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너는 네게 무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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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너는 네게 무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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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너는 네게 무심해.
2023.07.14.
땅 밑이 삐거덕거렸다. 까마득한 어둠이 자욱하게 깔렸다.
이건 본능이었다. 무언가 다가온다.
그 기척을 느낀 건 샤를로프 혼자만이 아니었다.
“폐하! 뒤로 오십시오. 지금부터 호위하겠습니다!”
카타리나와 호위들이 칼을 뽑았다. 그 울림은 사절단 궁궐에서 시작됐다.
“뭐가 옵니다. 몸을 낮추십시오, 폐하!”
빗물이 굵직하게 쏟아졌다. 검붉은 머리는 빗물을 머금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샤를로프는 어둠 속에 시선을 뒀다.
저 멀리서 어둠이 꾸물거렸다.
빗소리에 묻힌 소음들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바글대며 모여든 건 마물 떼거지였다.
“곤충류 마물입니다!”
어둠 사이로 땅거미가 기어 나왔다.
북쪽에서부터 그 울림이 점점 커지더니, 외눈 땅거미가 지나온 길에는 흰 거미줄이 깔렸다.
빗물에 거미줄이 녹으며 아지랑이처럼 흰 독기가 올랐다.
“폐하. 몸을 피하십시오. 누가 폐하를 궁 안으로 모시거라!”
* * *
톡톡.
밖에서는 빗줄기가 점점 거칠어졌다.
“쯧.”
벤하민은 깃펜을 내려놓았다.
“일이 손에 안 잡힙니까?”
벤하민은 협탁에서 시가를 꺼냈다. 그가 나른하게 눈을 감는데, 오감이 점점 흐려졌다.
이 꼴로는 집중하기가 어렵겠다.
벤하민은 됐다며 팔을 내젓고 서류를 덮었다.
“오늘은 이쯤 해놓고 끝내겠습니까?”
“저녁때가 지났나?”
“네. 가볍게 식사할 거리를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됐어. 황후는?”
“지금은 자리를 비웠습니다. 바깥에 계시다는데……. 저런, 사람을 보내놓겠습니다.”
벤하민은 눈매를 좁혔다. 빗소리 때문인지 다른 소음이 묻혔다.
“……폐하.”
“나도 느꼈다.”
곧, 그가 악귀처럼 낯을 구겼다.
“어떤 놈이 또 내 궐 안에서 미쳐 날뛰는지.”
비 때문에 늦게서야 느꼈다. 그의 눈이 매섭게 좁아졌다.
“놈들 낯짝을 보러 다녀와야겠구나.”
“북쪽이면 사절단이 있는 곳입니다.”
흑마력이 피어올랐다. 감히 그것들이 기어들어와서는 안 될 곳에 기어들어왔다.
벤하민은 창턱을 짚었다. 그 시야가 어느 한 곳에 닿았다.
“저 버러지들이 어디를…….”
벤하민은 그 길로 뛰어내렸다.
곤충 마물떼가 샤를로프와 일행을 둘러쌌다.
“하급이더라도 마물입니다. 놈들 거미줄에 안 닿도록 조심하십시오.”
샤를로프는 맥없이 허물어졌다. 그녀는 애꿎은 흙바닥만 긁어댔다.
“거미인가?”
“거미와 애벌레의 혼종입니다.”
샤를로프는 넋 놓고 땅거미 마물을 내려다봤다.
“곤충류는 모두 하급 마물입니다. 빗물은 놈들에게도 쥐약이어서, 독기도 중화되겠군요.”
“북쪽 궁궐에서 왜…….”
“해결하는 대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샤를로프는 눈매를 찌푸렸다.
‘끼웅’
새끼 늑대가 샤를로프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깨물었어?”
샤를로프가 흰 털을 쓰다듬는데, 늑대가 작은 주둥이로 손끝을 핥았다.
“아가, 겁난다는 건 알겠지만, 너보다도 내가 더 유약해.”
진액이 뚝뚝 흘렀다.
샤를로프는 옷소매에서 은장도를 꺼내 칼을 뽑았다.
손잡이에 자수를 매듭지어 묶어두었던 장식품이었는데.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크기였다.
“아아…….”
솜털이 송글송글 난 거미가 다리를 삐거덕댔다.
까득. 까드득.
땅 밑에서 무언가가 긁는다.
“샤를. 뒤로 와.”
머리맡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이런. 못 움직이겠어?”
“당신…….”
