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울부짖는 영혼을 봤습니다. (32/51)


#32. 울부짖는 영혼을 봤습니다.
2023.06.20.



 
황궁은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정보관 정보사가 품에 흰 유골함을 들고 있었다. 붉은 깃을 단 정보사였다. 어깨에 단 붉은 끈은 황제궁으로 가는 급보니까 길을 막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종장이 눈물을 눌러 삼키며 읍소했다.


“폐하……. 명하십시오.”

벤하민은 낮게 침전된 목소리로 읊조렸다.


“유골함을 내려놓아라.”

황제궁 공터에 자리가 마련됐다. 유골함이 흰 대리석 탁상에 놓였다. 약식으로 마련된 자리는 쓸쓸했다.

정보사가 유골함을 내려놓았다. 유품도 함께 자리했다. 흰 유골함은 노인이 처지에 안 맞게 무리했음을 보여줬다.


‘선황후 폐하께서.’

샤를로프는 그 모습을 찬찬히 내려다봤다.


‘드디어 왔구나.’

긴 방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황궁으로 다시 돌아오기 싫었을지도 모르고.


“신관은…….”

벤하민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읊조렸다.


“대신관은 들었느냐?”

“신관께서 납셨습니다. 폐하.”

대신관이 허둥지둥 뛰어 올라왔다. 신관이 유골함에 손을 얹자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신전은 치유의 신이 다스리는 성역이었고,

대신관은 신력으로 사물에 깃든 사람의 기운을 읽을 수 있다.


“아아…….”

대신관이 손을 거뒀다. 그는 두어 걸음 뒤에서 사후예의를 표했다.


“선대 황후 폐하께 예의를 표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황실의 부름을 받고 찾아뵐 때만 하더라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폐하, 이 유해는 선대 황후 폐하의 유해가 맞습니다.”

예의를 표한 대신관이 뒤로 물러났다. 벤하민은 유골함에 손을 얹었다.


“선대의 유해가 맞느냐?”

“네. 폐하.”

“이십 년이다.”

“네. 많은 시일이 지났지요.”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떨궜다. 기사단은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췄다. 정보관도 모두 사후예의를 표했다.

샤를로프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다. 수백의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시종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유해를 누가 보관해 왔느냐?”

“이 노인입니다. 폐하.”

볼품없는 노인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행색도 초라했다. 유골함을 내려다보던 벤하민도 느꼈다.

없는 형편에서 노력했구나.

날이 추워졌는데도 봄이나 여름에 입을 옷가지를 입고 있었다.


“……노인은 자리를 마련해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라.”

“네. 폐하.”

“나중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시종장이 노인을 데리고 떠났다.


“유해를 안으로 모시거라.”

유골함은 영면궁 영면실에 안치됐다. 영면궁은 시설을 관리하는 관리소가 있었다. 그 안으로도 재단이 마련됐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자리를 물릴까요?”

“……내게 뭐라 했나?”

“자리를 물릴지 물었습니다.”

벤하민은 말없이 유골함을 내려다봤다. 그저, 하염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모두 자리를 비우거라.”

시종들이 모두 떠났다. 영면실 문이 닫히고, 재단도 커튼을 내려놓았다.

흰 장막 같았다. 재단 안쪽을 가려놓고, 그 길목을 따라서는 촛불을 밝혀놓았다.

벤하민은 길목을 따라서 걸었다. 그가 걸음을 내딛자, 촛불이 잘게 일렁거렸다.


“폐하.”

샤를로프는 뒤에서 그를 불렀다. 긴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나 보석도 없이 단아한 옷차림이었다.

고급스러운 옷감을 겹쳐서 고풍스럽게 드레스를 부풀린 게 다였다.


“저도 자리를 비워 드릴까요?”

샤를로프가 뒤에서 묻자 벤하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으니까 그대로 있어.”

“심중이 어지러우신가요?”

“확실히. 며칠간 마음이 어지럽던 게 이 이유 때문이었나?”

샤를로프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선황후께서 들으신다면 서운해하십니다.”

