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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탈선 (28/51)


#28. 탈선
2023.06.06.


두 사람은 닮았다. 그래서 서로에게 이끌렸다.

둘 다 무언가를 잃었고. 지독한 상실감을 겪었다.

그리고 지금 이 두 사람이 같이 서 있다.


‘걸음은 단정하게.’

빈틈이 없도록.


‘가벼우면서도 무겁도록.’

그 걸음은 이미 내디뎠다.

시야가 넓어진다. 모든 게 눈에 담겼다. 샤를로프는 흰 꽃잎을 지르밟았다.

한걸음 걸어가면, 그만큼 버림받았던 과거에서 멀어진다.

버진로드를 따라서 행진이 이어졌다. 여러 시선들이 따라붙었고, 여러 말들이 뒤따랐다.


“이 혼인을 예상했습니까?”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그 시절에는 우리도 꾸역꾸역 버티는 게 고작이었잖습니까? 단 몇 년 만에 그 사람들이 모두 죽어나가리라고는…….”

샤를로프는 그런 이야기들을 흘려보냈다.

선황이 죽고 그 자리를 넘겨받은 젊은 황제.

늙은 선황을 죽인 게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실제로 선황이 죽기 전 황태자가 다녀갔다는 말들도 이어졌다.

그 진실은 저편에 묻어뒀다.

샤를로프는 베일을 가만히 내렸다.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뭔가……. 지독하게도 닮은 두 사람이군요.”

 

* * *



“몸이 편찮으신 곳은 없습니까?”

시녀장이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합방을 앞두고 의례의식으로 여쭙는 이야기니 편히 답해주십시오.”

“괜찮다.”

“목욕시중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은 머리를 깊게 숙였다.


“향유를 가져오너라.”

시녀들이 샤를로프를 목욕물에 담그고 물을 살며시 끼얹었다.

뜨거운 목욕물에 향유를 듬뿍 풀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꽃내음에 긴장이 이완됐다.


“황후 폐하 몸단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목욕 뒤에는 침의로 갈아입었다. 흰 침의를 입히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저들이 도와주는 대로 침의에 팔을 꿰고, 리본을 허리에 둘렀다.

검붉은 머리는 풀어서 골반 아래까지 빗어 내렸고, 침의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만져주었다.


“캐노피를 내려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은 책무를 끝내두고 떠났다.

샤를로프는 어깨를 만지작대며 침대 한쪽에 기댔다.

침대는 캐노피로 가려놓고, 캐노피 너머로는 잔상만 흐릿하게 비쳤다.

침대 맡 탁자에는 시녀들이 포도주와 과일을 내놓았다.

곧, 침실 문이 열렸다.

묵직한 걸음이 울렸다. 샤를로프는 발걸음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뚜벅뚜벅.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가 걸음을 딛고 섰다.


“선황이 황궁 법도를 모두 짓밟아두어서 괜한 수고스러움만 더했어.”

벤하민이 캐노피를 들추었다.


“오래 기다렸나?”

벤하민은 가운만 입고 있었다. 허리에 끈 하나만 둘러매고, 느슨하게 걸친 가운은 허술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허리끈이 풀릴 듯 말듯 점점 느슨해졌다.

젖은 머리칼이 물기를 가득 머금고 가라앉았다. 지금 그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짐승 같았다.


“조금도 긴장한 얼굴이 아니구나.”

그녀가 뺨을 더듬거리자, 벤하민이 작게 웃었다. 콧등을 가볍게 두들기는 손짓이 장난스러웠다.


“우리가 뭘 하려는지 알고?”

“네. 알아요.”

“거짓말은 옳지 못해. 부부 사이에 뭘 하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잖아.”

그의 그림자는 뭐든 집어삼킬 기세로 거대해졌다. 아득하게 먹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존재만으로도 어딘가 스산한 면이 있었다.


“손을 잡겠나?”

벤하민이 손을 뻗었다.


“이리로 와.”

그가 샤를로프의 손을 맞잡고 그녀를 눕혔다.

샤를로프가 손끝을 꼼지락거리는데, 그의 시선이 작게 꿈틀거리는 손짓에 닿았다.


