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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폐후의 유해. (31/51)


#31. 폐후의 유해.
2023.06.16.



“말로 설명하기 힘든 속마음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단 몇 마디 말로 모두 설명된다면, 사람 속마음이라는 건 얼마나 단조롭겠어요.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이죠.”

샤를로프는 독주를 더 꺼냈다. 벤하민이 어디서 꺼내는지 봐준 덕분에 손쉽게 독주를 꺼냈다.

긴 이야기로 그 마음을 어지럽히기보다는, 이런 작은 위로도 충분했다.


“술 잘 마셔요?”

“내게 묻는 건가?”

“다음날 속 아프다고 하면 안 돼요.”

둘은 나란히 술병을 쥐었다.


“윈저가 사람과는 술로 대적하는 것 아니라고 들었다만.”

“누가 폐하께 그런 허언을 올렸을까요?”

샤를로프가 작게 미소 짓자, 벤하민도 고개를 내저었다.


“병째로 먹는 건 황실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샤를로프는 차갑게 식은 눈길을 창밖으로 던졌다.


“폐하께서 곧 황실의 법도 아니겠어요?”

우리는 또 아무렇지 않게 내일을 지나 보내야 하니까요.

조금 적적하더라도 술로 쓸어내리는 것도 괜찮잖아요.

독주가 목구멍을 화끈하게 휩쓸었다. 이제는 이 모든 게 익숙했다.

섣불리 익숙해져서는 안 될 것들이 서서히 익숙해졌다.


“이제는 졸립네요.”

샤를로프는 말끝을 흐리며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시간이 늦었다. 달빛이 스민 침실은 고즈넉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모든 게 느렸다.

이대로 다 멈춘다면 좋겠다고.

아, 이건 회피인가?

그런 마음으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는데, 밤이 유난히 길었다.

* * *

새벽녘의 황궁은 유독 조용했다.

샤를로프는 느지막하게 침대에서 깼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자 흐릿한 시야가 점차 또렷해졌다.

침대 옆이 비었다. 옆을 손으로 쓸자 아직은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샤를로프는 손아귀를 천천히 오므렸다. 침대시트에 깃든 온기가 손아귀에 잡히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 깨셨습니까?”

시녀장이 밖에서 기척을 냈다.


“들어가겠습니다.”

시녀장은 캐노피 너머로 아른거리는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검붉은 머리를 늘어트린 여인이 이불을 덮고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머리칼을 귓바퀴 뒤로 쓸어넘기고, 눈을 끔뻑거리는 모습이 오묘했다.

시녀장이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있자, 샤를로프가 고개를 돌렸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작정인가?”

“송, 송구합니다.”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해줘. 몸을 담가야겠어.”

샤를로프는 목욕물에 몸을 담가서 뻐근한 근육을 풀어주었다. 숙취로 지끈거리던 머리도 개운해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연무장으로 향하셨습니다. 지금이면 아침훈련을 끝내고 집무실로 갔을 시간이로군요.”

벤하민은 황제이기 전에 황궁에서 손꼽히는 기사였다.

황태자란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황태자 시절부터 생존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붙이던 성향은 지금도 여전했다.

이른 새벽부터 연무장에서 훈련에 임하고, 아침 정무로 총괄하는 건 벤하민의 하루일과였다.


“남들에게도 엄격하지만, 본인에게도 엄격한 분입니다. 보좌진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폐하를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샤를로프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답했다.


“목욕은 이쯤 해두고 채비를 도와줘.”

“네. 목욕가운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이 따라붙어서 몸에 묻은 물기를 닦고, 부지런히 몸단장을 시작했다.

시녀장이 손뼉을 치며 시녀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머리끈을 가져오너라. 리본끈으로 묶어서 늘어트리면 좋겠구나.”

그렇게 하루가 서서히 흘렀다.

그 시각.

황궁에 정보사가 찾아들었다. 정보사는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벤하민은 집무실 탁자에 느른하게 기댔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가 고개를 들자, 뱀 같은 눈매가 저절로 좁아졌다. 벤하민은 깃펜을 내려놓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보좌진은 그 느긋한 몸짓에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냐?”

“일전에 성문 앞에서 폐하를 주기적으로 찾는다는 노인이 있댔잖습니까?”

“아, 그 농부……. 그가 왜?”

“성문 앞에 또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낡고 초라한 행색에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번 더 찾아오면 기별을 넣으란 이야기하지 않았나?”

한 번 찾아온 사람이면 몰라도, 여러 번 온 사람이라면 까닭이 있다.


“보고 넣겠습니다. 그 노인이 자기 집으로 책사를 데려갔습니다.”

벤하민은 이건 또 뭔가 하는 얼굴로 눈매를 좁혔다.


“알았다. 일단은 대기하도록.”

벤하민은 집무실 밖을 내다봤다. 이른 아침부터 황궁은 분주했다.

.
.

곧, 전서구가 집무실 창문을 두들겼다.


“급보입니다.”

붉은색 끈이었다. 정보관에서 보낸 급보였다. 보좌진이 그 급보를 풀었다.

쪽지에는 실링 왁스로 밀봉하고, ‘1급’ 표시인 붉은 봉황을 새겨 넣었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쪽지를 펼친 벤하민은 한동안 말을 삼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찾아뵙고 전하겠다며 말을 짧게 일축했다. 보좌진이 소집됐다. 황궁에 은근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노인은 벌판에 버려진 시신을 보며 흐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어쩌려고…… 아이고.”

