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무뎌지고.
(30/51)
30. 무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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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무뎌지고.
2023.06.13.
“마님…….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클로에는 자수를 놓던 손을 급하게 뗐다.
“이 천것아! 기척 좀 내고 다니거라!”
“죄, 죄송합니다.”
“그이가 왔어?”
하녀가 몸을 굽신대며 숙였다. 클로에는 바늘에 찔린 손가락을 애지중지 감쌌다. 하녀들이 약을 듬뿍 발라주었다.
병든 안주인이 죽으면서 그 위계가 무너졌던 튜텨가이지만, 이곳에 새로운 위계질서가 생겼다. 내연녀와 사생아가 쌓은 위계질서였다.
“그, 그런데 마님. 지금 가주님께서 약주를 하셔서……. 나중에 술기운이 깨거든 찾아뵙는 게 좋겠습니다.”
“또 술이라고? 어째서?”
밖이 어수선했다. 하녀들의 눈짓에 미약한 공포심이 실렸다. 클로에는 하녀들을 밀치고 밖으로 나섰다.
“그이는 어디 있느냐?”
“밖에, 밖에 계십니다.”
“말 더듬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거라!”
“그런데, 안 보시는 게 좋습니다. 마님! 마님!”
하녀가 다급하게 클로에를 잡던 때였다. 술기운에 흠뻑 젖은 표트르가 술병을 쥐고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하인들을 바닥에 패대기친 그는 술병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하인들이 급히 몸을 피했다.
“가주님 진정하십시오.”
“그 애는 어디 있느냐?”
표트르가 고개를 획획 돌렸다.
“샤를로프는 어디 있느냐!”
“아가씨께서는 이제 이 집에 없습니다.”
“아……. 그랬지. 이제는 없구나.”
표트르가 딸꾹질을 삼켰다.
“왜 이렇게 속이 쓰리냐?”
모녀는 눈앞에 있어도 거슬리고, 눈 밖에 있어도 거슬린다. 제 손에 있을 때는 버리지 못해 거슬렸다면, 남의 손에 있으니 또 배알이 꼴렸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표트르가 그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헨리에타가 작은 몸을 웅크리며 앞에 서 있었다. 어깨가 잘게 떨렸다. 쯧, 혀를 찬 그가 헨리에타의 어깨를 손으로 억눌렀다.
“그 천박한 버릇을 숨기라는 데도……. 너의 태도가 내 평판으로 이어진단 말이다.”
또 무시당한다. 죽은 아내가 그를 무시했듯, 제 딸아이가 그를 무시했듯.
표트르는 술병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챙―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하인들이 술병 파편을 피하며 굽신댔다.
“네 누나에게 무시 받을 짓 말아라. 쯧쯧! 제 엄마는 무릎까지 꿇고 빌고……. 그 애도 기생충처럼 지내놓고는……. 내가 모두 가졌다고 여겼는데, 그년도 내 딸이었지.”
이제는 황실 어른이 된 분께 과격한 말버릇이었다. 헨리에타는 목을 떨궜다. 이 집안은 이상하다. 이상해요, 어머니.
“도련님은 방으로 가십시오.”
집사가 하인들을 물리고 속삭였다.
“가주님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표트르가 비틀대며 점점 멀어졌다.
“쓸모없는 놈.”
헨리에타는 친모의 옷자락을 당겼다.
“어, 어머니…….”
“네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과격해진다. 이건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니, 아버지 말씀을 잘 듣고 정진하고 또 정진하거라.”
헨리에타는 제 어깨를 움켜쥔 손아귀에 고개를 떨구었다. 어머니. 저는 차라리 이 집으로 오기 전이 더 좋았습니다. 어머니와 둘이 살던 때가 좋았다고요.
“아버지가 또 무덤을 팠어요.”
어린 아들이 보기에도 제 아버지의 이상행동이 심해졌다.
짝―! 클로에가 헨리에타의 뺨을 거칠게 때렸다. 붉게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은 헨리에타는 끙끙 앓았다.
“입조심하거라.”
집사는 그 시선을 피했다.
클로에는 빈 무덤을 둘러봤다. 전 부인의 흔적이 저택에 남아서 계속 이들을 괴롭히는 것 같다. 죽었잖아. 네년은 죽어서 끝났잖아. 그러면 좀 꺼지란 말이다.
