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자기혐오. (27/51)


#27. 자기혐오.
2023.06.02.



 


“샤를로프가 우리 품을 떠난다는 건 알았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군요.”

아스터는 황궁 너머를 눈짓하며 고요히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같이 돌아가려고 왔잖습니까?”

“그랬던가…….”

“샤를로프를 가장 걱정한 게 아버지 아닙니까?”

레안드로는 상념에 잠긴 듯 한동안 마차 창밖만 물끄러미 내다봤다. 가로수가 빠르게 지나가고, 황궁은 점점 멀어졌다.


“저 아이를 우리 품에 두겠다는 건 우리만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게 왜 욕심이겠습니까?”

“밤잠을 매번 설치던 아이다. 아침이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고. 날이 밝으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히 제 표정을 숨기는 아이였어.”

샤를로프는 홀로 잠들면 악몽이라도 꾸듯 앓는 날이 잦다. 저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적어도, 폐하 곁에서는 저 스스로를 숨기진 않더구나.”

레안드로는 두 눈을 감았다. 후련하면서도 묵직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밖에서는 비가 툭툭대며 내렸다.


“내가 죽거든 코제트에게 해줄 이야기가 지금에서야 몇 마디 생겼다.”

 

* * *

시녀장이 돌아왔다.


“가족들은?”

“모두 떠났습니다.”

샤를로프는 은은히 미소 지었다. 가족들이 모두 떠나고, 샤를로프는 황제궁에 머물렀다.


“지금 막 성문을 벗어나셨겠군요.”

밖에서는 비가 한창 내렸다.


“비가 내립니다. 자리를 안으로 옮길까요?”

“됐어. 지금은 이대로 있을게.”

빗소리가 듣기 좋다. 톡톡. 토도독. 처마 밑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궁은 동궁과 서궁을 나눠놓고, 이 사이를 잇는 통로에 화단을 조성했다.

샤를로프는 그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화단에 빗물이 떨어지자, 꽃잎이 파르르 떨었다. 꽃잎이 춥다는 듯 칭얼거리는 것 같았다.

샤를로프는 밖을 내다보며 비가 멎길 기다렸다.

빗물받이에 고인 빗물이 통로를 따라서 흘렀다.

샤를로프가 차양 밖으로 팔을 뻗자, 빗물이 손아귀에 고였다.

톡톡톡.

규칙적이던 빗소리도 어느덧 매섭게 쏟아졌다.

돔 천장 아래로 마른 나뭇잎이 떨어졌다. 통로 밖에 심어둔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었다.


“오늘은 날이 춥습니다.”

시녀장이 샤를로프를 한 번 더 불렀다.


“겉옷이라도 더 겹쳐 입는 게 어떠십니까?”

“이대로 잠시만 있을게. 잠시면 돼.”

시녀장은 난처하게 발을 굴렀다. 황제 폐하께서 영애를 잘 살피라 이야기했는데…….


“비 맞는 걸 좋아하십니까?”

“아마도. 좋아했던 것 같아.”

“그럼, 우산을 가지고 올까요? 비에 젖지 않는 겉옷도 있습니다. 따뜻하게 입고 걷는 건 어떤가요?”

샤를로프는 느릿하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괜찮다는 데도…….”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시녀장은 이미 황제 폐하께 전해 들었다. 저 괜찮다는 말은 괜찮지 않다는 거니까, 저걸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시녀장이 급히 겉옷과 우산을 챙기러 떠났다. 샤를로프는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폐하께서 따로 명하신 게 있니?”

“저, 저희는 잘……. 그저 잘 살피라 명하셨습니다.”

시녀들끼리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은 우산을 쓰고 잠시 걷는 것도 좋겠어.”

샤를로프는 그렇게만 답했다. 화단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여린 꽃잎은 듯 빗물 아래서 덜덜 떨었다.

빗물이 흙에 스며들었고, 화단 흙이 질펀해졌다.

그러길 얼마.

통로에 튄 빗물이 드레스에 천천히 스며들던 때였다.


“네가 이러니 조금도 눈을 떼기가 힘들잖아.”

샤를로프는 익숙한 목소리에 이끌리듯 그를 찾아냈다. 통로 저편에서 걸어 나오던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감기라도 걸리려고, 이 꼴로 여기 있었나? 네가 결혼식 날 앓아누울 작정이로구나. 응?”

