”

레안드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샤를로프를 감쌌다.


“오전에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번에도 비를 맞고 혼절하다니, 왜 그런 거냐? 사냥터에서도 그렇게 혼절해버리더니, 이번에도 그렇게 혼절해서 걱정시켜버리면 어떡하느냐?”

“할아버지.”

“아니다. 다치지 않았으니 됐다. 그거면 됐어.”

그 뒤로도 레안드로와 이런저런 안부인사를 나눴다.

레안드로는 부분부분 이야기를 전해 듣고 샤를로프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네 엄마를 닮았으면, 벌레는 질색할 건데 괜찮느냐?”

“카타리나가 잘 대처해줘서 괜찮았어요.”

“네 곁으로 보낸 게 다행이구나.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으니, 우리도 마음을 한결 놓겠어.”

“아스터 외삼촌은요?”

“네 외삼촌도 신년제 일로 부쩍 바빠졌다.”

그 후, 샤를로프는 레안드로를 배웅해줬다.

그 뒤로는 침실에서 거의 지냈다.

샤를로프는 체스판을 보며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그녀는 퀸을 움직여놓고 고개를 젖혔다.


‘내가 뭘 잊었더라.’

무언가 서서히 흩어졌다.


 

* * *



“같이 씻을까요?”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며칠 밤을 지새운 것 같은 벤하민의 낯빛 때문이었다.


“황궁의께서도 따뜻한 물에서 몸을 담그면, 근육이 이완되면서 긴장이 풀린다더라고요.”

“……황궁 예법에 어긋난다고 거절했잖아.”

“옛 법도는 낡았다고 폐하께서 말씀해주셨잖아요.”

벤하민에게서는 궐련 특유의 씁쓸한 향이 풍겼다.


‘신경이 예민해지면 시가를 피우는구나.’

궐련도 나름 독했다.

곁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가 단추를 끌어내렸다.

말은 없다.

그의 눈이 시선을 맞춰왔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의 흑안에 음험함이 은근히 스몄다.


“그럼 아이들을 모두 물리겠습니다.”

시녀장이 시녀들을 이끌고 나갔다.


“이리로 와.”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내려다봤다.


“너는 사람을 돌게 만들어.”

아프다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건 몹쓸 짓이고.

욕조에서 뿌연 김이 올랐다.

샤를로프는 흰 네글리제를 입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욕조 물이 넘쳤다. 그녀는 아래를 흘끔 내려다보고 허리를 폈다.

비누 거품이 몽글몽글 올랐다. 그녀가 등을 기대는데, 허리에 팔이 감겼다.


“허리가 본래 이만큼 얇았던가?”

“음. 똑같은데요.”

“더 빠졌어.”

“물속이라서 다르게 느낀 걸지도 몰라요.”

샤를로프는 그에게 몸을 기대고 숨을 내뱉었다.


“팔도 얇아.”

“그랬던가요?”

그의 팔이 스쳤다.

샤를로프는 검붉은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내렸다. 물 위로 머리칼이 둥둥 떴다.


“궐련은 왜 피웠어요?”

“아직도 향이 남았나?”

“아니요. 지금은 향유를…….”

“다 지워졌을 줄 알았어.”

“아주 옅어서 지워졌어요.”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머리를 감쌌다. 긴 머리칼이 구불구불한 엉겅퀴처럼 그의 손아귀에 꼬였다.


“예민해지면 주변인들이 피곤해지는지라.”

벤하민이 궐련을 피울 적에는 샤를로프와 거리를 두는 건 예전에도 봐서 안다.


“내게서 궐련 향이 날 때는 가까이 오지 마. 샤를.”

샤를로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후로 무슨 대화를 나눴더라.

조곤조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외조부가 일찍이 다녀갔는데, 괜한 걱정을 시켜드려 죄송스러웠고.

아론이 쓴 약을 지어주었는데, 어릴 적에 먹던 기억 때문인지 너무 곤욕스럽지는 않았다고.

시답지 않은 그런 이야기들이 점점 길어지고.


“…….”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을 느끼며, 샤를로프는 잠들었다.

* * *



‘네 엄마가, 그래, 아……. 그랬지. 무릎을 꿇고 빌었어. 너를 키우게 해달라고. 꼿꼿한 여편네가 두 손 비벼 비는데, 처음으로 충만감이 들더군.’


‘왜, 왜…….’


‘그 꼴 한 번 더 보려고, 너를 잡아두었는데, 이제는 재미도 없더구나.’

 
이건 전생의 기억 저 너머에 자리한 과거의 파편이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 무덤을 짓밟던 아버지가 하던 말이었고,

술기운에 흠뻑 젖은 그는 어딘가 미쳐 있었다.


‘지금부터는 클로에가 네 엄마이다. 죽은 여자는 잊어라. 예전처럼 숨죽여 지내라. 그 숨소리 밖으로 꺼내지 말고.’


‘그 여자가 왜……!’

 
엄마. 왜 나만 이런 곳에 두고 떠났어. 왜 나만.


