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추모곡 (33/51)


#33. 추모곡
2023.06.23.



 


“누가, 누가 좀 도와주시오. 아무도 없소!”

용병단 보급형 칼날은 이미 부러졌다.

사내는 피가 울컥울컥 흐르는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이대로는 얼마 못 버틴다.


“이, 이 삿된 것들아! 당장 꺼지거라……! 빌어먹을! 아무나 좀 도와주시오!”

사람 모습을 한 ‘그것’들이 지하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머리뼈를 따각따각대며 맞부딪치고,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려는 듯 허우적댔다.


[꺼내줘.]

[꺼내줘.]

[꺼내줘.]

혼령이 울부짖는 느낌이었다. 꺼림칙하고 오싹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놈들은 무덤지기였다. 지하에서 놈들이 기어 나왔다. 무덤지기가 입만 꺼내놓고 뼈마디를 딱딱거렸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 아이들을 발로 밟으면 쓰겠느냐?”

그림자 뒤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요! 이, 이런……! 이건 설마 흑주술이요? 네놈들! 흑주술은 엄연히 신전과 제국에서 금지한 술법이다! 죽어서도 편히 죽지 못하고, 살아서도 편히 살지 못한다. 도대체 무슨 짓을……!”

두 인영이 무덤지기 곁에 섰다.


“살, 살려주시오! 오늘 본 건 무조건 함구하리다!”

사내는 무덤지기에게 목을 물어뜯겼다.


“끄르르르륵!”

무덤지기들이 곧 땅아래로 숨어들었다.


“……님, 제국으로 귀환한 첫날이잖습니까?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잠시 들른 게 일이 틀어졌군.”

“부디, 조심하십시오. 배가 고파도, 빈사상태인 이들이 아니면 섣불리 취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교황이 괜히 금기에 발이 묶여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힘을 온전히 되찾기까지 기다리십시오.”

“다음부터는 조심하마. 제국에 발을 디딘 게 오랜만이라 그렇다.”

“황비가 죽었습니다.”

“그래. 흑주술도 모두 회수했다.”

노인이 굽은 등을 두들기며 지팡이를 짚었다. 그리고 예우를 갖춰 예를 올렸다.


“이 시대 마지막 흑주술사시여…….”

그림자 아래로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그의 나이는 실제로 예순을 훌쩍 넘겼지만, 노화가 늦어진 만큼 외양도 젊은 시절 모습을 유지했다.

밝은 금발이 로브 밖으로 언뜻 비쳤다. 노인은 길을 비켜주며 목을 굽혔다.


“아드님께서 기다립니다. 이만 저택으로 가시죠.”

“그래. 이만 돌아가자꾸나. 뒤를 밟히지 않도록 잘 치워두거라.”

“네. 저건 이 노인네가 처리하겠습니다. 뱃놀이도 질렸잖습니까?”

노인은 놈을 바닷가에 버리고 부둣가를 떠났다.

* * *

무겁다.

지하에서 발목을 잡아끌듯 몸이 푹 꺼졌다.

또 버림받았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너희는 내 발목을 모두 잘라놓고, 나를 두 번씩이나 버리냐?

갈 곳이 없다.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으면 모든 게 끝나리라 여겼다.

그 뒤, 모든 의식이 잠길 무렵.


‘외롭니, 샤를?’

 
그런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이제는 그만 일어나라고. 누군가 독촉하는 것도 같고.

아닌가……. 환청이라기에는 점점 또렷해지는구나.


“일어나십시오. 폐하”

누군가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몸이 무거우십니까?”

“아니다.”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시는군요.”

“긴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몸치장 중에 잠든 모양이다.


“머리 장식을 올려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이 머리 장식을 가져와서 머리에 얹으려는데, 샤를로프가 팔을 들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뼈대도 얇고 목선도 가늘었다. 그래도, 예전의 곧 죽을 것 같은 인상은 지워졌다.


“폐하?”

시녀장이 샤를로프를 불렀다.


“됐다. 치장을 서둘러 마무리 짓거라.”

검은색 드레스를 꺼내 걸쳤다. 시녀장이 등 뒤에서 리본을 단정히 묶어 주었다.

리본 끈도 채도 낮은 리본으로, 화려한 장식보다는 단정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리 장식도 검은 리본으로 머리를 올려 묶었다.