“과보호는 그쯤 해두세요. 폐하께서 그러면, 아랫것들까지 발을 동동 구르잖아요.”

벤하민의 시선이 시녀들에게 닿았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됐다. 그녀가 고집부렸을 게 뻔히 보이는구나.”

곧 시녀장이 겉옷과 우산을 챙겨 달려왔다.


“폐, 폐하 납셨습니까!”

“겉옷부터 줘라.”

“여기 있습니다.”

벤하민이 겉옷을 받아서 샤를로프에게 입혔다. 겉옷에 팔을 꿰고 우산을 넘겨받았다.


“뒤는 따르지 마라.”

벤하민은 그렇게 명하고 밖으로 나섰다. 샤를로프는 그 곁을 따랐다.

우산은 혼자서 쓰기에 적절했지만, 둘이서 쓰기에는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그날도 빗속에 홀로 서 있었던가?”

“제가 그랬던 적이 있나요?”

“미친 흑곰이 사냥터 밖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던 날, 네가 홀로 빗속에 서 있다가 흑곰의 먹잇감이 될 뻔했잖아. 흑곰이 잡아먹고 소화시켜둔 너를 볼 뻔했던 날이었지.”

“그건 폐하께서 직접…….”

“네가 석궁을 쏘다가 도망칠 시기를 놓치거나, 혹시나 내가 늦었다면 거기서 진짜 흑곰이 먹음직스럽게 너를 먹어치웠을지도 모를 일이었어.”

샤를로프는 숨을 삼켰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샤를로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심할게요.”

“너는 부주의해.”

“그래서 늘 폐하 시야에 닿아 있었죠.”

두 사람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멎었다. 비가 점점 거칠어졌다.


“비가 점점 굵어지네요.”

똑똑똑. 빗소리는 점점 굵어지고, 하인들 몇몇이 비를 피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힐 거라고 여기고 속삭였다.


“내 존재가 죄악 같았어요. 내 모든 게 혐오스러웠어요.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족쇄가 됐고, 그 삶을 망친 것 또한 나라고 여겼어요.”

그 시절 샤를로프가 가장 혐오하던 건 아버지도 그 내연녀도, 그 사생아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혐오와도 같아요. 부주의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혐오한 나머지……. 나를 돌아볼 틈이 없었어요.”

전생에는 더 심했다. 죽어가던 하루하루 모든 생이 자기혐오로 이루어졌고, 그 끝에 허락받은 죽음은 안식과도 같았다.


“네가 태어난 게 죄악이라니. 그딴 말을 누가 네게 했었지? 또 빌어먹을 튜텨가인가……? 또, 그놈들이 망언을 지껄여 네 눈을 흐리게 만들어놔?”

샤를로프가 고개를 들자 벤하민이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그런 눈을 짓게 만들어놔?”

“이제는 옛일이에요. 옛날일 기억 저편에 묻어두려고요.”

자기혐오와도 같던 시간은 지났다.


“네 존재가 네 죄악이던 순간은 없다. 스스로를 절벽 끝으로 몰아넣지 마, 샤를.”

점점 거칠어지는 비 때문인지, 겉옷이 습기를 잔뜩 머금었다.


“너는 어딘가 비틀려 있어, 샤를.”

샤를로프는 뒤늦게 벤하민을 살폈다.


“나는 네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벤하민의 어깨는 이미 다 젖어 있었다. 그가 우산을 샤를로프에게로 기울였다.


“칼을 쥔 네가 방향을 잃는다면 칼도 방향을 잃는다.”

 

* * *


“폐하, 듣고 계십니까?”

로스켈라가 큼큼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국혼은 이달 말일로 잡혔습니다. 밖으로 보여줄 상징성도 중요한 만큼, 이번 국혼은 절차 생략 없이 모두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난 약혼식은 대부분 절차를 생략했다면 이번 결혼식은 다르다.

두 사람 위치도 달라졌을뿐더러, 이 와중에 결혼식을 얼렁뚱땅 해결했다간 중앙장로든 주요대신이든 뒤에서 숙덕댈 게 뻔했다. 그래서라도 철저하게 국혼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다.


“폐하께서 속이 복잡하시면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니다. 됐어.”