“재수 없긴.”
클로에는 집사에게 눈짓했다.
“묘비를 치우거라.”
“……마님”
“저 흙도 퍼서 버리거라. 불결하다.”
쿵쿵, 어둡고 눅진한 늪지대에 발을 디딘 것 같았다.
* * *
“폐하. 듣고 계십니까? 폐하?”
샤를로프는 듣고 있다며 손을 내저었다.
만찬장에는 식사가 마련됐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식탁에 올랐다. 시종들이 음식 접시를 부지런히 옮겼고, 뜨거운 열이 모락모락 올랐다.
“아랫것들을 모두 물리겠습니다.”
시종장이 시종들을 모두 챙겨 나갔다.
식당에는 황제 부부와 윈저가 귀빈이 자리했다. 황실에서 담백한 음식을 주식으로 먹는 만큼, 자극적인 향신료를 배제한 음식들이 나왔다.
아스터는 식당 문이 닫히는 걸 보며 이야기했다.
“나라 재정상황도 이제야 안정됐군요. 회복되기까지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습니다. 직속 보좌진이 보좌실에서 죽어 나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했습니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따라붙었는데, 아직도 바닥에서 허덕이면 어떡하나? 놈들 모두 관직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가야지.”
벤하민은 적나라한 욕설을 삼켰다. 내심 갑갑했는지 크라바트를 푸는 손짓이 매서웠다.
“그런데, 식사가 입맛에 안 맞나?”
샤를로프의 나이프가 접시를 긁었다.
“아니에요. 많이 먹었어요.”
“많이 먹기는. 음식이 좀처럼 줄지를 않잖아.”
벤하민이 접시에 있는 음식을 덜어서 포크로 집어주었다. 황궁 예법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제가 먹을게요.”
“한세월 음식만 보고 있으려고.”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아스터가 샤를로프의 접시를 흘끔 내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양송이……. 큼큼, 양송이를 집어서. 큼큼.”
벤하민은 포크로 양송이버섯도 한 점 집었다. 칼집을 낸 양송이버섯은 다른 소스 없이 담백하게 굽기만 했다. 한 입 받아먹자, 양송이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아스터가 씩 웃다가 모른 척 미소를 감췄다.
“우리 집안이 모두 입맛이 담백합니다. 소스도 담백하게 본연의 맛을 살린 것들을 좋아하고요. 간도 삼삼하고, 자극적인 건 특별히 즐기지 않습니다.”
“주방장에게 언질을 줘놓지.”
“양송이 식감이 고기처럼 부드럽고 쫄깃하군요. 찢어둔 닭고기와 같이 먹으면 좋겠습니다.”
아스터는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이야기했다.
“그건 그렇고요, 폐하.”
아스터가 벤하민을 보며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황궁 성문 앞이 어수선하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성문 앞이면……. 아, 그건가?”
벤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오늘 아침에 보고 받았다. 며칠 전부터 누가 성문 앞에서 나를 계속 찾는다더군. 다음에 찾아오면 내게 다시 보고하라 해뒀어.”
“며칠 됐는가 보군요.”
“사흘쯤 됐나? 매일 찾아온다면 그 이유가 뭔지 제대로 묻기라도 해야지, 행색만 보고 내쫓는 머저리들 때문에 이유도 못 들었군.”
샤를로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벌써 그 시기인가?’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내려다보며 양송이버섯을 챙겨주었다.
“다 먹었나?”
“많이 먹었어요.”
“고작 앞접시에 있는 그것만 먹어놓고?”
아스터가 훈제 닭고기를 뜯어서 샤를로프의 접시에 놓았다.
“많이 먹어야 힘도 쓰는 법입니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좀. 코제트도 입이 짧아서 우리가 유년시절에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곤 했습니다.”
아스터는 아스파라거스를 샤를로프의 접시에 올려놓고 씩 웃었다.
“많이 드십시오.”
식사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샤를로프는 윈저가 가족들을 배웅해줬다. 하인들은 모두 물렸다. 누군가 어깨에 무거운 숄을 덮어주었다. 레안드로가 주름진 손으로 어깨를 다독였다. 그의 묵직한 시선이 뒤통수에 닿았다.
