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바닥을 긁다. (36/51)


#36. 바닥을 긁다.
2023.07.04.



 
바닥을 긁던 그건 뭐였던가?

손톱으로 드극드극 긁던 것 같았다.

그 아래서 무언가 기어 올라오듯.

무언가 손톱으로 흙바닥을 긁었다.

그건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이었다.


“기분 나쁘게 아래에서 긁는 듯했는데…….”

샤를로프는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황제 폐하께서는 늦는가 봅니다.”

시녀장이 잠자리를 봐주며 속삭였다.


“먼저 주무시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리다가. 너무 늦으면 혼자 잘 거니까 그만 나가봐.”

시녀장은 향초를 곁에 켜두고 물러났다. 불꽃이 넘실거리며 촛불이 타올랐다.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샤를로프는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뭘 놓쳤나…….”

무언가 발목을 잡아끄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 건 추상적이다.

말 몇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난해한 영역이었다.

그녀가 직접 겪었던 죽음은 어둠이었다.

샤를로프는 죽음 아래서 허우적댔다.

모든 게 망가졌다.

샤를로프는 어긋나고 짓밟힌 삶 속에서, 그 끝자락을 부여잡고 아등바등 버텼다.

그 끝이 얼마나 무의미하던지.

무얼 위해 버텼던가?

무얼 위해 살아남았던가? 그럼, 나는 왜 죽었던가?


“깼나?”

샤를로프는 눈을 떴다.


“더 자둬. 엎드리고 잠든 게 불편해 보여서 옮겨 눕힐까 싶었는데, 내가 깨웠구나.”

샤를로프는 그제야 흐릿한 시야를 다잡았다.


“기다렸나?”

“네. 조금요.”

“기다리지 말래도. 다음부터는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내가 늦더라도 먼저 자둬.”

벤하민은 이불을 끌어올리고, 샤를로프를 안쪽에 눕혔다.

샤를로프는 은은히 웃어주었다.


“일은 잘 마무리됐나요?”

“응. 마물은 그 독기만 제때 잡는다면 금방 일단락돼.”

“예전에도 그만한 일에 직접 나섰나요?”

“내가 이야기했잖아. 이런 나라도 나라라고, 누군가는 명줄을 부여잡고 연명해줘야 한다고.”

황위에 앉은 과정이 어수선했기에.

그를 따르는 꼬리표 또한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조금은 억울했을지도.”

샤를로프가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들었을까.


“방금 뭐랬나?”

“아니에요.”

“실없긴. 더 자둬.”

의식이 점차 잠겼다.

* * *

지난밤 일이 일단락됐다.


“어수선했던 현장도 모두 정돈됐습니다. 마물을 직접 본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군.”

벤하민은 깃펜을 내려놓았다. 독기 때문에 망가졌던 손아귀에는 새살이 돋았다.


“그놈은 조사해 봤나?”

정보관에서는 그간 조사한 부분을 보고했다.


“놈을 추궁해 봤지만, 그놈도 아는 건 없었습니다.”

“술 먹고 잊었을 가능성은?”

“거기까지 고려해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상급 마물을 다루기에는 그 그릇이 작았습니다. 애초에, 그 독기를 쓰고 본인도 독기에 침식됐더군요. 독기에 먹혔습니다. 본인도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고요.”

놈이 고통스럽다며 버둥대는데, 신관들이 독기를 태워내고 추궁했다.


‘젠장! 아파! 아프다고! 아아악! 아아아아……! 어, 어떻게 좀 해보시오! 살, 살려줘. 신, 신관……. 내가 잘못했으니 살려주시오!’


‘그만한 독기를 다루면서, 제 몸에 방비도 안 해둔 머저리가 여기 있었구나.’


‘이, 이만큼 위험한 줄 몰랐소! 아니, 기생충 같은 마물을 불러낼 작정이었지. 나, 나는 이런 설명 듣지도 못했소! 그, 그 노인네! 빌어먹을 노인네 데려와! 윽……. 끄윽!’

 
놈도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독기를 다룬 건 처음 같습니다. 헐값에 웬 노인에게서 샀다는데……. 누군지도 모르더군요. 며칠 캐봤는데, 이 이상 기대하기는 힘들겠습니다.”

