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너였어, 샤를. (37/51)


#37. 너였어, 샤를.
2023.07.07.



 
며칠 뒤.

신년제는 점점 가까워졌다.


“폐하. 밖으로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샤를로프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뭔가?”

안경을 벗는데 눈이 유난히 시렸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는데, 시녀장이 멋쩍게 답했다.


“튜텨가에서 헨리에타 영식이 찾아왔습니다.”

아, 그렇다면 저 떨떠름한 기색도 이해됐다. 지금 내 기분이 그런 터라.

요즘 황제궁을 찾는 손님이 잦다. 샤를로프는 손을 들어서 시녀들을 물렸다.


“용무는?”

“잘 모르겠습니다. 돌려보낼까요, 폐하?”

샤를로프는 한동안 침묵했다.

* * *



“기별도 없이 찾아오면, 내가 그 자리에서 너를 만나줄 줄 아느냐?”

헨리에타가 탁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바깥에 자리를 마련했다. 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그 자리에서 헨리에타와 마주 보고 앉았다.

헨리에타는 작은 주먹을 움켜쥐고 무릎에 올려놓았다.


“나를 불러낸 건 너인데, 너는 꼭 내게 끌려오기라도 한 듯 불편한 기색이구나. 편히 이야기해라. 네게 큰 유감은 없어.”

“아…… 아닙니다.”

헨리에타는 주먹을 움켜쥐고 덜덜 떨었다.

저 모습이 왜 익숙한가?

작게 웅크린 몸이 왜 익숙하냔 말이다. 저 아이와는 몇 번 본 적도 없다.


“혼자 온 거냐?”

“네. 혼자서.”

“황궁 성문은 무슨 수로 넘고?”

“튜텨가 마차를 타고 왔어요.”

샤를로프는 눈매를 좁혔다.


“가족들에게는 이야기했느냐?”

“아니요.”

“너는 누구를 닮아서 이만큼이나 미련할까?”

저 꼴로 황궁 성문을 넘는 담력은 있으면서, 제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용기는 없고.


‘설령 이야기했어도 집구석에서 잘도 보내주겠다 싶지만.’

그 집안에서 겉돌면서, 너는 그 집안에서 서서히 멀어졌던가?

샤를로프는 무심히 시선을 피했다. 헨리에타는 고개를 깊게 떨궜다.


“무릎에 올려둔 건 뭔지 일단 내려놓고 이야기하거라.”

헨리에타가 탁자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샤를로프는 손아귀에 작은 함을 올려놓았다.


“폐하의 어머니께서 그린 그림 같아서요. 본래 주인이 있다면 돌려드리는 게 맞지 싶어서 찾아뵈었어요.”

함 안에는 그림이 여럿 있었다. 제 어린 시절 모습을 담아낸 그림이었다.

검붉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아이가 홀로 우두커니 앉아서 인형을 만지고 있다.

흑연으로 그린 그림에는, 오직 머리칼에만 그 색채를 뚜렷하게 새겨넣었다.

마치 잊지 말라는 듯.

그 존재를 잊고 저물지 말라는 듯.


“짐을 정돈하던 중에 발견했어요.”

“이걸 가져다주려고 왔나?”

샤를로프는 어쩐지 삭막해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다음부터는 여기에 발길 들이지 말아라. 네가 어떤 마음으로 찾아온지는 알겠지만,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어. 네가 튜텨가에 몸을 담았다면 말이다.”

샤를로프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네게 악감정은 없어.”

단지, 지금 네 모습을 볼 다른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 게 뻔히 보여서.


“이만 나가보아라.”

 

* * *



“폐하. 어딜 보십니까?”

로스켈라가 집무실 탁자를 두들겼다.


“제 보고 들으셨습니까?”

“다 들린다. 그쯤 해놓고 나가봐.”

벤하민은 팔짱을 끼고 창턱에 기댔다. 저 아래로는 황제궁 화단이 내려다보였다. 그 아래서 오가는 하인들과 정원사들도 훤히 꿰뚫었다.


“의붓동생이던가?”

“네. 녀석을 본 사람들 이야기로는 그렇습니다.”

헨리에타가 뒤를 흘끔거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저 무렵이면 열 살쯤 됐나?


“마음 쓸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사람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뒤가 밟힐 줄 알면서도 뒤에 두는 이유는 또 뭐고.