그렇다고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시일이 너무 지났으니, 믿기 어려웠던 건 이해해요.”

“그랬지. 긴 시간이었으니…….”

“황궁은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폐하께서는 황위에 앉았고, 그 자리에서 먼저 되짚어야 할 사실들을 되짚었을 뿐이에요.”

지금 그 자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위로인가?”

“네. 아마도요.”

“퍽 심심하군.”

벤하민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 재단을 살폈다.


“긴 방황이 끝나서 피곤하실 거다. 어머니께서도 쉬셔야 하니, 잠시 자리를 비워 드리지.”

벤하민은 그렇게 영면궁을 떠났다. 영면궁 문이 닫혔다. 샤를로프는 그런 그를 떠나보냈다.


“저는 어떤 마음인지 알잖아요.”

그 유해를 보고도 마음 놓고 슬퍼하기 힘든 양면적인 감정.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하는 그런 마음.

벤하민은 이성적이었다. 어쩌면 지독하게 냉철했을지도 모른다.


‘선황후 폐하.’

샤를로프는 속으로 읊조렸다.


‘부디, 서운해 마십시오. 긴 세월이잖습니까. 사실을 놓고 그대로 믿지 못하는 이 자리가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 * *



“노인은 알현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귀족이 아닌지라 예법이 서툴 겁니다.”

벤하민은 됐으니 괜찮다며 사람을 물렸다.

유골함을 들고 온 노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죄라도 지은 듯 벌벌 떨며 어깨를 웅크렸다.

벤하민이 다가와 서자, 노인은 몸을 납작 엎드렸다. 겁에 잔뜩 질렸으면서도, 인사부터 올렸다.


“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죄라도 지었나?”

“미천한 몸으로 폐하를 뵙게 되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벤하민은 노인의 초라한 행색을 살폈다. 낡은 옷가지는 여기저기 뜯기고 찢겼다.


“내가 만나주지 않았으면 어떡하려고 그랬느냐?”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습니다.”

벤하민은 그의 손이 닳고 뭉개진 걸 보며 물었다.


“……농부라고.”

“네. 폐하.”

“농사를 지은 지는 얼마나 됐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부모님 때부터 농사를 지어서, 부모님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작은 밭농사를 짓습니다. 농장도 작고요.”

벤하민은 노인의 손톱을 확인했다. 농사짓는 이의 손톱이 맞다.


“그대가 유해를 모시고 있었나?”

노인은 고개를 푹 떨궜다.


“이 늙은이는 그저 황가의 어른을 추운 들판에 버려둘 수 없었을 뿐입니다.”

“어째서?”

“이 늙은이가 제국에서 몸담고 지낸 게 70년이 되어갑니다. 미천한 늙은이가 보잘것없는 곳에서 위패 하나조차 모시지 못하고 죄송했습니다.”

벤하민은 노인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선황후께서는 그대 덕분에 다시 황궁을 밟으셨다. 이 도움은 잊지 않고 황궁에서도 보답하겠다.”

“아닙니다. 폐하. 보답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천벌 받습니다.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노인이 벌벌 떨었다. 진짜 벌을 받기라도 하듯. 그의 행색에서도 충분히 보였다.

노인은 제 처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유골함을 얻어서 유해를 모셨다.

보잘것없다고 일컫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가볍기만 한 건 아니었다.


“시종장은 들어라.”

“네. 폐하. 찾으셨습니까?”

시종장이 몸을 숙였다.


“노인에게 곡식과 옷가지를 챙겨 보내라. 땔감도 넉넉하게 챙겨주고, 사람을 보내 편의를 살피거라.”

“감, 감사합니다. 폐하.”

“황실은 이 일을 잊지 않는다. 시종장은 따뜻하고 편안한 옷가지를 가져와 노인을 챙겨주어라.”

노인은 눈물을 떨구었다. 실제로도 그는 보상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니었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노인은 주저앉아서 숨죽여 울었다.

노인이 떠나고 알현실 뒤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병풍 뒤로 바람이 날렸다. 대신관, 하넬리가 알현실 뒤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 기척을 미리 읽었던 벤하민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뒤로 돌아섰다.