“한계인가?”

“네. 독기는 시전자를 잡아먹습니다. 일반인이 그 독기를 다뤘으니, 하급이더라도 치명적이겠지요. 하급이면 팔 한쪽을 내어주면 될 일이지만, 저만한 독기를 다뤄놓고 제 몸의 안위를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요.”

본인은 모르고 쓴 모양이지만요.


“이만 나가보아라.”

벤하민은 됐다며 팔을 내저었다. 정보사가 보고를 끝내고 떠났다.

* * *

아론은 후드를 벗었다.


“시일이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오래 걸렸구나.”

아론은 흐린 눈으로 황궁 성문을 올려다봤다.

이곳을 다시 밟았구나. 선대 황후가 죽고 도망치듯 떠났던 황궁이다.


“거기.”

보초병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론은 그제야 제 행색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달았다.


“아, 아니 쫓아내겠다는 게 아닙니다.”

보초병은 복잡 미묘한 낯으로 아론을 살폈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아론은 품속에 넣어뒀던 출입패를 꺼냈다.


“황궁의십니까?”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부름을 받고 다시 황궁을 찾았습니다.”

 

* * *

샤를로프는 머리를 쓸어내렸다.


“외가댁 식구들은?”

“네. 마차까지 모셔다드리고 온 길입니다.”

윈저가에서 찾아들었다.

외가댁 식구들은 괜찮다고 두 번 세 번 확인시켜주고서야 떠났다.


“윈저가에서 걱정이 컸던 모양입니다.”

“나는 괜찮다는 데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지 걱정도 내려놓는구나.”

“사람들 마음이라는 게 그렇더군요. 꽃잎처럼 여리디여린 게 사람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알기에, 곁에서 살피고 또 살피는 게 아니겠습니까?”

길게 풀어놓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걱정한다. 그게 요점이었다.

가족들 곁에서는 그렇다.


“행사 일정표입니다. 사절단이 황궁을 찾는 건 이튿날 오후입니다. 즉위식 때는 너무 급하게 일을 치른 터라, 이번에 정식으로 인사하면서 찾아뵐 예정입니다.”

“예산안은?”

“그 부분은 여기 있습니다. 그 밖의 필요한 사항도 밑에 기입해 놓았으니 확인해 보십시오.”

샤를로프는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그런 샤를로프를 살폈다.


“남대륙에서도 사절단이 오나?”

“네. 남대륙과는 지난 몇 년간 교류가 단절됐었지요. 남대륙이 그간 내분으로 어수선했는데, 내분이 끝나자마자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남대륙과 동대륙의 문화관습이 완전히 다르다. 그 차이를 잊어선 안 돼. 실수할 일 없도록 유의해라.”

시녀장은 샤를로프가 불러주는 유의사항을 기입해 놓았다.


“폐하. 잠시만…….”

시녀 하나가 샤를로프를 찾았다. 그녀는 무심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

“오늘 손님이 찾아뵙기로 했습니까?”

샤를로프는 계속 이야기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바깥에 손님이 찾아들었습니다. 본인을 아론이라고 소개하며, 과거에 황궁에서 황궁의로 일했던 몸이라더군요.”

“누가 말이냐?”

“아론이라고 본인을 소개했습니다. 등이 굽은 노인이었습니다.”

샤를로프는 몸을 급히 일으켰다.


“어디 있느냐?”

“밖에…….”

시녀장이 말을 다 잇기도 전이었다. 샤를로프는 밖으로 나섰다.

황제궁 앞에서 숨을 고르는데, 익숙한 사람이 익숙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론이 몸을 꾸벅 숙였다.


“아론…….”

샤를로프는 입술만 달싹였다.


“노인네가 밤바람을 너무 많이 맞았습니다. 따뜻한 곳에서 말씀을 올려도 좋겠습니까?”

샤를로프는 급히 궁 안에 자리를 마련했다. 난롯불을 높이고, 따뜻한 차도 한 잔 내오라 했다.


“복장이 후줄근해서 뵙기 송구스러웠습니다.”

“내게 죄송할 일이 아니에요.”

