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다 관두고 싶다는 듯. (29/51)


#29. 다 관두고 싶다는 듯.
2023.06.09.



“앞으로 황후 폐하를 보좌할 그림자들입니다. 폐하께서 어딜 가든, 이들 모두가 함께할 겁니다.”

정보관 정보사들이었다. 이들은 전생에도 벤하민이 직접 휘두르던 칼들로, 그 소속을 옮겨 샤를로프 곁에 자리했다.


‘너무 날카로운 칼을 내게 넘겨 주었구나.’

군청색 제복을 입은 이들이었다. 표식이라고는 어깨에 초승달을 새겨놓은 게 다였는데, 달은 제국의 황후를 뜻했고, 저들이 황후의 직속이라는 소속을 말해주었다.


“저들은 기척이 없습니다. 근접호위를 맡지만, 밖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미리 유념해 주십시오.”

저들을 그림자라 부르는 이유 또한 기척이 없어서였다.


“내게 이 사람들이 붙는구나.”

샤를로프는 턱을 톡톡 두들겼다.


‘황태자의 칼이 되어서 중앙장로와 주요대신들을 숙청했던 이들인데…….’

등 뒤를 맡기기에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이들이지만, 더없이 오싹한 이들이기도 했다.


“어…….”

샤를로프는 걸음을 느릿하게 옮겼다.


“다 모르는 사람이라서 어색할까 걱정했지만.”

느린 걸음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래도 익숙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더 있구나.”

카타리나가 저들 속에 섞여 있었다.


“가족들이 보냈니?”

“아닙니다. 제 의지였습니다.”

카타리나가 경건히 몸을 숙였다.


“폐하께서 배려해 주셔서 여기로 배정받았습니다.”

전생에는 벤하민 곁에 있던 이들이지만, 지금은 샤를로프 곁을 지켰다.


“날이 좋구나. 산책이라도 하는 게 좋겠어.”

“네. 폐하.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샤를로프는 걸음을 딛고 밖으로 나섰다. 걸음은 묵직하면서도 가벼웠다.

이 표현 외에는 그 걸음을 뜻할 길이 없다.

발끝이 내딛는 걸음은 가볍지만, 그 걸음이 가지는 무게는 무겁도록.

시녀장은 그 걸음에 담긴 무게를 보며 알았다.


‘폐하께서 괜히 이분을 황궁에 들이신 게 아니로군.’

시녀장이 공손히 제안했다.


“오늘은 황궁 안을 둘러보는 게 어떠십니까? 그간은 황궁 안에서도 이동제약이 많았잖습니까?”

황제궁은 황제의 허락 없이 함부로 밟아선 안 될 영역이라고, 황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황후로 예정됐어도, 혼인 전까지는 함부로 밟지 못할 영역이 많았다.


“황궁 안이 넓습니다. 초행길에 길을 잃는 이들도 많고요. 나이든 중앙장로들께서는 길을 잃고 헤매는 일도 많습니다.”

“그럼 조용히 걷고 싶은데, 일행들을 최소화해주겠어?”

시녀장이 몸을 숙였다.


“다른 아이들을 물리고, 저희만 거리를 두고 따라가겠습니다.”

기척이 하나둘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샤를로프는 홀로 우두커니 서서 저들의 기척이 모두 멀어지길 기다렸다.


‘내 시야에 안 보인다면 없는 사람이다.’

샤를로프는 황궁을 천천히 거닐었다. 드레스 밑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며칠 전 비가 내렸다고, 바닥이 아직도 질펀했다.

이슬이 맺힌 풀잎이 바람에 사부작댔다.

황궁은 넓고 광활했다. 그 건축물들은 거대했지만 띄엄띄엄 거리를 뒀고,

그 내부도 사람이 줄었다고 고요했다.

어쩌면, 황실에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모두가 숨죽이는 것도 같고.


‘너무 넓구나.’

샤를로프는 눈을 반쯤 감고,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황궁 서쪽으로는 선대 선황과 황태후의 초상화를 보관해 놓았으며, 그 뒤쪽으로는 선조의 유해를 모셔둔 영면궁으로 이어졌다.

황태후와 황비들, 여러 황자들이 머무는 궁들도 자리했다. 그런데 지금은 저들 대부분이 비었다.