“부부가 뭔지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는구나, 샤를.”

“예법 교육받을 때 같이 배워요.”

“뭘 배웠어?”

“……짓궂게 그만 굴어요.”

샤를로프는 이불보를 끌어올려 제 몸을 가렸다.

그의 시선이 따라붙자 어딘가 불편해졌다.

전생에도 아버지 등에 떠밀려 혼인을 맺었지만 그뿐이었다.

두 손을 맞잡은 적도, 같은 침대에 누운 적도 없다.

샤를로프는 물건이었고, 튜텨가에서 값을 치르고 판 상품이었을 뿐이다.


‘이건…….’

샤를로프가 시선을 피하자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마치, 시선은 그만 피하라는 듯 독촉하는 것 같았다.


 
벤하민에게서는 새벽녘의 건조한 풀잎 향이 난다.

겨울의 마른나무와, 난롯불의 장작에서 풍기는 그런 씁쓸한 기운들.


“기분 나쁘다면 이야기해줘.”

그런 것들이 벤하민에게 깃들었다.


“아니에요. 기분 나쁜 건 아니지만…….”

샤를로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이 그가 스몄다.

이건 해롭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해롭다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이 낯선 기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것 같다.

벤하민이 몸을 바짝 숙이며 샤를로프에게 바짝 붙었다.

그가 샤를로프를 샅샅이 훑었다. 짧은 머리칼이 뺨을 간질거렸다.


“얼어붙었구나.”

그의 입김이 귓불에 닿고 흩어졌다.


“잠깐만…….”

샤를로프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던 때였다.


“예전에는 기분 탓이리라 여겼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

샤를로프는 두 손을 뻗은 그대로 굳었다. 단조롭기만 하던 표정에 실금이 갔다. 검붉은 머리칼은 붉은빛보다는 검은빛을 더 선명하게 띠고, 낯빛은 희고 창백했다. 그렇다고 아파 보이는 건 아니었다.


“네 눈은 어딘가 멀리…….”

아주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곧 죽기라도 할 사람처럼.”

“…….”

“서서히 메말라가잖아.”

샤를로프는 그의 눈을 피했다.


“지금은 내 눈을 피하고.”

그가 피하기 힘들게 거리를 점점 좁혀왔다.


“곧 죽기라도 한 것 같은 네 표정은 설명이 안 돼. 우리는 닮았지만 달라. 뭐가 다른 줄 아나? 너는 실제로 한 번 죽었던 사람 같거든. 곧 죽을 사람이 아니라, 한 번 죽고서 여기에 홀로 서 있는 사람 말이야.”

머리가 몽롱해진다. 사위가 고요해지고. 아득한 비명이 들려온다.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이건 전생과 현생의 끈이었다.


“고독하고 쓸쓸해. 적막하고 위태롭지. 무덤 앞에 서 있는 네 모습은……. 삶의 끈을 이미 놓았던 사람처럼 삭막하기 그지없어. 너는 아파하면서도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삼키는 게 습관이잖아. 또……. 무덤 앞에서만 보이는 표정이 있어.”

죽은 이들에게 보내는 애도.

그건 친모에게만 보내는 애도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애도와도 같았다.


“……도망칠 틈도 안 주고 캐묻는군요.”

샤를로프는 다시 또 그의 눈을 피했다.


“그전까지도 도망칠 틈은 열어두었어. 그 거리를 좁힌 게 샤를로프 너였지.”

벤하민이 몸을 숙여서 속삭였다.


“나를 피하지 마. 샤를, 네가 여기서 내 눈을 피하는 건, 스스로 목덜미를 내어주는 거야. 누구에게라도 네 목덜미를 보여선 안 돼. 너는 내 먹잇감이 아니잖아. 그러면, 너 스스로 약점이 될 곳을 가려.”

벤하민이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속삭였다.


“어렵나?”

“…….”

“황궁에서 약점이 될 걸 함부로 보이지 말라는 뜻이었어.”

네가 무방비한 모습들을 자주 보였어도 황궁에서는 안 된다.


“네가 약점을 보인다면, 그걸 가장 처음으로 파고드는 건 내가 될 거고.”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꼈다.