“두 분께서 언젠가 황궁에 닿으리라 여겼는데, 그 시일이 예상보다 더 빨랐습니다. 국혼 때 자리를 지키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사죄만 두 번째네요. 저는 괜찮으니 몸부터 녹여요.”

아론은 찻잔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많이 늙어서 그렇습니다. 남대륙은 따뜻한 나라인데, 대륙은 춥더군요. 지금은 또 겨울 끝자락을 지나는 중이라 더 추운 모양입니다.”

샤를로프는 아론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남대륙까지 다녀오실 줄은 몰랐어요. 저한테 미리 이야기했다면…….”

“늙은이 몸 생각해서 다녀올 것 없다고 말씀하셨겠지요. 따뜻한 곳에서 여행하면서 몸도 녹였더니 괜찮습니다.”

“그래도요.”

“말씀 놓으십시오. 폐하. 그 자리에 앉았다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위계질서를 갖추셔야 합니다.”

샤를로프는 쓰게 웃었다.


“외로움을 잘 타는 분께서 가장 외로운 자리에 오르셨군요. 가장 높지만, 또 가장 쓸쓸하지요. 내딛는 걸음걸음이 때때로 버거울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입니다…….”

“말을 놓으십시오, 폐하.”

아론이 한 번 더 단호히 속삭였다.


“이 모습을 뵈게 되리라 짐작했지만, 또 막상 보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론은 이기지 못하겠어. 남대륙 일정은 끝났나?”

샤를로프는 말을 놓았다. 그제야 아론이 푸근하게 예전처럼 미소 지었다.


“남대륙에서 직접 얻을 약재가 있어서 다녀오려던 길이었습니다. 아, 루퍼틱 병도 조사해 봤습니다.”

아론은 그간 알아본 이야기를 천천히 읊었다.


“루퍼틱 병은 몸의 감각체계를 마비시키는 증상이 대표적입니다. 예시로, 손발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러다 근육이 굳어가는데…….”

“흔한 병인가?”

“흔한 질환은 아닙니다.”

아론이 병의 시초를 이야기해줬다. 과거에 남대륙 광산촌에서 빛을 발하는 광석을 발견해서, 도자기에 광석을 섞어서 만드는 유행이 돈 적 있다.


“광산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자주 걸리던 병이었지요.”

“그럴 리가…….”

그럼 나는 왜 죽었어?

샤를로프는 표정을 서서히 일그러트렸다.


“루퍼틱 병이 희귀한 건 맞습니다. 또, 지금 있는 치료제가 부작용이 커서, 루퍼틱 병보다 치료받는 과정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치료가 가능한가?”

“부작용 없이 치료하려면 연구가 좀 필요하지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 루퍼틱 병으로 귀족가의 누군가가 죽는다면…….”

“루퍼틱 병도 병입니다. 사람이 죽을 수야 있지요. 치료받지 못한다면 빈사상태에 빠진 뒤 죽습니다.”

아론이 긴가민가하다며 중얼거렸다.


“다만, 치료는 가능합니다.”

 

* * *

하넬리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말도 없이.

한참을 그러고 섰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는데, 이질적인 무언가가 섞였다.


“……대신관님.”

어린 신관들은 덜덜 떨었다. 그 신력은 여기저기로 뻗쳤다.

거미줄이 허공에서 넘실거리듯, 그 신력은 얇게 퍼졌다.

어린 신관들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괜찮으십니까?”

하넬리는 어쩐지 섣불리 말을 건네기 힘든 기운을 풍겼다.

그 신력은 날것 그대로였다.

태초의 신력은 그렇다.

날것 그대로 살갗을 할퀴며, 부정한 것들을 태워낸다.

정제되지 않은 신력이 살갗을 할퀴듯 따끔거렸다.

하넬리는 눈물을 떨구었다. 그가 몽환적으로 속삭였다.


“어째서.”

그의 눈이 서서히 붉어졌다.

날것 그대로의 신력이 어지럽게 날리었다.

그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 속삭임이 너무나 원통했다.


“아직도 그 영혼은 울부짖는구나. 얼마나 억울했으면, 울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홀로 말라비틀어졌느냐?”

“…….”

“그만 울어라. 아이야. 제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줄도 모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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