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내가 몹쓸 놈이라도 된 듯. (24/51)


#24. 내가 몹쓸 놈이라도 된 듯.
2023.05.23.



 


“오랜만의 재회인데 겁을 먹어버렸어.”

벤하민이 팔을 뻗어서 허리에 감았다.


“약혼자를 보는 눈에 두려움이 깃들면 어떡해.”

샤를로프는 그제야 뒷걸음치던 스스로를 발견했다.


“……너무 가까워서.”

“내가 몹쓸 놈이라도 된다는 듯 그러면 서운해지잖아.”

벤하민이 뻗었던 팔을 거뒀다.


“보호자께서 오는군.”

레안드로가 숨을 헐떡거렸다.

긴 백발이 바람에 뒤엉켰다. 단정하게 입은 옷도 조금은 흐트러졌다.

외조부께서 저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봤다.

그는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식은땀을 흘렸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은 샤를로프를 찾고서야 혈색을 되찾았다.


“할아버지 뛰어오셨어요?”

레안드로는 비틀거리던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느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떠밀렸어요. 걱정하셨어요?”

서둘러 뛰어온 것치고는 맥이 빠지는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레안드로의 낯빛에 퍼지는 안도감을 보고 샤를로프는 생각을 고쳤다. 그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레안드로는 시선을 돌려 등 뒤에 선 벤하민을 바라봤다.


“암행 중이었습니까?”

“가족들끼리 있는데 내가 끼어들었군.”

“아닙니다. 같이 있는 모습에 안심했으니 됐지요.”

레안드로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가 들더니 걱정만 더 늘어서는 주책이군요.”

 

* * *



“폐하께서 왜 샤를과 있습니까?”

“뒤늦게 찾아왔는데 같이 계셨다.”

레안드로는 뒷짐을 지고 제 외손녀를 살폈다. 저 멀리서 아이의 머리카락이 걸음을 따라 흩날렸다.


“두 사람은 오랜만이어도 한결같구나.”

아스터도 제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했다.


“샤를로프가 폐하를 낯설어할까 염려했는데 또 그건 아니군요. 폐하께서 저 아이에게만 유난히 유하다는 걸 잊어먹습니다.”

예전에도 유난히 그런 부분이 있었다. 두 사람만 걷는데 그게 어색하기보다는 몽환적이었다.


“책사께서는 왜 여기 계십니까?”

“폐하께서 방해된다고 쫓아냈습니다. 그런 동정 어린 시선은 괜찮습니다.”

쫓겨난 로스켈라도 제 주군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진혼제 등불이 땅을 비추었다.


“진혼제도 끝나가는군요.”

로스켈라가 운을 띄웠다.


“곧 혼인을 앞둔 두 분 아닙니까? 오랜 헤어짐이었으니, 두 분께서 오붓하게 서로 지난 회포를 풀도록 지켜봐야지요.”

 

뒤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줄도 모르고,

샤를로프는 간만의 재회에서 거리감을 느꼈다.


“샤를.”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불렀다.


“등불은 올렸어?”

“……어떤 등불이요?”

“진혼제 등불. 사람들이 하늘 위로 올리는 저것 말이야.”

샤를로프는 벤하민과 강줄기를 따라서 걷고 있었다. 주홍빛의 등불이 하늘을 수놓았다.


“아니요. 그럴 틈이 없었네요.”

“하나 올릴까?”

“당신도 같이요?”

“너랑 같이 올리면 될 거 같아.”

벤하민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부드럽게 풀린 분위기는 예전의 알던 것과 닮았다.


“왜 계속 움찔거려?”

“네?”

“봐봐. 떨잖아.”

벤하민이 손끝으로 샤를로프의 머리칼을 감더니 눈을 내리떴다.


“예전과 다르리라고는 여겼지만, 그렇다고 못 볼 걸 본 듯 그러면…….”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너를 해할 리 없잖아. 왜 떨어.”

지금 내 눈에 당신이 선량해 보인다면 내가 미친 건가? 조금은 날이 선 기운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기운이 샤를로프에게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그는 부드럽고 유순했다. 마치, 네가 다치게 두지 않는다는 듯,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미친놈…….”

어디선가 욕설이 들렸다.

흡, 하고 로스켈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멋쩍게 웃던 그는 휘파람을 불어대며 시선을 피했다.


“아가씨, 등불 사세요.”

샤를로프를 시선을 떨궜다. 장미꽃으로 된 화관을 쓴 소녀가 등불을 내밀고 눈을 반짝였다.


“은화 3개예요!”

샤를로프는 값을 치르고 등불을 받아들었다. 주홍빛의 색지 안에 불을 붙이는 심지가 있었다.


“언젠가 창문 너머로 이 등불이 수놓은 하늘을 본 적 있어요. 어둡고 좁은 방 안이었죠. 길 잃은 영혼의 길을 안내한다면, 부디 내 길도 안내해달라. 나도 길을 잃었으니……. 나도 빛으로 길을 이끌어주길.”

샤를로프는 등불을 멀거니 내려다봤다.


“헛되다 여겼는데 나를 이 길로 이끌었고, 끝내는 여기에 세워 두었군요.”

마냥 헛된 건 아니던 모양이다.


“저 등불이 길 잃은 이들을 이끈다는 게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어요.”

여기저기서 등불을 올리고 있었다. 샤를로프는 손끝에 힘을 주어서 등불을 올렸다.

등불이 하늘로 올랐다. 검은 하늘을 수놓고 서서히 멀어져갔다.

