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숨, 넣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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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숨, 넣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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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숨, 넣어주세요.
2023.05.26.
샤를로프는 코가 간질간질하는 기분에 코끝을 찡그렸다.
“콜록.”
그녀가 손등으로 콧등을 약하게 비비자, 벤하민이 집무실 뒤의 창문을 열어두었다.
“괜찮나? 아무래도 밖에서 보는 게 좋겠군.”
“제가 사람을 불러 환기해 놓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뒤뜰에 자리가 마련됐다. 둘 다 식사 전이라는 이유로 음식들도 준비했다.
외할아버지께서도 벤하민이 아직 식사 전인 걸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간을 택했고.
‘오 년 만에 달라지는 건 겉모습만이 아닌가?’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건 아무래도 흉터였다.
“흉터가 많이 늘었어요.”
“그랬나?”
“손등에도 목에도.”
“딱히 아프지는 않아서.”
“생긴 지 오래됐어요?”
“몇 년 됐지. 검을 쓰는 손들은 대개 다 그렇고.”
샤를로프가 흉터로 손을 뻗는데, 어디선가 딸꾹질이 들렸다. 히끅. 히끅 죽어라고 참는 이의 숨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릴 지경이었다.
“히끅!”
시종장이 급히 숨을 삼켰다.
“송, 송구합니다.”
시종장은 그 뒤로도 딸꾹질을 삼켰다. 숨을 꾹꾹 눌러 담아서 조금이라도 소리를 줄여보려고 안간힘이었다.
“히끅! 히끅!”
벤하민이 나이프를 들던 손을 내려놓았다. 시종장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정적이 오갔다.
“사람을 모두 물려라.”
침묵 끝에 벤하민이 명하자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네. 모두 물리겠습니다.”
“찾을 때까지는 방해 말고.”
벤하민은 말을 길게 하는 대신 턱짓으로 물렸다. 피곤해하는 표정 위로 귀찮다는 기색이 다분했다.
“시종장이 많이 굳어 있군요.”
“여기서 나는 선황을 죽인 패륜아라서.”
“선황은 병으로……?”
“산송장 같던 선황께서 오 년이나 명줄을 잘 이어가더니, 갑자기 죽은 게 저들 딴에는 수상했던가? 내 존재감만으로 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둔 모양이더군.”
벤하민은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피를 덮어쓰고 오른 자리인데, 저런 소문이 돌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벤하민이 반듯한 손길로 샤를로프의 잔머리를 정돈했다. 구불대는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에 엉겨 붙었다.
“선황이 죽고 나라 꼴이 얼마나 엉망이던지. 이런 나라도 나라라고 여태 명줄을 붙여둔 게 더 대견했다. 나라 재정은 바닥났고, 충신들 목을 죄다 쳐냈으니…….”
무언가 묵직하게 발목을 잡아끈다.
“건국왕이 무덤 속에서 손뼉 치며 기뻐하겠더군.”
전생에도 폭군으로 기록됐던 그가 황위에 앉은 건 무력도 무력이지만 명분 덕분이었다.
‘우리 약혼은 계획적이었지만, 내가 당신을 택한 건 충동적이었어.’
전생과 같은 개죽음은 싫었고.
내 삶을 망쳤던 이들에게 무력으로 보이는 시위와도 같았다.
네놈들이 전생처럼 망치게 두지 않겠다고.
“양육권이 무조건적으로 친부에게 가는 법은 개정해 놓았어. 황궁 장로들부터 귀족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봐서인지, 안건 회의 때도 불만은 없더군.”
샤를로프는 어쩐지 버거워지는 공기에 급히 입을 뗐다.
“왜 그때 이야기 안 했어요?”
“글쎄. 무슨 이야기일까?”
“저를 찾아왔던 날에요. 저를 영지로 보내는 결정이 윈저가만의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외조부께 입김을 넣으셨지요?”
벤하민은 은은히 미소 지었다.
“거기에 네가 있었어도 할 일은 없었을 테니.”