 
황후는 폐위됐어도 황실의 어른이었다. 황실에서 주검을 수습하는 게 맞았지만, 그 시절 황실은 이미 위계질서를 잃었다. 황실에서는 폐후의 주검을 수습도 않고 숲에 버렸다.


“황실이 어떡하려고. 어떻게 되려고.”

 
황후는 이렇게 잃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 늙은이가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십시오.”

 
노인은 황실 눈을 피해서 폐후를 수습했다.


“이 늙은이가 없는 사람이라서 이것밖에 못 해드립니다.”

 
폐후의 장례를 약식으로 치르고, 유골함을 사서 유해를 모셨다.

기일이 되면 기도를 드리고, 황가의 눈에서 그 유해를 숨겼다.

이 늙은이가 황궁에 해줄 거라고는 그게 다였다. 이 죽음을 조금이라도 기리는 것.


“어째서. 이런 시련을 이분께…….”

 
노인은 유해를 품고 꼭꼭 숨었다. 이 유해가 다시 황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언젠가 황실에서 지난 과오를 씻기를…….

이 유해는 아직 밖으로 꺼내 보여선 안 된다.

젊은 황제가 즉위했다. 선황과 친인척을 모두 죽여서 황위에 앉았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그 뒤로도, 노인은 꼭꼭 숨었다.


“황실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진혼제를 올린다는군.”

 
아……. 폐하, 지금에서야 폐하를 온전히 모실 수 있게 됐습니다. 노인이 밖으로 나온 건 진혼제가 끝난 뒤였다.


“황, 황제 폐하를 뵈려면 어떡해야 하오?”


“이 노인네가 미쳤나? 폐하께서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분인 줄 아오!”

 
노인은 황궁을 꾸준히 찾았다.


‘폐하를 뵈려면 어떡해야 하오? 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황제 폐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폐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부디, 폐하를……! 이 늙은이가 간청합니다.’


‘폐하! 이 늙은이를 만나주십시오! 폐하!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꼭 폐하께 그분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노인은 처음에는 황제를 직접 뵐 방법을 찾다가 힘들어지자, 황궁 성문 앞에서 직접 부탁했다.


“폐하, 폐하께, 제발……. 말씀을 올려주십시오.”

 
죽기 전에, 그 유해를 황궁으로 모셔다드려야 한다.

* * *

벤하민은 느릿하게 숨을 골랐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벤하민을 불렀다.


“밖에서 사람들이 곧 도착한다는군요. 급보가 방금 떴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신전에서도 유해를 살펴줄 신관이 파견됐습니다.”

하인들이 오후 느지막하게 전해온 소식에 분주해졌다.

‘폐후의 유해.’

젊은 황제의 어머니는 폐위되어 처형됐다. 시신을 거두지도 못하고 떠나보냈는데, 그 시절 유해를 누군가 돌보고 있었단다.

그렇다고, 노인의 말만 막연하게 믿기는 어려웠다. 이십 년간 당연히 유실됐다고 여겼던 유해였다.

모두가 젊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벤하민은 급보를 받은 뒤로 내내 침묵이었다.


“폐하.”

샤를로프가 벤하민을 불렀다.


“황제 폐하.”

벤하민이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목을 젖혔다.


“…….”

벤하민은 이야기하라며 샤를로프에게 눈짓하고 기다려주었다. 하인들 모두가 그런 그를 살폈다.

샤를로프는 숨을 골랐다. 벤하민도 슬슬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한다. 그래야, 하인들이 그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

샤를로프는 눈을 감고 입술을 열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곡조처럼 흘러나왔다.


“하인들이 기다립니다. 저들에게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폐하.”

“침묵은 금이다. 하인들은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주변을 정돈하라 이야기해두어라. 괜한 어수선한 꼴을 밖으로 보이지 말고, 입단속들 시켜놓고”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모두가 물러났다. 샤를로프는 그의 등을 다독였다. 뻣뻣한 손아귀로 그의 어깨를 감쌌다.


“선황후께서 돌아오시려는가 봅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황실에 닿으려는가 봅니다. 이 기다림이 얼마나 길었는지.

일곱 살이던 아이는 성년이 됐고, 황궁에서 내쫓기듯 죽을 뻔했던 폐태자는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아직은 몰라.”

황궁은 믿고 싶다고 선뜻 믿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냥.”

벤하민은 고요히 중얼거렸다.


“확인해야 할 뿐이야.”

벤하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었다.

시일이 너무 지났다. 마냥 믿기도 어려울 만큼.


“선황후께서 길을 잃지 않도록 마중 나가요.”

샤를로프는 그의 등을 천천히 밀었다.


‘전생에도 당신은 유해를 되찾았어요.’

그렇다고 전생 이야기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고요히 그의 곁을 지켰다.

샤를로프는 은은히 웃어 주었다.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하는 그를 위해서.


“진혼제 때 등불을 올려 죽은 이들의 길을 인도하던 걸 기억하시나요? 선황후께서도 자리를 오래 비웠어요. 그분께서 돌아오시는 길이 멀지 않도록,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가 한 걸음 더 나가서 기다려요.”

하인이 조심스럽게 찾아들었다.


“밖에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폐하.”

곧, 벤하민이 부름을 받고 내려갔다. 샤를로프도 그의 뒤를 따랐다. 하인들도 이들을 뒤따랐다.

발걸음은 고요했고, 몸짓 하나하나가 단정했다. 하인들은 모두 몸을 숙였다.

황제궁 입구에서 둘의 걸음도 멈췄다. 정보관 정보사들이 아래에 도열했다.


“정보관 정보사 전원,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계단 아래에 선 그는 끝끝내 침묵했다.


“…….”

벤하민은 유골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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