‘건방지게 무슨 말버릇이냐! 이제부터는 네가 저 여인을 어머니로 모셔야 한다. 저 아이에게서 영정사진도 빼앗아라! 죽은 친모 그림자에서 헤어나오지도 못해서 이 사달을 내놔! 그년은 이런 애물단지를 왜 남겨둬서는…….’


‘그만둬요. 이젠, 그만, 그만둬요.’


‘저 여자 묘지도 옮겨두어라. 이 아이 눈 밖으로 치워!’

 
지하에서 발목을 잡아끌듯 몸이 푹 꺼졌다.

가문 사람들이 어머니의 묘지를 파서 옮겼다. 그 시절 샤를로프는 무력했고, 속수무책으로 모두 빼앗겼다.

그 시절,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어머니가 죽고 샤를로프는 애물단지였으니까. 그런데 샤를로프는 가문에서 나와서 갈 곳이 없었다. 결혼매물로 팔리던 순간까지도.

갈 곳이 없다.

여기서까지 버림받으면 모든 게 끝나리라 여겼다.

* * *

벤하민은 팔을 뻗었다.

여린 체구가 팔에 닿았다. 그는 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체향이 물씬 풍겨왔다. 따끈따끈한 식빵 같았다. 한 입 베어 물면 풍만함이 몸에 스며들 것 같았다.

벤하민은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의 허리를 다독였다.

웅크린 몸이 서서히 풀어졌다. 긴장감으로 뭉쳤던 근육도 나른해졌다.


“으응.”

긴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목덜미가 드러났다.

벤하민은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나른하게 풀린 숨이 살갗에 닿고 흩어졌다.

침의가 헐렁하게 흘러내렸다. 그는 그걸 끌어올려 다시 추슬러주고 이불을 덮었다.


“샤를.”

벤하민이 작게 속삭였다.


“이만 일어나.”

“더워요…….”

“난롯불이 높았나 봐.”

고개를 파묻으면 고른 심박이 느껴졌다.

그는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짧은 머리칼이 사부작댔다.

살갗에 닿고 흩어지는 숨이 간지러웠다. 그가 약하게 살갗을 깨물었다.


“으응.”

샤를로프는 약하게 앓았다.

아침이라고 모든 감각이 둔해졌는데, 그가 그사이를 파고들었다.


“신년제는 예정대로 진행될 예정이야. 몸에 무리가 간다면 자리만 잠깐 비추고 피해도 돼.”

“개운해요.”

“지금은 좀 괜찮은 것 같다.”

벤하민은 손등으로 샤를로프의 뺨을 짚었다.


“시녀장에게 일러둘 테니 그만 자고, 이 이상 자면 나중에 밤에 뒤척일 거야.”

흰 이불이 흘러내리고, 샤를로프가 고개를 젖혔다.

흰 뺨이 티 없이 맑다.

긴 머리칼이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렸다.

감기 기운으로 올랐던 미열도 지금은 괜찮았다.


“시녀장이 오거든 가볍게 치장만 끝내고 밖으로 나와. 햇볕이 좋아. 밖에서 바람 쐬기 좋은 날 같으니까 조금만 걷자.”

그가 침실에서 나오자, 시종들이 겉옷을 건넸다.

벤하민은 겉옷에 팔을 꾀고 시녀장에게 눈짓했다.

시녀장은 기민하게 살피고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간밤에 별일 없었나?”

“책사께서 집무실에 찾아와 계십니다.”

시종들이 목을 꾸벅 숙였다. 벤하민은 이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복도의 불이 일렁거렸다.

촛대는 그을음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인들이 허투루 관리하는 게 아니라는 듯, 곳곳에 섬세한 손길이 묻어났다.


“안으로 드십시오. 보좌진 모두 와 있습니다.”

황제궁 집무실 문이 열렸다.

새벽녘 먼저 나왔던 보좌관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하민은 앉으라며 팔을 내젓고, 보좌관 석을 지났다.

새벽녘 찬 기운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벤하민은 재킷을 벗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로스켈라는 벤하민을 따라들어갔다.


“황후 폐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몸은 거의 회복됐다.”

“마물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잖습니까? 우리 같은 기사들이야 괜찮더라도, 황후께서는 마물을 처음 겪었으니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벤하민은 손끝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거슬리는군.”

“무엇이 거슬립니까?”

벤하민은 깃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손짓이 멎었다.


“너무 초연하지 않나?”

“황후 폐하 말씀이시군요. 황후 폐하라면 원래도 초연한 성격이었잖습니까?”

“마물을 처음 겪었는데도, 본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굴어. 감정을 모조리 깎아내기라도 한 듯 덤덤하게 구는데…….”

눈에 계속 밟힌다. 벤하민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너는 늘 그랬다.

시선 끝에 닿는 너는 먼 허공을 바라보며, 감정을 하나하나 깎아낸다. 지금도 그랬다.


“저 초연함은 어디서 온단 말이냐?”

그 물음은 좀처럼 해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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