누군가는 내 죽음도 애도했을까요. 이렇게 등불을 올려 길을 밝혀주려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진혼제는 그렇게 끝났다.


 

* * *

진혼제가 끝나고 한동안은 그냥 지나 보냈다.


“샤를로프는 어디 있느냐?”

레안드로가 하인에게 물어서 샤를로프를 찾아왔다. 샤를로프는 뒤뜰에서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 바쁘냐?”

“아니에요. 쉬고 있었어요.”

“황궁에 다녀올 참인데 같이 다녀오겠느냐?”

벤하민이 황위에 앉고 황궁을 찾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샤를로프는 책을 덮어두고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점심 무렵에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고 내려오너라.”

샤를로프는 드레스를 입고 밖으로 나섰다. 연보라색 드레스에 두꺼운 숄을 덮자 몸이 무거워졌다.


“이대로 가면 되느냐?”

“네. 숄이 두껍다는 데도 베키가 일단 따뜻하게 입고 나가래요.”

“유능한 하녀를 두었구나. 이만 출발해야겠다. 더 있다간 늦겠어.”

레안드로는 샤를로프의 머리를 쓰다듬고 마차에 올랐다.

황궁까지 가는 길목은 고요했다. 황궐 앞에 도착하자, 보초기사는 마차만 확인하고서 곧장 성문을 열었다.

그 이상의 확인은 불필요했다. 윈저 공작가는 가문의 문양만으로도, 황궁 성문을 넘나들 권력을 지녔다.


“황궁은 이번이 두 번째네요.”

“그간은……. 나라가 개판이었구나.”

곧 누군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황제궁부터는 걸어 들어가셔야 해서 마차를 멈춰 세웠습니다.”

밖에서 난처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안드로가 마차에서 내려서 근위대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나도 아는 사실이니 내 눈치 볼 것 없다.”

“마차는 저희가 보관해 놓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안까지 모셔다드릴 시종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늘 오던 곳인데 됐다. 샤를, 내리거라. 여기서부터 걸어야 한다.”

샤를로프가 고개를 밖으로 빼자, 근위기사가 숨을 급히 삼켰다.

검붉은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손짓 하나에도 기품이 깃들었다.


“너무 빤히 보는구나.”

레안드로가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근위대는 급히 머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각하!”

샤를로프는 에스코트를 받아서 안으로 걸음을 디뎠다. 황제궁 알현실은 로비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었다.

길목 안쪽으로는 화려한 도자기를 놓고, 곳곳에 제국의 국기를 달아 놓았다. 시종들도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께서 즉위하고 시일이 많이 지났다. 힘으로 얻은 자리는 공포로 다스리겠지만, 그 또한 위태로운 법이다. 혼인은 그런 황궁을 안정시키고, 황실의 후계는 황가에 반드시 필요한 책무이다.”

레안드로는 황궁을 눈에 담으며 이야기했다. 샤를로프는 젊은 황제의 약혼녀였으며, 예정대로라면 오래전에 혼례식을 치렀어야 할 만큼 약혼 기간이 길었다.


“누군가는 네게 과한 책임감을 짊어지게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네게 과한 기대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건 알아두어라.”

레안드로는 샤를로프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너의 뒤에 있다.”

“…….”

“네가 어디로 가든, 우리도 거기서 걷고 있다.”

황궁은 넓고 광활하지만 그만큼 고독하다.


“도망치려거든 도망쳐라. 네가 도망쳐 나온다면, 우리가 너를 숨겨놓을 테니까.”

레안드로는 낮게 침전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앞으로 가려거든 뒤를 보지 마라. 우리는 너의 등을 떠밀 테니까.”

“……어려운 말씀이시네요.”

“지금 나는 너의 등을 떠밀 예정이다. 겁먹지 말고.”

레안드로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들었다.


“앞을 보아라.”

시종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와 섰다. 뒤늦게 레안드로의 방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참이었다.


“각, 각하 오셨습니까? 저희를 불렀으면 앞까지 마중 나갔을 텐데 죄송합니다.”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도 조심스러워.”

샤를로프는 고개만 약하게 수그려 예의를 표했다. 레안드로는 뒷짐을 지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모실까요?”

“이 아이를 부탁한다.”

“아, 조손께서 함께 걸음하셨군요?”

“나는 내무대신을 뵈러 갈 테니, 이 아이를 폐하께 안내하거라.”

샤를로프도 그제야 깨달았다.


“혼자서 다녀오나요?”

“시종장을 따라 보내니 혼자는 아니다. 나는 내무대신을 만나는 대로 퇴궐할 예정이다. 너는 폐하와 이야기가 끝나면 천천히 돌아오너라.”

레안드로는 은은히 웃었다. 그의 시선이 샤를로프에게 잠시 머물렀다. 눈이 마주치고, 외조부께서는 주름이 진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렇다고 너무 늦진 말아라. 네 외숙부가 걱정이 유난히 많더구나.”

 

* * *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시종장은 말수가 적었다. 태생이 조심스러운 탓도 있지만, 지금 황궁 분위기가 무거운 탓도 있었다.

내무대신 외무대신부터, 황실 주요 인사들이 죽어 나갔다. 황궁 중앙장로부터 주요 직책들이 모두 죽고 빈자리를 새로 채웠다.

지금 황궁이 조용하더라도, 황궁에서 죽어 나간 목숨만 수십 수백이었다. 지금 황궁은 벽을 모두 허물고, 뼈대만 남은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폐하, 윈저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시종장이 집무실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랍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는 시가 냄새가 옅게 풍겼다. 벤하민이 책상 한쪽에서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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