“그랬던가요?”
“그 꼴로 남겨놓기에는 무슨 사달이든 났을 테니까.”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폐하, 시종장입니다.”
벤하민이 조금 전 방해하지 말라 이야기해 뒀는데, 직접 찾아왔으면 급한 용무이니라.
벤하민도 그걸 아는지 은근한 어조로 되물었다.
“무슨 일인가?”
“근위대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급한 용무라면서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시는데 어찌할까요?”
시종장이 울상이 돼서 중얼거렸다. 저도 결단코 두 분을 방해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영애께 쉴 자리를 마련해드려라. 어디로 가지 말고 기다려, 샤를.”
* * *
“찻물 온도는 잘 맞으십니까?”
샤를로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웃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안에서 혼자 있는 게 편한데 자리를 피해 주겠어요?”
시녀장이 시녀들을 이끌고 나갔다.
샤를로프는 황궁 안 별실에 머물렀다. 소파에 앉아서 찻잔을 만지작댔다. 물방울이 맺힌 찻잔 너머로 찻물이 진동하는 울림이 전해졌다.
꽃잎 한 조각이 소담히 내려앉았다. 진한 오렌지색의 다즐링이 떫으면서도 적절한 감칠맛을 품었다.
털 담요를 무릎에 덮어놓고 의자에 기댔다.
“대신들이나 신하들이 그를 어려워한다는 건 이미 알았는데도, 직접 보는 건 확연히 다르구나.”
벤하민이 편안한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
“사람만 변한 게 아니라 많은 게 바뀌었어.”
샤를로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것 같은데 벤하민은 아직 소식이 없다.
시녀에게 얼마나 더 걸릴지 확인할까도 싶었지만 관뒀다.
대신, 샤를로프는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진갈색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 거울 너머로 샤를로프를 지켜봤다.
똑같이 손을 뻗고, 똑같이 눈을 깜빡거리며.
“이번 생은 행복하게 끝맺을게요.”
샤를로프는 죽고 회귀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흐릿한 잔상이 거울 너머로 겹쳤다.
전생에 그렇게 죽고 회귀하고, 곧 죽을 것 같은 열아홉의 아이가 거기 있었다.
친모의 죽음을 겪고, 내연녀와 사생아의 존재를 알면서도 숨죽여야 했으며,
아버지의 부재로 보호받지 못해도 그냥 그렇게 지냈던 ‘아이’
“나도 그때는 아이였구나.”
샤를로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은 변했는가?”
예전의 그 아슬아슬하던 아이는 체념하는 법을 배웠고, 홀로 서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적정거리에서 사람 손을 타는 법을 배웠으며, 거기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예전보다 더 길어진 머리칼은 그냥 풀어놓으면 골반에 닿는다.
끝을 다듬고 향유로 관리해주어서인지, 풍성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샤를로프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조금만 눈을 붙일까. 황궁의 화려한 문양이 곳곳에서 시선을 끌었다.
샤를로프는 이불 위에 모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낯선 공간이 주는 특유의 긴장감도 스멀스멀 가셨다.
샤를로프는 서서히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지금은 어떠니. 너의 하루는 편안하니?’
엄마의 목소리였던가.
샤를로프는 작게 답했다. 그러려고 노력 중이에요.
* * *
“늦었군.”
벤하민은 시종들을 물리고 걸음을 옮겼다.
‘폐하께서 오늘은 늦어지지 싶다고 영애께 전했습니다만, 영애께서는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 시간이면 돌아갔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벤하민은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올려다봤다.
저녁 해가 졌다.
노을이 지던 하늘은 금방 어두워졌고, 그가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깜깜해진 지 오래였다.
‘너는 아직도 여기 있구나.’
당연히 비어 있을 줄 알았던 곳에, 샤를로프가 누워 있었다.
“조금 전에 영애께서 잠드셨습니다.”