“왜 자꾸만 삿된 것이 땅 위를 기어올라오는지. 고대협약이 체결되고, 땅 밑으로 쫓겨난 것들이 생(生)을 탐하는구나.”
그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겉옷을 벗은 벤하민이 샤를로프에게 덮어주었다.
“덮어, 샤를.”
샤를로프가 시야를 가린 겉옷을 끌어내리는데, 벤하민이 손을 겹쳤다.
“비에 다 젖어서는.”
“아…….”
“내가 이 모습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샤를로프는 자리에 주저앉은 그대로 그를 올려다봤다.
빗물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샤를로프는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 * *
땅 밑.
끝자락. 모두가 잠든 곳.
경계구역의 시작이자 끝이며, 고대협약의 시작이자 끝자락인 그곳.
거기에서 뼈마디가 다각다각하며 다가왔다.
그들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고, 뼈로 된 입이 딱딱 하며 맞물렸다.
‘누구냐.’
‘누구.’
‘누구야?’
‘누가 여기로.’
‘내려왔느냐?’
시야가 가로막혔다.
누군가 샤를로프를 숨겼다.
그녀는 무언가 단절되듯 저를 끄집어내는 손길을 느꼈다.
* * *
“벌레입니다. 벌레. 아악! 나는 거미가 가장 싫어요. 혐오스러워요. 끔찍해. 다리에 솜털이 돋았어요. 저 솜털을 모두 태워버릴 테다. 아악!”
타탄테는 제 시종을 한심하게 내려다봤다.
“아악! 애벌레가……. 아악!”
“조금만 조용히 해주면 안 되나?”
마물 사체를 짓밟던 시종이 질색하며 외쳤다.
“아악! 이건 사막의 땅거미잖습니까! 남대륙 저 자식들은 뭘 끌고 온 겁니까!”
“이번 사절단에는 잡음이 나오면 안 된다더니, 네가 그 잡음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으냐? 너는 숲의 일족이라는 게 벌레를 그렇게 싫어해서야, 쯧쯧, 어디에 써먹을지 모르겠구나. 일족의 체면이 말이 아니야.”
“아아아악!”
“너는 하급 마물 하나 잡는데 검기를 그렇게 써대냐?”
타탄테는 땅거미의 머리를 날리고, 시종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땅거미 하나 잡는다고 사절단 거처 절반을 날려 먹겠다.
“벌레는 귀찮다만.”
타탄테가 나서려던 때였다. 황궁 기사단이 내부를 휩쓸었다. 기사단장이 검기로 마물을 태워내고 다가왔다.
“궁궐 내부에서 소동이 있었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다.”
“사절단 내부에서 다툼이 좀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후 내부보안에 더 신경 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파손된 거처 말고 다른 거처를 마련해주겠다며 기사단은 떠났고, 사절단 거처도 고요해졌다.
“이만한 일이 벌어지고도, 황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구나.”
타탄테는 뒷짐을 지고 북쪽 궁궐 너머를 내다봤다.
“땅바닥이 죄다 엎어진 마당에 조용하다니요?”
“그게 아니다. 그런 조용함이 아니라 다른 조용함 말이다.”
.
.
벤하민은 눈매를 좁혔다.
“누구 소행이라고?”
정보관 정보사가 고했다.
“사절단 시종 중 하나였습니다.”
남대륙에서 온 시종이었다.
남대륙은 몇 년간 내분을 이어왔다. 비록 그 내분은 끝났지만, 반대세력이 분란을 꾀했다.
“남대륙 마물이었던 것도 그래서였군.”
“사절단에서 죄송하다며 사과해왔습니다.”
“확인됐나?”
“네. 세력 간 다툼 같습니다. 그 증거로 남대륙 거처에서 마물이 시작됐습니다.”
벤하민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마물은 뭐로 불러냈는지 확인됐나?”
“하급 독기를 이용했습니다. 야시장에서 본 하급품과 동일합니다.”
벤하민은 궁정기사단이 수습한 하급품을 손아귀를 깨트렸다.
“누군지 계속 긁어대는구나.”
“사절단에는 뭐라고 전할까요?”
“됐다. 나중에. 입단속만 해둬.”
누가 땅 위로 기어올라오면 안 될 것들을 끄집어올린다.
“이것들이 금기를 피해서 살살 긁어대는데, 죽여달라 읍소하나?”
“폐하, 독기를 맨손으로…….”
“이건 진짜 하급품이다. 하급 독기는 살갗이나 조금 따끔할 수준이고, 저런 벌레 곤충류를 불러내는 게 고작이겠지.”
놈들 머릿속이 읽힌다.