“따뜻한 차를 올리라 하겠습니다. 결혼식을 앞두고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입니다.”

두 사람이 쫄딱 젖어서 들어오는데, 시녀장과 시종장이 얼마나 식겁했던가?


“진심으로 걱정되나?”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안 됩니다.”

“그럴 일 없으니 계획대로 행하거라.”

로스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주군께서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


“황후궁은 날이 따뜻해지면 건설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날이 상당히 추워질 듯싶어서요. 그 이전까지는 과거 황태후께서 쓰시던 암팔라오궁으로…….”

“내 곁에 둬.”

로스켈라는 그 이야기에 잠시 멈칫했다.


“곁이라 하면?”

“혼자 두어선 안 된다.”

“혹시, 혼인 뒤에도……?”

“안 되나?”

“황궁 예법에 따르면 안 됩니다.”

“100년도 더 된 법도를 들이밀지 마라.”

황궁 예법에 따르면 혼인 전 부부는 같은 침대에 누우면 안 되며, 혼인 후에도 합방을 제외하고는 가림천을 사이에 놓고 누워야 한다 명했다.


‘이 예법을 들이밀다간 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그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모두 완벽히 하여라.”

벤하민은 빗속에서 보던 샤를로프를 떠올렸다. 그 눈에 깃들던 공허함이 온 신경을 붙들었다.

자책감과 자기혐오로 빚은 공허함.

그 속에 깃든 우울감.

잠결에 울면서 흐느끼는 이유 또한 자기혐오와 관련됐으리라.


“너는 뭐가 미안해서…….”

 


‘엄마, 나 같은 건 버려도 됐어요.’

 
그런 말들로 너를 깎아내리는가?


“지금은 곁에서 지켜볼 때다.”

집무실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시간은 차츰차츰 지났다. 날은 점점 추워져 갔다.

* * *



“손을 떠시는군요. 긴장되십니까?”

샤를로프는 흰 레이스 장갑을 낀 두 손을 내려다봤다. 시녀장이 웨딩베일을 머리에 고정했다.


“폐하, 그럼 베일을 내리겠습니다.”

시녀들이 따라붙어서 도왔다. 신부 베일이 꽃잎처럼 흘러내렸다. 샤를로프는 베일 아래로 표정을 숨겼다.

이달 말에 잡혔던 결혼식 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황실은 제국 안팎을 고려해서 국혼 날짜를 앞당겼고, 당일 새벽이 밝았다.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버진로드에는 흰 꽃잎을 한 잎 한 잎 흩뿌려놓았다.


“베일이 조금 무거울지도 모릅니다.”

샤를로프는 버진로드 앞에 섰다. 벤하민이 옆에서 손을 뻗었다.


“겁먹었나?”

“네?”

“목이 빳빳하게 굳어서.”

예식장에 성가대의 기도문이 울렸다. 기도문은 은은하게 퍼지는 노랫말 같으면서도, 누군가가 귀에 속삭이는 귓속말 같았다.

예식장 천장에는 포용을 상징하는 치유의 신을 조각해 넣었고, 대리석 지지대가 그런 천장을 떠받들었다.

노랫소리가 메아리치듯 공명했다. 긴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작은 걸음걸이에 맞춰 밑자락이 사부작댔다.

흰 베일은 꽃잎처럼 소담히 흘러내렸다. 교황이 성수를 조심히 붓고 혼인서약서를 읊었다.


“두 분의 앞날에 평안이 깃들길. 신의 안배가 함께 하기를…….”

벤하민이 베일을 벗겨냈다.


“표정을 더 온화하게 풀어보는 건 어때?”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턱까지 감싼 손아귀가 목을 부드럽게 젖혔다.

샤를로프는 그의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새까만 예복에는 황가의 문양이 선명하게 자리했다. 제 존재를 표하듯 붉은 인장이 또렷했다.

촉.

두 입술이 맞물렸다. 숨을 불어넣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두 손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숨이 파르르 떨렸다. 뺨이 열기로 뜨거워지고 목이 화끈거렸다.


 
몽글몽글하면서도 끈적한 기운이었다.

파도치듯 넘실거렸고, 금방이라도 여린 몸을 휩쓸듯 거칠었다.


“아…….”

벤하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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