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고대 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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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고대 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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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고대 협약
2023.07.11.
“동대륙 숲의 일족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동대륙 사절단이 도착했다.
희고 정갈한 예복이었다. 청록색 겉옷에 허리끈을 둘렀는데, 검은 허리끈에는 칼날을 자수로 수놓았다.
동대륙은 고대 사원과 고대 문명이 발달한 곳이었다.
숲의 묘목이 넝쿨처럼 꼬여 고대 사원을 숨겨놨고, 숲속 절경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물려라. 둘이서만 이야기하겠다.”
시종장이 동대륙 시종들을 이끌고 나가고, 턱을 괸 벤하민이 이야기했다.
“오랜만이군.”
“국교가 단절되고 오 년만이던가?”
예전에는 드물더라도 교류가 이어졌는데, 지난 내분으로 오 년간 교류가 끊겼다.
“제국으로 오는 길은 어땠나?”
“마물 크라켄 때문에 진을 좀 뺐어.”
“포퓨타 항로로 지나왔나? 마물 소탕이 끝난 항구도 있는데, 그길로 따라 내려오는 게 더 수월했을 것을.”
포퓨타는 경계지의 항로였다.
“그쪽이 가장 가까워. 다른 길은 이틀가량 더 둘러와야 하는 터라, 더 빠른 길을 택했지.”
타탄테는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마물 크라켄을 문어꼬치로 만들어 먹는다는 일족이 더 무서웠지.’라고.
“포퓨타 항구도 마물 경계구역이라고 위험한 지역인데, 너무 부주의하지 않나?”
“제국에서 마물 토벌단을 수시로 파견 보내는 걸 이미 아는데, 경계구역이라고 특별히 위험할 건 없잖아.”
경계구역은 마물과 인간 영역 사이를 잇는 ‘틈’이었다.
흑주술이 고대협약으로 쫓겨나며, 마물도 땅 밑으로 쫓겨났다.
이건 고대신과의 협약이며 저들의 족쇄였다.
마물은 땅 밑과 경계구역 일부만 허락받았다. 땅 위는 금기시됐다.
“또, 사절단 행렬에 맞춰 경계구역 경비를 더 세워뒀잖아.”
벤하민은 픽 웃었다.
“동대륙 사절단 모두를 환영한다.”
“딱딱하셔라. 오 년만의 재회인데 마냥 살갑지는 않아.”
“그렇다고, 재회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애초부터 아니었잖느냐?”
타탄테는 오 년만에 재회한 친우에게 낯선 이질감을 느꼈다.
“먼 여행길이 고되었겠군. 시종에게 일러 편히 쉴 자리를 마련해뒀으니, 시종장을 따라가봐.”
* * *
“살갑던 성격은 아니었지만, 전보다 더 쌀쌀맞아졌습니다.”
동대륙 타란국의 시종이 타탄테의 몸시중을 들었다.
“본래도 쌀쌀맞았다. 아주 각박하다 못해 냉기가 철철 흘렀지. 예전에는 곁에 사람을 두는 법도 잘 몰랐는데 좀 변했나? 국혼을 다 올렸군.”
“엄밀히는 곁에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중 탄테 님이 없었을 뿐이지요.”
“나는 저놈과 긴밀한 사이라고 여겼는데 너무하잖느냐?”
마물 사냥주기 때면 드문드문 인연을 이어오면서, 나름 절친한 친우라고 믿어왔건만.
“쟤는 내게 너무 각박해.”
“탄테님 밖입니다. 언행을 조심하십시오.”
타탄테는 건성으로 팔을 휘저으며 시종을 물렸다.
“아무도 안 듣는다.”
“몹쓸 행실은 조심하십시오. 바깥입니다. 이곳은 타란국과는 다릅니다. 저기 황궁 시종들이 보이십니까? 저들 모두가 황실의 눈과 귀입니다. 잘못된 언행이 황실의 귀로 흘러들어갈 수 있음을 부디 기억해주십시오. 작은 타란이시여.”
‘타란’이란 숲의 일족을 뜻했다. 고대 문명을 이륙하고, 그 터에서 삶을 이룬 고대인들을 타란이라 일컬었다.
“지금 이곳은 황실의 영역입니다.”
곧 폐위될지도 모르던 시절과는 다르다.
또한, 폐위되고 내분으로 황위를 얻어냈으니,
황실 권력 또한 이때까지의 황제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현 제국은 선황이 죽고 젊은 황제가 즉위하며 궤도가 바뀌었다.
“너는 말이 너무 길다.”
“이번 사절단에는 어떤 잡음도 나와선 안 됩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신신당부해놓은…….”
