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혼자 있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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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혼자 있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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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혼자 있기 싫어요.
2023.05.30.
두 입술이 깊숙이 맞물렸다. 숨이 아스라이 퍼지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뺨 한쪽을 덮은 손이 목을 뒤로 젖혔다.
“어…….”
쌉싸름한 체향이 코끝에 스몄다. 익숙하면서도 노곤한 안정감이었다. 그게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더운 호흡이 입안을 적셨다. 한쪽에서는 숨을 불어넣고, 한쪽에서는 그걸 갈급하게 받아마시고.
목말라. 더 줘요. 부족해.
서로가 서로를 삼켰다. 과일을 베어물듯 그의 흔적을 한 움큼 베어물었다.
그 과육을 우물거렸다. 다디단 사탕을 입에 문 아이처럼 그 흔적을 쫓았다.
아직도 목말라.
나는 좀 더 깊은 걸 원해. 조금 더.
입안에 따끔한 통증이 퍼졌다.
그가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목울대가 울리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뱀처럼 아주 지독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촘촘하게 옭아매면서도, 제 품속의 약혼녀가 겁먹지 않게 달랬다.
더운 입김이 턱을 스쳤다. 더워. 지독하게 덥다.
그 온기는 무기력한 샤를로프를 물 위로 끌어 올렸다.
“하아…….”
샤를로프는 그의 셔츠가 구겨지는 줄도 모르고 아득바득 매달렸다.
벤하민은 턱을 젖히고, 그녀의 손을 뗐다. 손아귀에 깍지를 껴 넣자 손아귀 힘이 풀렸다.
“괜찮아.”
샤를로프는 몸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괜찮을 거야.”
샤를로프는 급하게 숨을 마셨다. 손끝이 오므라들었다. 이 가까운 거리 때문인가.
그의 눈을 보는데, 심장을 손으로 어루만지듯 뻐근해졌다.
“혼자 있기 싫어요.”
아버지에게 품은 적개심과는 별개로, 샤를로프는 누군가와 함께이길 바랐다.
이 삶이 평안하길 바랐다.
겉으로는 내 삶이 평안하지 않아도 된대도, 속에서는 이 안식이 조금이라도 더 유지되길 빌었다.
어쩌겠는가?
전생에 개죽음당해 놓고, 이번 생에는 짧은 안식을 바란다는 게 잘못됐는가?
“나도 아팠어요.”
나도 버틴다고 버텼는데요.
“버티는 게 끝은 아니더라고요.”
몽롱한 의식이 점차 잠겼다.
* * *
벤하민은 천천히 몸을 물렸다.
쌕쌕대는 숨이 아주 편안했다. 굳었던 표정도 은은히 풀렸다.
‘너는 뭘까.’
도대체 어떤 꿈을 꾸어서 그런 표정을 지을까.
너는 가끔 누구든 절벽 끝으로 몰아넣을 것 같지만, 정작 절벽 끝에 서 있는 게 너인 것도 같고.
저 표정 아래에 깃든 울분은 옅어졌을까. 짙어졌을까.
너의 표정은 고요하지만, 그걸 보는 나는 네가 꼭…….
“곧 죽을 아이 같군”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눈을 덮어주었다.
* * *
따가운 햇볕이 내리쬔다. 오늘은 날이 좀 덥나? 어제까지만 해도 추웠는데, 방 안 열기가 후끈거렸다.
샤를로프는 햇볕을 피해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 정도로 오래 잔 게 얼마 만인가 싶다.
샤를로프는 그대로 조금 더 햇볕을 쬈다.
‘손?’
허리에 얹은 팔이 보였다. 두꺼운 팔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냥 허리에 감아만 놓았다. 그렇다고 무겁다는 건 아니었다. 푸른 핏줄이 돋은 손등은 익숙했다. 검을 쥐는 손이어서 자잘한 흉터가 가득했다.
잠든 벤하민이 옆자리에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샤를로프는 작게 탄식하려다 숨을 삼켰다. 그가 깰 것 같아서였다. 손을 뻗어서 그의 이마를 짚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옷을 언제…….”
얇은 침의 차림이었다. 마침, 벤하민이 잠에서 깼다. 잠결에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리던 그가 팔을 뻗었다.