“당신도 이 꼴을 보고 싶던 건 아니겠지만.”

그 꼴을 놔두고 보기는 더더욱 거슬렸겠고.


“당신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네요.”

“내 흔적을 왜 여기서 찾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시녀들의 속닥거림이 이어졌다.


“폐하께서 후궁을 들이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았을 때 느꼈지만, 황제 폐하의 총애가 느껴지는군요.”

“……걸음걸이도 고요하고, 눈짓이며 손짓이며 모든 게 고요한 분인데, 시선을 잡아끄는군요.”

시녀장이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조용히 하거라.’

이 거리라고 황제 폐하께서 듣지 못할 리 없다.


“아랫것들에게 침묵은 금이다. 함부로 그 혀를 놀리다간 혓바닥이 잘려나갈 것이라 내가 경고했는데도 누가 혀를 길게 놀리느냐?”

시녀들이 속닥거림을 멈췄다. 그 시선은 감히 함부로 봐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뒷모습을 좇았다.



“눈에 눈썹이 들어갔잖아. 따갑지 않나?”

샤를로프는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답했다.


“저들 앞에서 내색하기 싫어서 놔뒀어요.”

“너는 의외의 곳에서 고집을 부려. 눈 깜빡거리지 말고.”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찬바람을 맞았다고 뺨이 서서히 창백하게 질렸다.

아니다. 샤를로프는 처음부터 피부가 창백한 편이었다. 흰 피부는 핏줄이 비칠 만큼 얇고 투명했다.


“읏!”

샤를로프가 약하게 신음하자 벤하민이 작게 웃었다.


“속눈썹 빼냈어. 아팠나?”

“아니요. 괜찮아요.”

“샤를은 눈이 민감하구나.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아.”

눈꺼풀을 엄지로 쓴 그가 눈매가 촉촉해지자 눈물샘을 닦아냈다.


“내가 아무 짓도 안 하고, 몹쓸 놈이 되어버린 것 같아. 너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

샤를로프가 고개를 들자 벤하민은 침묵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요?”

“선황 때 소실된 서적들을 파악 중이라서 문서고에 다녀오는 길이었어. 문서고 서기가 죽어나가더군. 서적은 불에 타고, 문화재도 소실된 게 여러 개라서 일일이 파악하는 데에도 시일이 오래 걸리고.”

벤하민이 마음에 안 든다며 혀를 찼다. 다 망해가는 나라도 나라이다. 더러운 아귀들이 제 이권을 찾는다며 아귀다툼을 벌일 때라도, 벤하민은 놈들의 목을 일일이 숙청하며 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쯧쯧. 쓸모없는 놈들 더미에서 그나마 쓸모있는 놈들을 끄집어내는데, 저런 놈들을 데려다 놓고 이 나라 명줄을 용케도 유지해왔구나.”

벤하민은 말을 끝맺고 고개를 기울였다.


“오후에는 가족들이 찾아오기로 했는데, 막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구나.”

“기뻐요. 그만큼 마음 써주는데 기쁘지 않을 리 있나요.”

샤를로프는 목을 뒤로 뺐다.


“내가 꼭 잡아먹기라도 할 거라는 듯 보고 있구나.”

“…….”

“아무리 나라도 네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상처받는다. 요즘 너는 내 앞에서만 유독 도망치고 싶다는 기색을 보이잖아.”

너는 남들 앞에서는 잘 숨기는 걸, 유독 내 앞에서만 숨기지 못해. 네가 뭘 숨기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허술해지는 때가 있다.


‘다 관두고 싶다는 듯.’

너는 찌르면 무언가 나올 것 같다.


“내 무엇이 너를 자극했나?”

“…….”

“샤를. 샤를로프.”

“네. 폐하.”

“표정을 좀 풀어. 황궁에서는 동요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안 돼.”

벤하민은 사람들의 세세한 표정 변화에 민감하다.


“이 세세한 변화들이 틈을 만들어낸댔잖아.”

견고한 벽은 일말의 틈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괜한 걱정이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 걱정은 접어두세요.”

“나는 네 모든 것들에 반응해. 이걸 잊지 마.”

곧, 시종장이 난처하게 찾아왔다.


“폐하. 정보관에서 사람이 찾아들었습니다. 집무실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나중에 다시 오지. 밖에 오래 있지 말고.”