타탄테는 허리끈을 느슨하게 풀고 북쪽 궁궐을 찾았다. 그 내부는 이미 어수선했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놔라! 놓으라고!”
북쪽 사절단의 궁궐에서 곡소리가 울렸다.
“저쪽으로 가보아라. 이미 잡음은 나왔구나.”
흰 꼬리가 살랑댔다. 뽀얀 털은 고왔고, 앞발은 작고 통통했다.
그런 쪼그마한 게 들짐승처럼 으르렁댔다.
늑대는 이빨도 아물지 않은 새끼였다.
작은 주둥이로 사람 머리통을 우물우물 씹는데,
머리통째로 씹혀 먹힐 위기에 처한 시종들은 울먹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아악! 이놈이 제 머리칼을 다 뽑아먹습니다!”
“괜찮다. 아직 새끼인데 물린다고 얼마나 아프겠느냐? 잠깐 물어뜯겨도 괜찮다. 쪼그마한 게 이갈이라도 하는 모양이로구나.”
흰 털뭉치가 매섭게 시종들을 쏘아봤다. 시종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저놈 저거 왜 저럽니까?”
“나도 모른다. 잠에서 깨더니 성질이 한 층 더 포악해졌군.”
“지금 사람 머리통을 사탕 깨물어 먹듯 먹잖습니까? 머리통 깨져서 죽어 나가기 전에 꺼내줘야지 않겠습니까?”
시종 하나가 가까이 다가가려던 때였다.
“가까이 가지 마라. 물어뜯길라.”
타탄테는 팔을 내저어 시종들을 물렸다.
“잠에서 막 깼다고 기분이 저조한가?”
그가 뒷짐을 지고 걷는데, 시종들의 불안한 시선이 뒤따랐다.
그의 걸음마다 긴 머리칼이 날렸다. 긴 머리칼은 윤기가 도는 검은색이었고, 허리께까지 늘어졌다.
타란국 왕가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구릿빛 낯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사절단 격식에 맞춰 챙겨입었던 겉옷도 벗자, 느른한 수사자 같았다.
“세상 따분한 표정으로 엎드려 잠만 자던 놈이 아니냐? 잠에서 깼다고 그러는 게 아니면, 뱃멀미 때문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음……. 저 아이도 질리면 관둘 거다. 저대로 놔두거라.”
늑대는 우물우물거리며 사람 머리통을 물어뜯다 질려버리자 뱉었다.
“국왕 전하께서 저 아이를 제국으로 보내라 하신 건 깊은 뜻이 있었겠지요?”
“글쎄. 그쪽도 큰 계획은 없어 보인다.”
그 뒤, 털뭉치는 저녁 무렵 홀연히 사라졌다.
* * *
샤를로프는 응접실 창문을 내려다봤다.
-크앙.
새끼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강아지인가?”
“늑대 같습니다.”
샤를로프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뻐근한 눈을 몇 번이고 만져주는데, 새끼 늑대가 ‘크앙’ 하고 울었다.
흰색 털이 고운 녀석이었다. 목을 젖히고 맹수처럼 우는데, 크기도 새끼라고 주먹만했다.
‘크앙!’
시녀들이 당혹스럽게 두리번거렸다.
“어, 어? 저 녀석이 어디서 들어왔지요?”
“몸집이 너무 작아요.”
“어머, 작아도 너무 작아요. 털도 희네요. 먼지 하나 안 묻은 것 보세요. 잘 관리해준 걸 보니, 사절단에서 같이 온 녀석 같아요.”
흰 털뭉치가 창턱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응접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늑대인가?”
“네. 새끼 늑대 같습니다. 이번에 동대륙에서 늑대 환수를 데려온 게 기억나는군요.”
“그럼 사절단 거처에서 홀로 빠져나왔겠구나.”
“네. 작은 게 멀리도 왔군요. 이런. 발이 흙으로 엉망이네요. 폐하, 쫓아낼까요?”
샤를로프는 체스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답했다.
“찾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바깥을 살펴보고 와.”
흰 털이 곱고 투명했다. 말끔한 모습이 사람 손을 많이 탔다.
샤를로프는 창턱에 팔을 기대고, 늑대를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끼웅.’
늑대가 이빨로 드레스자락을 물고 당겼다.
“폐, 폐하!”
“놔둬. 이갈이라도 하는가 보다.”
늑대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굴렀다.
“폐하. 바깥에 여쭤봤는데 화친 선물로 데려온 새끼 환수 하나가 자리를 이탈했답니다. 그게 이 녀석 같군요.”
샤를로프가 녀석을 안자, 꼬리를 둥글게 만 녀석이 그대로 품에 안겼다.