“시녀장이 갈아입혔어. 그대로 잠들기는 불편해 보여서.”
“아…….”
“실례였나?”
“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랜만에 개운하게 잔 것 같아서요.”
샤를로프는 침의를 내려다보다 이불을 슬며시 올렸다.
“……아, 외가댁에 늦는다고 이야기를 못 했어요.”
“그건 내가 이야기했어. 전서구를 보냈으니 그분들도 이해하실 거야.”
“너무 깊게 잠들었어요.”
“시녀장이 침의로 갈아입자마자 다람쥐처럼 몸을 말고 잔다고 이야기하는데 정말 다람쥐 같았어.”
샤를로프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른 아침이어서인가. 몽롱한 머릿속이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지난밤의 짙은 흑안이 떠올랐다.
“샤를.”
샤를로프는 이불보를 더 당겼다.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벤하민은 그녀의 붉어지는 낯빛을 보고 팔을 뻗었다.
“더워?”
“조금은요.”
“난롯불이 너무 높았나?”
“햇볕이 따갑잖아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낯이 뜨겁다. 샤를로프는 목덜미를 한번 쓸어내리며 검붉은 머리칼로 낯을 가렸다. 그는 그 머리칼을 쓸어올려서 샤를로프와 눈을 맞추고 이마를 맞댔다.
“혼인 뒤에도 너 외의 여인은 없어. 정치적 이유로도, 네가 또다시 상실감을 느끼게 두지 않아. 대신, 우리는 부부 사이에 의무를 행하고, 더 깊어지고, 지난밤에는 우리가 못했던 것들을 이것저것 하게 될 거야.”
“…….”
“겁나면 눈 감고 곁에만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샤를로프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먼저 일어났다.
“침의가 얇아서인지 다 비치는구나. 시녀장이 도와줄 거니까 씻고 나와. 저녁도 걸렀으니 식사부터 하자.”
벤하민이 방에서 나가자, 시녀장이 시녀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결의에 가득 찬 이들의 표정을 보는데, 저 사람들 황제를 두려워하던 게 아니었나? 시녀들은 샤를로프는 목욕물에 담고 향유를 부었다.
“머릿결이 곱군요. 어제는 영애께서 얼마나 곤히 잠들었는지, 폐하께서도 한참을 내려다보며 곁에 계시더군요. 얼마나 그 모습이 보기 좋던지. 황실에 큰 경사가 찾아올 듯싶습니다.”
샤를로프는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머리칼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검어졌다. 샤를로프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거기에 머리핀을 꽂았다.
연분홍색 옷감에 레이스를 덧댄 드레스를 입고 거기에 맞춰 구두도 신었다. 이거는 또 어디서 났는가…….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폐하께서 그렇게 풀린 모습도 처음 보았는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도 속마음을 내비친 적 없던 분인데…….”
시녀장은 벤하민의 유년시절 유모였다.
황궁이 아무리 승냥이떼에게 먹혔다고 한들, 저들 모두가 타락한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침묵하면서 이 혼란이 끝나길 기다렸지만, 황궁 안에서도 신념과 신의를 지키던 이들이 있었다. 황궁의와 신관들이 그랬다.
‘황실 황궁의 모두가 의술의 신께 맹세했습니다. 우리는 신의와 신념을 걸고 의술을 베풀며, 내 생명이 위협받을지라도 이 의술을 어긋나게 쓰지 않겠다고. 우리의 신념을 부디 의심치 마십시오.’
‘우리는 신관입니다. 치유의 신께 부끄러운 짓은 못 합니다.’
의술을 익히는 모두가 신전에서 서약서를 적어서 더욱 그랬다.
“치장은 끝났습니다. 식사자리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이 샤를로프를 황제궁 후원으로 이끌었다. 샤를로프는 느릿하게 걸음을 디디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넓은 화단은 광장과도 같았다. 이 넓은 곳에 잔디가 가득했고, 정자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았다.
“윈저가에서 가주님과 자제분께서 찾아들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먼저 도착해서 가주님과 대화 중이십니다.”
“외가댁에서 사람이 나왔다고?”