벤하민이 그렇게 떠났다. 샤를로프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봤다. 점점 더 멀어지는데, 그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우리도 이만…….”

샤를로프가 막 덧붙이려던 때였다.


“폐, 폐하 윈저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저 멀리서 기척이 다가선다.

모든 건 그렇다.

틈은 예고도 없이 벌어진다.

* * *



“결혼식을 막 올린 분께서 표정이 지금처럼 어두우면, 그걸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떡합니까?”

레안드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그의 몸짓에는 정제된 기품이 깃들었다. 맑고 깨끗했다. 불순물을 모두 걸러낸 듯, 맑기 맑은 찻물을 보는 것 같았다.


“혼인 뒤에 심신이 고단한 건 이해합니다. 그런 기분에 오래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아랫것들은 윗사람들의 모든 것에 예민합니다.”

찻물에 떠다니는 꽃잎이 꼭 파도에 휩쓸리듯 파르르 떨렸다. 샤를로프는 표정을 말끔히 갈무리했다.


“일찍 오셨어요.”

“아,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습니다. 어제오늘 날이 유난히 춥더군요. 하인들도 저택의 온열장치를 살피느라 분주했습니다.”

눈발이 날린다. 한 해의 끝자락을 앞뒀다. 냉혹한 겨울 끝자락에서 손아귀 열기가 금방 식었다. 시녀장이 숄을 덮어주었다. 숄에 눈꽃이 닿자 금방 녹아서 스며들었다.


‘무언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랄까.’

이 느낌은 어디서 왔던가? 막연하게 와닿는 게 아니다. 아주 느릿하게 서서히 스며든 이질감이었다.


“세자르 외삼촌께서는요?”

“가문의 영지로 내려갔습니다. 아무래도, 소공작께서 직접 관리를 하던 중이었는데 지난 오 년 간 관리자의 빈자리가 길었잖습니까?”

“아, 영지를 관리해주시는군요.”

“전서구를 자주 보낸댔으니 소식이 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도 이미 머물러서 알겠지만, 윈저는 조용한 영지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으니 걱정 말라는 뜻이었다. 존대로 이어지는 말들은 포근했다. 분명히 포근했는데도…….


‘이전에는 없던 거리감이 있구나.’

저들의 온기에 익숙해지면서 고요한 삶에도 무뎌졌다.


“높은 신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이전에는 마냥 가깝기만 하던 이들이 멀어지고, 멀던 이들이 가까워지지요. 폐하의 생모께서도 살아계셨다면, 이 혼담을 놓고 복잡미묘한 마음을 내비쳤을지도 모릅니다.”

“네.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지는 않았겠죠.”

“코제트라면……. 네. 그 아이라면 그랬겠지요. 그런 아이니까, 폐하의 혼인을 또 응원했을 테고요. 복잡한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뒤이은 말들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을 샤를로프에게 쥐여주듯 단호했다.


“아랫것들의 위계질서가 무너졌던 만큼, 황궁의 기강이 똑바로 서야 합니다. 아귀다툼에 악귀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서로를 물어뜯더라도, 황후 폐하께서 놈들 목덜미에 칼날을 꽂을지라도……. 부디, 중심에서 벗어나지 말고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가 해주는 이야기가 무얼 뜻하는지 잘 안다. 할아버지께서 지금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지라 이야기한다.


“튜텨가에서 곧 하녀들을 보낼 겁니다. 저들은 망나니입니다. 미친 망나니는 잃을 게 없으면 들개가 됩니다. 목줄을 단단히 옥죄고 내리누르십시오. 그게 시작입니다.”

레안드로는 튜텨가를 옥죌 길을 알려주었다.


“황실은 명분입니다. 황궁이 중심을 잃는다면, 위계질서는 종이로 쌓은 탑처럼 무너집니다. 그 명분을 먼저 쌓으십시오. 그리고 목을 치든, 목줄을 매든 하십시오.”

길 잃은 칼날이 손아귀를 할퀴기 전에 방향을 다잡아라.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손에 쥔 힘에 휘둘리다간 스스로를 잃는다.


“잊지 마십시오.”

레안드로가 말끝을 흐렸다.


“폐하께서 어디에 올라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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