“눈도 푸르군요.”
“귀한 혈통 같습니다.”
샤를로프가 턱을 쓸어주자 녀석이 배를 깠다. 흰 털이 복슬복슬했다.
여린 손가락을 혀로 핥는데,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치아가 손끝을 간지럽혔다.
“그만.”
늑대가 입을 다물었다.
“순둥순둥한 듯 꼬리를 살살 흔들지만, 그렇다고 마냥 순한 녀석은 아닌 듯하고.”
샤를로프가 콧등을 치자, 녀석은 앞발로 콧등을 부여잡고 푸드덕댔다.
“골골대는 게 곧 잠들겠어.”
그 말이 끝날 무렵이었다.
녀석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었다. 꼬리로 팔뚝을 탕탕 치던 녀석은 금방 꼬부라졌다.
“나가서 걷자.”
“옷이 얇은데 덮을 걸 가져올까요?”
“어깨에 덮을 숄을 가져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흰 숄을 덮자, 그 애가 숄에 뒤덮였다. 시녀장이 브로치로 숄을 고정했다.
샤를로프는 곧은 손길로 녀석을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한 털이 감촉도 좋았다.
“북쪽 궁궐로 사람을 보내놓겠습니다.”
“괜찮다. 그쪽에서 이미 오고 있겠지.”
그 말 대로였다.
저 멀리서 동대륙 사절단이 다가왔다.
“히익……!”
그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표정이 왜 그런가?”
“아, 아닙니다. 어린 게 낯을 가리는데 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그렇습니다.”
사절단 시종들이 저들끼리 뒤엉켰다.
“잠들었으니 조심히 옮기거라.”
* * *
북쪽 궁궐에 사절단이 자리하고,
샤를로프는 산책 겸 승마장 언덕을 찾았다.
“동대륙의 고대 사원은 어떤 곳입니까?”
“자세히는 알려진 바 없고, 지금은 폐쇄됐으며, 옛 문명의 근원이라고만 알려진 게 다였어. 문명 뿌리의 시작이자, 그 문명이 자리잡고, 가장 찬란한 빛을 이뤘던 과거의 흔적 말이다.”
“그런 사원을 왜 폐쇄했습니까?”
시녀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폐쇄 또한 고대협약의 일부였으니까, 고대협약을 마지막으로 옛 상징성만 간직해왔겠지. 그게 옛 선조들의 뜻이라면. 우리가 왈가왈부할 영역은 아니야.”
고대협약으로 마물과 흑주술이 땅 밑으로 쫓겨나고,
해당 협약으로 신전에도 제약이 생겼으며, 옛 신들도 신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애매모호한 이야기로군요.”
“고대 협약이란 원래 그런 영역이야.”
샤를로프는 발을 멈추었다.
“이 아이가 또…….”
샤를로프는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끼웅!’
그녀는 눈매를 좁혔다.
흰 털이 복슬복슬한 새끼 늑대였다.
“내가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동대륙 사절단에서 데려갔는데. 또 몰래 빠져나온 모양입니다.”
“시종들 표정이 이상하더라니, 네가 그들 속을 썩였구나.”
샤를로프는 늑대를 쓰다듬었다.
늑대가 오물오물하며 손가락을 핥았다.
‘끼웅.’
흰 털뭉치가 안아달라며 앞발을 긁었다.
“아직은 새끼라고 바닥 한기가 차가운가?”
“혼자 있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아이 같군요.”
“털이 희어서 더 아이처럼 보일지도 몰라.”
품에 끌어안자 따뜻한 온기가 올랐다. 낑낑대던 아이가 팔뚝으로 파고들었다.
샤를로프는 마른 숨을 뱉었다.
“……차가워.”
그녀가 눈매를 찌푸리자, 이마에 물방울이 또다시 떨어졌다.
“빗방울이 떨어지는군요. 우산을 가져오겠습니다. 나무 아래서 잠시만 비를 피하고 계십시오.”
시녀장이 쓸 것을 가져온다며 떠났다.
샤를로프가 비를 피하며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 흙바닥에 스몄다.
토독. 토도독.
빗소리에 모든 게 묻혀버린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땅 밑이 서서히 울렸다. 빗소리라기에는 오묘했다.
“그림자인가?”
“네?”
“저기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아서.”
길목 너머로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이젠 노을도 모두 저물었다.
먹물이 흐르듯 그림자가 꿀렁댔다.
“카타리나.”
그녀가 지시하자 숨어 있던 이들이 서서히 기척을 드러냈다.
“……북쪽 사절단 궁궐입니다. 뭔가 옵니다.”
샤를로프는 그늘진 길목을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