샤를로프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레안드로가 만찬장에 자리했다. 그녀가 멀거니 서서 바라보는데, 레안드로가 고개를 돌려 손짓했다.
“이리로 오너라.”
“왜…….”
“네 외숙부 표정을 보아라.”
아스터가 샤를로프를 보더니 한시름 놓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는 너무 늦지 말랬더니 외박을 해버리는구나.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들 생각도 않고.”
“네 외숙부가 요즘 과보호가 지나치다.”
“아버지. 이건 제가 지나친 게 아닙니다. 저 아이를 보십시오. 황궁에서 샤를로프를 겨울잠 자는 곰처럼 재운 모양입니다.”
“겨울잠?”
“저 달덩이처럼 동글동글해진 뺨을 보십시오!”
샤를로프까지 만찬장에 자리하자 식사가 시작됐다.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로구나.”
“전서구를 혹시 받지 못하셨나요?”
이 부분은 아스터가 대신 답했다.
“아, 전서구는 도착했다. 그냥, 우리 집 식구들이 유별나서 그렇다고 여겨라.”
벤하민은 처음부터 이럴 거라고 예상한 듯 후원에 자리를 마련했다. 어젯밤 전서구를 보낼 때부터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식사가 시작되고, 식기구가 고요히 잘그락댔다. 황실에서는 자극적인 향신료를 배제하기 때문에, 담백한 음식들로 만찬장을 꾸렸다.
“우리가 아이를 떠나보낼 때가 됐는가 봅니다. 이제는 우리 품으로만 감싸기 힘들겠군요.”
샤를로프도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지 대강 이해했다.
“지금부터는 충성심으로 황궁을 포용할 때가 됐지요. 혼란이 끝났음을 이야기해주는 뜻으로도 좋고요.”
레안드로가 차근차근 계단을 쌓아 올렸다. 샤를로프가 앞으로 밟고 올라서야 할 계단을 말이다.
“황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혼인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샤를로프의 마음도 어디로 향했는지 이미 확인했고요. 우리 욕심을 채우자고 우리 곁에 두기에는, 누구 곁에서 더 빛나는지 봐버렸습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양가적인 감정이 이 아이를 볼 때마다 함께한다.
“처음에는 마음을 다잡으라 황궁으로 데려다 놓았는데, 샤를로프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어야 할 아이 같군요.”
“저는…….”
“아이라기에는 이제 너무 많이 컸군요. 저도 호칭을 바꿀 때가 됐는데, 왜 이러나 모르겠습니다.”
샤를로프는 미소 짓다 목소리를 삼켰다.
“내가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로구나.”
벤하민과 다른 이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사람 일이라는 건 순간순간의 우연들이 이어지고, 우연들이 모이면 삶이 된다.”
레안드로는 뒷짐을 지고 황궁을 우두커니 내려다봤다. 후원이 언덕과도 같아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시야가 넓게 트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제 네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기억해요, 할아버지.”
도망치려거든 도망쳐라. 네가 도망쳐 나온다면, 우리가 너를 숨겨놓을 테니까
앞으로 가려거든 뒤를 보지 마라. 우리는 너의 등을 떠밀 테니까
“너는 도망가길 택했느냐? 아니면, 앞으로 가기를 택했느냐?”
“앞으로 걷길 택했어요.”
샤를로프는 고개를 돌렸다.
“고단하거든 한 번쯤 이야기하거라.”
“그러면요?”
“너의 뒤에 있을 테니까. 뭐든 혼자 갈 때보다야 낫지 않겠느냐?”
저 아래에서 벤하민이 시종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윈저가 마차가 밑에서 대기하는 중인데, 이야기는 끝났나?”
“네. 폐하. 조손 간의 대화를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를로프는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예전이라면 쓸쓸하다는 기분을 느꼈을지 모른다.
“샤를로프가 추위를 많이 탑니다. 밤에는 난롯불을 특히나 유념해 주십시오.”
레안드로는 그 말만 남겨두고 등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지던 그가 아차 싶었다는 듯 이야기했다.
“홀로 너무 멀리 가지 말거라. 네 외숙부가 쓸쓸해 한다. 네 외숙부도 그런 애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