벤하민은 창턱을 짚었다. 계단으로 가도 되지만, 이 아래로 뛰어내린다면 거리가 더 짧다.

그가 거리를 가늠하던 때였다. 그의 뒤로 시선이 따라붙었다.


“폐하…….”

“나중에.”

벤하민은 훌쩍 뛰어내렸다. 높이를 어림잡아 가늠해도, 삼 층 이상 높이였다.

그는 사뿐히 착지하고 뒷짐을 졌다. 말끔한 태로 걷는 모습에, 시종들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디서 떨어지신 겁니까?’

시종들은 차마 묻지는 못하고, 시선으로만 그를 따랐다.


“왜 또 그러고 앉았어?”

샤를로프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별일 아니라며 대꾸했다.


“정보관에서 계속 집무실을 찾던 것 같은데, 바쁜 거 아니었어요?”

“대충 마무리 짓고 내려오던 길이었어.”

샤를로프는 시녀에게 손짓했다.


“방금 나간 아이, 잘 나가는지 확인하고 내게 일러줘.”

시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떠났다.


“원망하는 게 아니었나?”

“저 아이를 원망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태어난 게 죄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제법 어른스러운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벤하민은 잊을 뻔했다며 덧붙였다.


“아론은 의료원 약방에 보내두었어. 본래 의료원에서 일하던 황궁의였다고 쉽게 적응하더군.”

“대화는 나눠 보셨어요?”

“그건 나중을 기약했어.”

곧 시녀가 와서 잘 떠났다며 일러주었다.


“말은 타봤나?”

“아니요.”

“동대륙인들은 짐승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라더군. 승마도 저들에게 필수 교양이야. 사절단이 대륙에 닿기 전에, 미리 배워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벤하민이 샤를로프에게 팔을 뻗었다.

* * *

흰 갈기가 잘 어울리는 백마였다. 목덜미에 난 털을 어루만지자 백마가 목을 털어내며 푸드덕댔다.


“암컷인데 귀한 혈통입니다. 여기 고삐입니다.”

빗질을 해놓았는지 보드라웠다. 마구간 지기가 당근을 줘서 그걸 입안에 넣어주자 와득와득 씹어먹었다.


“몸에 힘을 풀고.”

벤하민이 고삐를 넘겨받아서 잡아주었다.


“처음 타본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그만큼 능숙하다는 뜻이었어.”

말이 투레질하며 몇 걸음 걸었다. 그 박자감에 몸을 맡겼다.

샤를로프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녀는 머리를 질끈 묶어서 아래로 늘어트리고, 흰 승마복을 차려입었다.

승마복은 가죽으로 된 재킷에 바지였다. 등에 자수로 놓은 황실 문양이 선명했다.


“이번에는 머리 방향을 바꿔봐.”

옆으로 고삐를 당기자 머리 방향을 바꾸었다.


“시야가 높네요. 넘어질 듯하면서도 또 넘어지지 않고.”

“저기까지 누가 먼저 닿나 내기해보겠나?”

샤를로프는 고삐를 당겼다. 저 앞으로는 고원으로 이어졌다.

그 내부 길목은 건물이 없고 잔디만 가득했다.

그 언덕은 일부러 비워놓았다. 그 시야가 막힘 없이 뚫리도록.

샤를로프가 고삐를 단단히 옥죌 때였다.


“늦어도 안 기다려줘.”

흑마가 그길로 뛰어나갔다. 흑색의 승마복에 온통 칠흑 같은 그 모습이 왜 저렇게도 어울릴까.

시야가 가림없이 뚫렸다. 나무에 가로막히는 것도 없다. 그 사이를 빠르게 지났다.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승마는 봄이나 가을이 좋지만, 겨울에도 나름 괜찮아. 그 좁은 머리에 뭘 담아내는지 모르겠지만, 비워내지 못한다면 차갑게 식혀둬.”

그 시야가 넓게 트였다. 머리는 차게 식었다. 그 냉기에 뺨이 얼얼했다.


“아……. 확실히.”

가로막혔던 시야가 뚫렸다. 그 아래로 황궁 성벽까지 훤히 꿰뚫렸다.

좁은 창문 밖으로 볼 때보다, 훨씬 더 넓고 웅장했다.

풀잎이 사부작대고, 냉기가 살갗에 와닿았다.