“신전으로 바로 안 돌아가도 되나?”

“교황께서 천천히 돌아와도 좋다 허락하셨습니다.”

하넬리는 긴 금발을 늘어트렸다. 허리 아래로 살랑거리는 건 비단결처럼 고왔다.

신이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손짓 하나에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맑은 영혼이로군요.”

“그게 보이나?”

“삶을 오래 산 이들에게서는 자주 보입니다. 투명한 기운을 보니까 성품이 보이는군요.”

하넬리는 신관 복장 안에 술을 숨겨 넣었다.


“신관이 술을 먹어도 되나?”

하넬리는 모르는 척 옷을 여몄다.


“교황 성하께서 모르면 괜찮습니다.”

하넬리는 신관 복장 안에 술병을 하나 더 숨겨 넣으며 고요히 중얼거렸다. “교황께서도 여기까지 벗겨내지는 않겠지.” 하고.


“선황후께서는 편안히 잠드셨습니다. 영혼이 안식에 든 게 보이더군요. 맑은 기운 곁에서 같이 안정을 되찾았는가 봅니다.”

벤하민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하넬리는 허무를 담아둔 듯한 눈을 들어올렸다. 초점을 잃은 눈이 벤하민을 향했다. 신성력이 섞인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곁에 아무도 없을 분께서 사람을 두었군요. 그 곁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언인가? 예언은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고 아는데 괜찮나?”

신전은 예언하지만 예언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 임의로 인과를 손대면 그걸로 신벌을 받는다.


“예언이지만 예언이 아닙니다.”

하넬리는 말이 끝나자 걸음을 다시 옮겼다.

* * *

하넬리는 품에서 독주를 꺼냈다. 술병째로 독주를 마시는 모습에, 어린 신관들은 대경실색했다.


“교, 교황 성하께서 보시면…….”

“너희가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른다. 경거망동하게 주둥아리 나불거리는 놈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버릴…….”

하넬리는 입에 술병을 문 그대로 멈췄다. 악귀 같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교황 때문이었다.


“너는 심부름 하나 시켰다고 잔뜩 삐뚤어져서는!”

하넬리는 신력으로 주독을 날렸다.


“성하께서는 늙어서 고지식합니다.”

“존댓말이면 다인 줄 아느냐!”

“고혈압에는 신력도 듣지 않습니다. 늙었으면 몸조심하십시오.”

하넬리는 홀로 걸어 나갔다. 그가 입가를 쓸자 피가 배어났다. 그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었다.


“또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했느냐! 금기된 예언을 입 밖으로 꺼냈느냐!”

“이 몸뚱이는 말 몇 마디를 마음대로 못하는군……. 됐습니다.”

하넬리는 이번 대에 이르러 가장 막강한 신력을 타고났다. 하넬리는 예언으로 앞날을 보지만, 그의 예언은 금기와 나란히 함께한다.

그 예시로, 하넬리는 황궁에서 말한 것들로 혀가 잘렸다.


‘예언으로 바깥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하넬리가 걸음을 딛자 귀에서 방울이 잘게 울렸다.


“곧 회복됩니다. 쯧.”

“신전 교리에 얽매이지 말고 밖을 넓게 보라고 보내뒀더니……. 너는 제도로 오자마자 황궁에 다녀온다더니 혀가 잘려 왔느냐!”

교황은 끌끌대며 혀를 찼다.


“선황후 폐하는 잘 보내드렸느냐?”

“네. 그러면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넬리……! 술은 내어놓고 가거라. 품 안에 한 병 더 있는 것도 봤다.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교황이 술병을 가져가더니 홀연히 떠났다. 신전은 흰 대리석 건물들이 따분하기 그지없다.

교리는 고리타분하고, 법도는 낡았다.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 영혼을 봤습니다.”

지나간 과거이자, 오지 않을 미래입니다. 갈 길을 잃은 영혼입니다. 잘 위로해주십시오.

하넬리는 혼자가 되어서야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서 고요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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