“내가 파고드는 건 네게 피곤한 일이 될지도 몰라.”

샤를로프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숨이 파르르 떨렸다.


“숨기려거든 철저히 숨겨. 내가 직접 파고들 일이 없도록.”

처음에는 개죽음을 피하자는 마음에서 튜텨가를 떠났다.

튜텨가를 떠나온 것도 충동적이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던 삶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미래만 피하자는 마음이었다.


‘아, 미련이 없다고 여겼는데 미련이 남았구나.’

어머니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어머니 죽음이 개죽임이 되도록 놔두기 싫었고.’

저들이 내게 미약한 죄책감이라도 품길 바랐다.


“너는 이번 생에 미련이 없는 듯 보이면서도, 아직은 미련이 남은 것도 같고. 너는 어려워. 샤를.”

샤를로프는 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여기서 내 역린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나도 내 삶이 평안하길 바라요. 미련이 없다면 거짓이겠죠. 지금 나는 예전과 달리 많은 걸 가졌잖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전생의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아파요, 나도.’

저 말은 당신이 듣지 못하도록 속으로 삼켰다.


“내가 당신을 택한 게…….”

“응.”

“족쇄가 되어버린 것도 같네요.”

샤를로프는 파르르 떨리는 숨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숨이 점점 급해지는구나.”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입을 막았다. 두꺼운 손이 입술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숨을 잠시만 참고.”

“…….”

“이제 천천히 내뱉어.”

샤를로프는 주먹을 긁어 쥐었다.


“주먹에 힘은 풀고 곧 때리기라도 할 것 같잖아.”

샤를로프는 뒤늦게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천천히 몸에서 힘이 풀렸다.


“합궁은 나중으로 미룰게.”

“…….”

“지금 내가 너를 품는 건 너를 망치는 길 같으니까.”

벤하민은 왠지 모를 예감이 들었다.


“나는 너를 망치고 싶지 않아, 샤를.”

 

* * *

샤를로프는 잠에서 깼다. 새벽녘의 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너무 이른 시간에 깼나.

이불 아래에 몸을 숨기는데, 검붉은 머리가 엉켰다.


‘거슬려.’

너무 길다.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머리칼 끝이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렸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고개를 드는데, 시선이 따라붙었다.


“깼나?”

잠기운에 아직도 시야가 흐릿했다.


“새벽녘이다. 더 자도 돼.”

“밖에서 기다리는 기척이 많아요. 예법이란 거추장스럽지만 그만큼 황궁과 떼어놓기 힘든 영역이에요.”

벤하민은 이해한다는 듯 단도를 꺼냈다. 팔뚝 뒤쪽을 약하게 벤 그가 단도를 다시 챙겨 넣었다.


“침대가 깨끗하면 뒤이어 나올 이야기들이 많은지라. 또. 손바닥은 눈에 띄니까.”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오후에는 윈저가에서 가족들이 찾아들기로 했으니, 나중에 보도록 해.”

샤를로프는 홀로 그러고 앉아있었다.

잠기운이 어느 정도는 가실 때까지.

샤를로프는 고개를 들고 설렁줄을 당겼다.

-달칵

침실 문이 열렸다.


“폐하. 베키입니다. 들겠습니다.”

샤를로프는 눈만 돌려 베키를 내려다봤다. 국혼을 올리면서 윈저가에서 따라왔던 아이였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날이 좋구나.”

샤를로프는 베키에게 몸을 맡기고 치장했다.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흰 레이스를 덧대고, 거기에 희고 붉은 장미를 수놓았다.

어깨는 트고 허리 아래로는 풍성하게 드레스를 부풀렸다. 시녀들이 진녹색 드레스에 리본을 덧대어 단아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황궁이 지난 혼란으로 기강이 많이 무너졌었습니다. 이제야 황후 폐하를 모시게 됐으니 큰 영광입니다.”

샤를로프는 곁에서 속삭대는 말들을 흘려 넘겼다.


“밖에 나와보셔야겠습니다. 바깥에…….”

그리고 뒤이은 이야기는 흘려들어선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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