“제가 폐하의 외조부로서 잠시 말을 편히 놓아도 되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시고, 편히 놓으셔도 돼요.”
레안드로가 샤를로프의 팔을 감쌌다.
“바람이 차갑다.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고.”
“네. 걱정 마셔요.”
“혼인한 아이 표정이 어두우면 가족들 발길이 떨어지겠느냐?”
샤를로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 들으십시오. 제가 폐하를 황실의 어른으로 모실 날도 있고, 아이처럼 여기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들 지금 우리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
중심을 잡으십시오. 그가 누누이 이야기했듯.
“잘 지내십시오.”
굳은살 박인 손아귀가 거칠었다. 할아버지께서 보내온 험난한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 * *
“보통은 합방날을 따로 신전에서 받아오는…….”
샤를로프는 말끝을 흐렸다.
“빗질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샤를로프는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은방울꽃을 머리에 꽂고, 침의를 입혔다. 침의 자락이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목선을 가늘게 드러내고, 머리칼은 뒤로 쓸어넘겼다. 골반 아래에서 살랑이는 긴 머리칼은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독주를 가져다줘.”
“네?”
“폐하께서 잠들기 전에 독주를 찾으시더구나. 아무거나 병째로 하나만 가져다 둬.”
시녀장이 눈치껏 황제가 자주 먹던 독주를 가져다 놨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샤를로프가 탁자의 촛불을 켜는데, 촛불 옆의 독주가 보였다. 샤를로프는 체리를 입에 넣고 병마개를 땄다. 쌉싸름한 술내음이 풍겼다.
똑똑-.
가운을 입은 벤하민이 침실 문을 두들겼다.
“내가 독주를 찾았다고?”
“황후가 찾기보다는 황제가 찾는 게 모양새가 좋으니까요. 의외로 독한 술을 자주 드시나 봐요. 시녀장이 익숙하게 가져다주네요.”
벤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먹었지.”
“…….”
“그렇다고 너처럼 병째로 마시는 건 아니었어, 샤를.”
샤를로프는 독주를 병째로 입안에 털어넣었다.
“고상한 사람인 척 구는 게 좀 어렵네요.”
포도주는 은은한 과일주라면, 이건 그냥 술이었다.
아주 지독했다. 식도를 따라서 독주가 흐르자,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독한데 자주 먹었어요?”
“그랬나? 지금 네가 대수롭지 않듯, 나 또한 그랬겠지.”
“당신이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요.”
샤를로프는 혀로 독주를 굴렸다. 꿀꺽, 삼키자 독한 주향이 코끝을 찔렀다.
“역시, 윈저가와는 술자리에서 척지지 말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로군.”
저 독주를 꿀꺽꿀꺽 마신다. 사내들이 마셔도 단 몇 잔이면, 잔뜩 취해서 고부라지는 술이었다.
윈저가에서는 질색하며 뜯어말리겠지만, 샤를로프는 유유히 술병을 흔들며 벤하민에게 내밀었다.
“너무 뚫어지라 보지는 말고요.”
샤를로프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취기가 서서히 들었다. 그녀가 머리를 헝클이자, 비누향이 은은히 퍼졌다.
“지난 시간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특별히 힘들지라도 겉으로 내색한다고 될 자리도 아니라서.”
“피곤한 자리에 오르셨어요. 이 외의 선택지가 없었다지만.”
벤하민이 술을 넘겨받아서 마셨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독주였다.
“그 선택지가 없었으니 이 자리에 올랐지.”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달랐을까요?”
“글쎄. 특별히 달랐을 것 같지도 않아.”
벤하민은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제법 무뎌졌지만, 요즘은 속이 복잡하군.”
“무슨 일이 있었어요?”
벤하민이 독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한 모금 두 모금 늘어났다.
“글쎄. 무슨 일은 없었고.”
벤하민은 말끝을 흐리며 술병을 흔들었다. 다 마셨는지 벌써 빈 병이었다. 그는 찬장에서 술병을 하나 더 꺼냈다. 이번에는 은색 호리병에 담긴 술이었다. 그가 마개를 따자 주향이 스멀스멀 올랐다.
“무언가, 속이 답답할 뿐이다.”
벤하민은 눈을 고요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