검붉은 머리칼이 침대 위에 흩어져 있고, 그녀는 문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폐하……. 영애를 깨우겠습니다.”
“아니다. 따라 들어오지 말고 밖에 있거라.”
그는 입구를 등지고 문을 닫았다. 둘 뿐인 공간에 그녀 특유의 체향이 풍겼다.
뚜벅― 발걸음이 울렸는데도 샤를로프는 묵묵부답이었다.
“샤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손대어서는 안 될 걸 손대어버린 기분이잖아.”
그가 손을 뻗는데, 짙은 피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그의 손끝에 질척하게 핏물이 엉겼다.
벤하민은 팔을 거뒀다. 손은 굳은살만 드문드문 있을 뿐 말끔했다.
신경질적으로 짧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는데 그녀가 돌아누웠다.
“으응.”
너는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표정이 아득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긴 속눈썹에 팔을 뻗었다.
손끝을 간질이는 감촉에 뺨을 감쌌다. 보드라운 살결은 그와 달랐다.
“샤를.”
그 이름이 입안에 감겼다.
“샤를로프.”
샤를로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몽롱한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봤다.
“아직 졸립구나.”
“…….”
“조금 더 잘래?”
벤하민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눈이 마주쳤다. 내밀한 시선이 오갔다.
몽롱하게 잠긴 눈동자가 그를 따랐다.
벤하민은 고개를 숙여 몸을 가까이했다.
샤를로프는 제 뺨에 닿은 손을 흘끔 내려다보고 더듬거리며 감쌌다.
그 뒤, 가느다란 팔이 그를 끌어안았다.
“샤를.”
그리고, 촉 입술이 맞닿았다.
뜨거운 숨이 터졌다.
그녀는 그 속에서 갈급하게 숨을 갉아갔다.
* * *
목이 막혔다. 기도가 뻣뻣하게 굳고, 시간이 지날수록 숨소리는 흐릿해져 갔다.
죽을 것 같은 공허함이 내려앉고.
내 목소리는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폐가 굳어가며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울음은 소리 없는 비명이 되어갔다.
모든 게 굳는다.
이 숨결도. 이 몸도.
이 죽음 끝에 있는 건 안식이던가? 그게 아니면, 비참함이던가?
그때 나는 조금 비참했던 것도 같다. 이 모든 건 꿈이다.
허상이며 지나간 과거이며, 예전에 이미 한번 끝났던 결말이었다.
“꿈인가?”
“……아마도 아닐걸.”
“아닌 거 같기도.”
“잠버릇이 안 좋구나.”
샤를로프는 힘겹게 눈을 떠 올렸다.
당신이 눈앞에 있다.
여러 번 반복하듯 속삭이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샤를로프는 팔을 뻗었다. 그의 목을 감싸서 부족했던 숨을 채웠다.
폐 깊숙한 곳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숨 막혀요.”
“숨을 쉬어야지.”
“당신이 해줘요.”
“정말…….”
“숨, 넣어주세요.”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부족한 숨을 채워 넣듯, 무언가 서서히 차올랐다.
폐부 깊숙한 곳에 그의 향이 스몄다.
뜨겁고도 거칠었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그의 손아귀가 목을 감싸 쥐었다.
“잠결인가?”
“…….”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지던 때였다. 여린 손끝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가늘고 여린 손이었다. 살갗에는 생채기 하나 없고, 곱게 다듬은 손톱도 부드러웠다.
이런 손짓을 하고도, 저 표정은 이질적이리만큼 겉돌았다.
“……가지 마요.”
가는 목소리가 떨렸다.
“나만 두고 가지 마.”
“……”
“제발, 나만 두지 마.”
잠결에 나왔던 본심일지도 모른다.
“여기 있잖아.”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호흡이 가라앉았다.
“어디 안 갔어.”
벤하민이 몸을 가까이 가져오고 침대가 풀썩 꺼졌다.
그가 느릿하면서도 은근하게 닿았다. 검은 눈동자도 샅샅이 뜯어 살피듯 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