바람이 빠르게 뺨을 할퀴었다. 눈을 크게 뜨고 허공을 올려다보자, 벤하민이 작게 웃었다.


“샌드위치도 가져왔어. 햄과 야채를 듬뿍 넣었는데 마음에 드나?”

“달걀은요?”

“달걀 스크램블도 많이 넣었어.”

샤를로프는 숄을 바닥에 깔고 그대로 앉았다.

황궁 법도에서는 황가 어른이 맨바닥에 앉으면 안 된다고 귀가 닳도록 이야기해 줬었는데…….


‘시끄러워.’

샤를로프는 몰려드는 상념을 밀어냈다. 지금은 이런 자유로운 공기를 즐기고 싶었다.

* * *

시녀장은 부지런히 머리칼을 말렸다.

목욕을 막 끝낸 황후 폐하께서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폐하, 왜 그러셔요?”

샤를로프는 눈을 비스듬히 뜨며 벤하민에게 물었다.

벤하민은 문턱에 삐뚜름하게 기댔다.

그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물기가 아직 남은 머리칼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다 씻었나?”

“네. 폐하.”

“그럼 수건 내려놓고, 모두 나가 있어라.”

벤하민은 팔을 내저으며 시녀들 먼저 내보냈다.


“너는 너무 가혹해.”

시녀장이 수건을 내려놓고 나갔다.


“같이 씻자는데도 너무 했잖아.”

“황궁 예법에 어긋나요.”

“그 법도는 너무 낡았어. 같은 욕조에서 목욕하는 게 왜 품위를 낮추는 행위라고 여기나? 그 빌어먹을 법도 때문에, 황궁도 그간 낡아빠진 작태를 유지했겠지. 낡고 고리타분해.”

“옛날 사람이잖아요.”

“옛날 법도라면 시대에 맞춰 바꿀 때도 됐잖아.”

샤를로프는 젖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목욕을 막 끝내서 아직 몸이 노곤했다.


“목욕 중에 좀 잤나?”

“네. 그래서 조금 오래 걸렸어요.”

벤하민이 수건을 가져와서 샤를로프의 머리를 말렸다.

손으로 꾹꾹 두피를 눌렀다.

투박한 손짓이 어색했다. 마치, 한 번도 이런 걸 해본 적 없어서 낯설어하는 사람 같았다.

그의 손이 귀를 스쳤다.

샤를로프가 어깨를 웅크리자, 그가 느릿하게 귓불을 어루만졌다.


“불편해?”

“아니에요. 약간 어색해서요.”

샤를로프가 귓불을 긁적이는데,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았다.

손끝의 굳은살이 유난히 선명했다.

까끌까끌하면서도 단단했다.

턱에서부터 귀까지 그의 손끝이 계속 닿았고, 샤를로프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다 됐어.”

벤하민이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골반 아래에 닿은 머리칼이 안으로 굽었다.

곱슬곱슬해서 손가락으로 꼬면 그대로 흔적이 남았다.

벤하민이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았다.


“너무 긴가요?”

“괜찮아. 덕분에 네가 어디 있든 쉽게 찾아내잖아.”

그가 몸을 숙여 어깨에 입을 맞췄다.


“읏.”

어깨에 입술이 닿고, 그가 살갗을 약하게 깨물었다.


 


“아파?”

“조금.”

“싫어?”

샤를로프는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아,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당신이잖아. 당신이 손을 뻗는데 내가 그걸 무슨 수로 놓겠어.

당신을 거절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가끔은 여기를 깨물고 싶어져.”

그는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깊게 마셨다.

체향이 깊게 스몄다. 치아로 살갗을 또 깨물었다.


“내가 네 곁에서는 몹쓸 놈이라도 되어버린 듯 굴잖아. 여기를 깨물고, 숨을 삼키고, 탐하고. 아직은 안 되는 줄 알지만.”

“내가 지금 당신한테……. 음, 사냥당했던가요?”

뱀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건 샤를로프였다.


“가끔은.”

벤하민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속삭였다.


“내가 너를 삼킨 건지……. 네가 나를 삼킨 건지 헷갈려. 샤를.”

벤하민은 제 속내를 천천히 읊조렸다.


“내게 손을 뻗은 건 샤를 너였잖아. 약혼 이야기를 꺼낸 것도 너였어. 잊지 말아줘. 내 곁에 먼저 다가온 건 너였어, 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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