“신년제를 앞두고 괜한 구설수에 오르기 좋겠어.”
“독기는 자체적으로 정화됐습니다. 모두 하급 마물이었고, 빗물이 중화해준 덕분에 독기도 모두 씻겨 내려갔습니다.”
“이 일은 적당히 묻어두도록. 궁정기사단에게 일러 내부경비를 더 신경 쓰라 지시해둬.”
황궁에서 마물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구설수가 된다.
신년제라는 행사를 앞두고 괜한 구설수를 만들어서 좋을 건 없다.
“황후 폐하께서는…….”
“조용히 해라.”
정보관 정보사들이 하나둘 물러났다.
그 후.
아직 샤를로프는 의식을 회복지 못했다.
-달칵.
침실 문이 열렸다.
침실 안에서는 약초 향이 은은히 풍겼다.
“좀처럼 깨질 못하는구나.”
잠든 샤를로프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숨소리만 드문드문 들렸다.
고요히 잠든 표정이 창백했다.
본래도 핏기가 없어 하얀 낯빛이었다.
“감기 기운이 있군요. 비 맞은 몸인데, 거기에 크게 놀라서 그렇습니다. 며칠 푹 쉬면 괜찮습니다.”
감기 기운이 맞는지 미열이 있었다.
샤를로프는 고른 숨을 뱉었다. 심박수도 안정적이었고, 표정도 고요했다.
벤하민은 물수건으로 샤를로프의 손을 닦아주었다.
“샤를.”
벤하민은 협탁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왜 계속 잘까.”
“…….”
“충분히 잤잖아.”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손에 깍지를 끼워 넣었다. 그의 손아귀에 온기가 고였다.
“너는 거기서 내려와.”
새끼 늑대가 이불에서 나왔다.
푸르르. 흰 털뭉치가 몸을 털더니, 침대 한쪽에 엎드려 누웠다.
“환수라고 제 주인을 의식하는군. 각인을 끝냈을 줄은 몰랐어.”
“…….”
“이불 안은 안 돼.”
환수의 각인은 보통 주인의 피를 먹여서 새겨 넣는다.
새끼더라도 환수이다.
샤를, 너는 뭐를 품은 거야.
‘끼웅.’
늑대는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앞발에 머리를 숨겼다.
* * *
몸이 무겁다.
“아…….”
흐릿한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샤를로프는 몸을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불 아래서 무언가 꼬물거린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래에서 계속 꼬물댄다.
샤를로프는 가느다란 팔을 뻗었다.
“너는 왜 또 거기 있어.”
이불 아래로 무언가 고개를 내밀었다.
흰 털이 복슬복슬했다.
새끼 늑대가 푸스스 고개를 흔들었다.
녀석은 짧은 다리로 제 털을 만지작대더니,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쪼그마한 몸이 캐노피 밖으로 사라졌다.
“윽…….”
샤를로프는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잠은 그만 자는 게 좋겠어.”
“조금만요.”
“안 돼. 충분히 잤어.”
누군가 캐노피를 젖혔다.
“깼어?”
“……눈부셔요.”
“열은?”
“으음. 괜찮아요.”
샤를로프는 제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미지근해요. 나 열났었어요?”
“미열만.”
“이제는 괜찮아요.”
“너는 괜찮다는 말이 습관이잖아.”
검붉은 머리가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렸다.
“오후에 윈저가에서 외조부께서 찾아올 거야.”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며칠씩 의식이 없다면 말씀드리는 게 맞아.”
“제가 너무 늦게 깼군요.”
샤를로프는 머리를 헝클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 아이는 왜……?”
“네게 각인됐어. 두 눈이 검붉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고.”
“어떡하죠?”
“네 곁에 둬. 네게서 조금만 떨어져도 낑낑대면서 울어.”
각인이 끝난 환수는 주인에게서 떼어놓지 못한다.
“이 아이가 네게 온 게 인연이라면, 이 인연에도 이유가 있겠지.”
이 아이는 이제 샤를로프 소관이라는 뜻이었다. 끙끙대며 품으로 파고드는 게 그냥 아기다.
“그날 마물은요?”
“마무리됐어.”
“신년제는요?”
“예정대로 진행될 거야.”
“사절단은요?”
“모두 조용해.”
샤를로프는 손등으로 눈가를 훑었다. 아직은 피곤했다.
그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질문은 끝났어?”
“아, 네에.”
벤하민이 눈매를 좁혔다.
“너는 네게 무심해. 제 몸의 안위는 늘 뒷전이구나, 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