희고 창백한 낯빛에 대조적이어서, 시녀들은 치장을 끝내면서도 저들끼리 신음을 삼켰다.


“영면궁으로 납실 시간입니다.”

꾸벅꾸벅 졸던 몸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샤를로프는 눈을 깜빡였다.


“시간이 됐습니다.”

시종들부터 시녀들까지 모두 검은 옷을 입었다.

* * *

유골함은 이튿날 영면궁에 묻혔다.

빈 묘지에 선황후의 유골이 자리했다. 시호도 황태후로 격상됐다.

그뒤,

날씨가 유독 춥더라니, 눈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땅이 얼기 전에 유해를 모셔서 다행이구나.”

날씨가 좀 더 추웠다간 그대로 땅이 얼어서 힘들어질 뻔했다.


“황궁 밖에서는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제국민들이 이만큼이나 목소리 높여 우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울더라도 책잡을 사람이 없으니, 이제야 마음 놓고 목소리를 내겠지.”

샤를로프는 황제궁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흰 눈에 세상이 소복하게 덮였다. 하인들이 빗자루로 눈을 쓸었다.


“곧 신년제가 열리겠구나.”

“네. 폐하. 올 한 해가 유독 긴 것 같군요.”

샤를로프는 머리를 올려묶고 밖으로 나섰다. 시녀들이 뒤따랐다.


‘지금 내가 할 일이라…….’

샤를로프는 작게 웃었다.


“일단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부터 해결해야겠어. 진혼제는 죽은 이들을 위로한다면, 신년제는 산 사람들에게 새싹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과거에 머물기보다는 한 걸음 딛고 이제는 앞을 볼 때였다. 진혼제는 국혼 전이어서 떠맡을 일이 없었더라도, 이번 신년제부터는 모두 황후의 몫이었다.


“중앙연회홀을 재정비해야겠구나.”

“연회홀로 향할까요?”

샤를로프는 황제궁을 돌아봤다. 창문을 깨끗하게 닦아두어서, 거미줄 하나 없이 말끔했다. 대리석 복도에는 붉은색 융단을 깔아놓고, 벽에는 등불을 달아놓았다.


“연회홀로 가자.”

샤를로프는 매끄럽게 등을 돌렸다.

연회장은 그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한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탓이었다.

중앙홀 문을 열자 희뿌연 먼지가 올랐다. 하녀들이 손을 내저으며 먼지를 날려 보냈다.


“먼지가 빠질 때까지 다른 곳을 보고 오시겠습니까?”

“아니다. 그냥 잠시 둘러볼 테니 할 일들 하거라.”

샤를로프는 신년궁 연회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신년제나 건국일 같은 큰 행사를 위해서 마련된 곳이었다.

황궁 법도로는 신년제나 건국일에만 열리는 연회장이어서, 그 자체를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 규모도 다른 연회장보다 컸다. 유리로 된 홀이었다. 다만, 관리가 미흡했다고 여기저기 색이 바랬다.

지난 오 년간 여기를 쓸 일이 없었으니, 이런 부분도 이해는 된다. 샤를로프는 계단 지지대를 쓸었다.


“본래라면 꾸준히 관리해 와야겠지만, 지난 몇 년간 황궁이 어수선해서 어쩔 도리가 없구나.”

“지금이라도 보수할 곳을 보수하면 됩니다.”

“일꾼들을 불러 새로 보수해야 할 곳들을 면밀히 살피라 전하거라.”

이곳도 과거에는 고풍스러웠겠지만, 옛 멋스러움도 지금은 먼지 아래에 묻혔다.


“본래대로 돌려놓으려면 시일이 조금 걸리겠구나.”

 

* * *

밤이 늦었다.


“황제 폐하께서 오늘은 집무실에서 밤을 보내지 싶다고, 먼저 주무시라 말씀 전하셨습니다.”

시녀장이 샤를로프의 등 뒤에서 속삭였다. 긴 머리칼을 빗어내리던 샤를로프는 멈칫했다.


“어째서?”

잠은 늦더라도 침실에서 자던 그였다.


“황태후 폐하의 유해를 모시고, 미뤄뒀던 일들이 있었잖습니까? 피곤하시면 잠자리를 봐드릴까요?”

샤를로프는 괜찮다며 고개를 내젓고 시녀장을 내보냈다. 침대 맡에서는 촛불이 잘게 일렁였다.


“혼자 두지 않는다더니 오늘은 예외이려나.”

샤를로프는 팔을 톡톡 두들겼다. 낮에 잠깐 선잠을 잤다고, 지금은 잠이 안 왔다.

곁에서 같이 잠들어주던 사람이 있다고, 벌써 여기에 적응해 버렸나?

온기는 예고도 없이 스몄다.

샤를로프는 숄을 두르고 침실에서 나왔다. 복도 밖은 비었다.


“폐하, 어디 가십니까?”

카타리나가 그림자 아래에서 나왔다.

정보관 정보사를 ‘그림자’라고 일컫더니, 그림자 아래에 숨어서 아예 기척을 지우는구나.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니?”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대로 향하려던 샤를로프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이 꼴로 찾아뵌다면, 황궁 예법에 어긋나는가?”

“폐하께서 곧 황실의 법도인데 그걸 왜 물으십니까?”

카타리나는 딱딱 떨어지는 답을 내어놓았다. 정답지의 답을 꺼내놓듯 매끄러웠다.


“폐하께 가시는 길이면, 집무실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샤를로프는 괜찮다며 팔을 내저었다.


“어차피 걷는 길인데 걸으면 된다.”

“길이 어둡습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굴지 마라. 과하다.”

“송구합니다.”

샤를로프는 숄을 꼼꼼히 여몄다. 복도를 지나오자, 지나온 골목이 어둑한 그림자가 앉았다.

저런 그림자에 숨어서 지내나?

막연한 궁금증을 접어두고 등을 돌리는데, 뺨 옆으로 숨이 닿았다.


“먼저 자라고 이야기 안 했나?”

곧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집무실에 계시다더니 왜 거기서 나와요?”

벤하민이 곁에서 샤를로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낮에 봤을 때보다 복장이 느슨했다. 목을 갑갑하게 조이던 타이를 풀고, 단추도 두어 개 풀었다.

벤하민이 숨을 내쉬자 옅은 시가 향이 풍겼다. 예전에 집무실에서도 한 번 맡았던 것 같다.


 


“궐련 피우셨어요?”

“오늘은 혼자 있을 생각이었는데 찾아왔구나.”

“이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아서요.”

당신이 내게서 당신을 봤듯, 나도 당신에게서 나를 봤다. 우리는 닮았기에 서로가 어떨지 잘 안다.


“업무는 여전히 바쁜가요?”

“아마도.”

“잠들 시간도 없이요?”

벤하민은 눈매를 좁혔다.


“오늘은 내가 조금 예민하지 싶어서.”

샤를로프는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벤하민이 좁혀진 거리를 보며 작게 신음했다.


“내가 거리를 둘 때는 거리는 두는 게 좋아.”

벤하민은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다보더니 등 뒤로 팔을 젖혔다. 그러자, 로스켈라가 다가와서 서류를 받았다.


“여기 분들은 기척이 없네요.”

“음침한 놈들이 좀 많아.”

로스켈라는 제 주군을 보며 “여기서 폐하께서 가장 음침하십니다.” 하고 답했다.


“업무는 거의 끝났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직접 찾아들었는데, 오늘은 편히 주무십시오.”

로스켈라는 퇴근도 못 하고 붙들린 보좌진을 턱짓했다. 저들도 퇴근해야 할 게 아닙니까?

* * *



“고용주가 피곤하면 아랫것들은 더 피곤해요.”

샤를로프는 침실로 돌아와서 숄을 내려놓았다.


“잠은 늦더라도 괜찮으니 침실로 와서 자고요.”

벤하민은 젖은 머리를 헝클이며 침실 문을 닫았다. 검은 눈이 탁하다.

분명 독한 시가를 피웠는데, 이제는 그 흔적만 옅게 남았다.

벤하민은 머리를 헝클였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얼른 이리로 올라와.”

샤를로프는 고개를 기울였다.


“재워 달라고 부른 거잖아, 샤를.”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어깨를 감쌌다. 힘을 준 게 아닌데도 단단하게 어깨를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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