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폐하께서는 조금 그렇다.
(23/51)
23. 폐하께서는 조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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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폐하께서는 조금 그렇다.
2023.05.19.
발밑이 질척하게 엉겼다.
어깨에 멘 검붉은 코트에는 황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했다.
뒤따르는 이들도, 함께 걷는 이들도 없이,
그는 홀로 걸었다.
영면궁을 지키던 기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폐하. 이른 새벽부터 발걸음하셨습니다.”
“혼자 있을 테니 뒤따르지 마라.”
“호위도 없이……. 알겠습니다.”
머리칼에 이슬이 맺혔다. 이른 새벽이라고 날씨가 유난히 서늘했다.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터졌다.
벤하민은 걸음을 옮겨 영면궁 앞에 섰다.
폐위됐던 폐태자가 황가에서 피를 덮어쓰고 황위에 올랐으니, 뒤이은 행보가 중요했다.
‘조부의 무덤은 옮겼나?’
‘네. 옮겨두었습니다.’
파헤쳐둔 무덤 앞에 섰다.
지금은 복원시켜놓아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조부님 평안하십니까.’
벤하민은 누군가의 묘비 앞에 섰다.
버림받듯 떠밀렸고 자리를 잃은 폐후.
죽어서 시신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했으며, 불에 탄 시신으로 그 명예조차 잃어버렸던 그녀.
빈 묘지에 묘비만 하나 세웠다.
묘비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을 적어 놓았다.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하여, 위령탑이 우뚝 서서 영면궁 중앙에 자리했다.
그가 해주는 마지막 ‘선’
벤하민은 몸을 돌려 영면궁을 나섰다.
“폐하, 호위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보초기사 둘이서 이야기해도.
벤하민은 이번에도 혼자서 걷기를 택했다.
* * *
“제도도 많이 바뀌었어요.”
샤를로프가 마차 밖을 내다보는데, 아스터가 맞은편에서 답했다.
“제도도 오랜만이겠구나.”
“낯설 만큼요.”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그나마 제국민들도 숨통이 트였다. 허리를 졸라매고 살던 평민들도 숨소리를 이제야 내쉬고.”
제도는 떠나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사람들이 묵직하게 내려앉은 와중에도 활기를 띠었다.
“제도 상황도 많이 좋아졌나요?”
“귀족 놈들은 황궁 문턱을 저승 문턱으로 여기지만, 평민들은 사정이 좋아졌으니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쁘고.”
오 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 샤를로프는 마차 창문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풍경들이지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 와중에 ‘폐하께서는 조금 이상해지셨고.’라는 혼잣말이 들렸는데, 아스터는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황궁 밖 외출이 잦던 분인데 답답하겠어요.”
아스터는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겠지.”
약간은 해탈한 어조였다.
“네가 예전에 봐온 전하와는 다를지 모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똑같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마차 문을 열고 내리는데, 익숙한 손이 보였다.
주름이 진 손이었지만 저 온기만큼은 따뜻하리라. 레안드로가 팔을 한 번 더 눈짓했다.
“안 잡느냐?”
샤를로프는 그의 손을 천천히 맞잡았다.
“오랜만이에요.”
“늦었구나.”
“일찍 출발한다고 출발했는데…….”
샤를로프가 말끝을 흐리는데, 아스터가 마차에서 따라 내리며 답했다.
“애 밥부터 먹이고 이야기합시다. 아이가 마차 타고 먼 길 왔는데, 밥부터 먹여야 할 게 아닙니까?”
* * *
“진혼제는 같이 나가보겠냐?”
아스터가 막 식사를 끝낸 샤를로프에게 물었다.
“우리랑 같이 다니면 좀 심심할까?”
샤를로프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작게 웃었다. 이분들은 여전하시다. 세월이 흘러도 똑같은 사람이 있다면 윈저가 식구들이 그랬다.
“바쁘신 게 아니라면요.”
“그럼 저녁에 같이 나가자.”
“외할아버지와는?”
레안드로가 고개만 흘끔 들더니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에서 특별히 적응 시기를 가질 것도 없었다.
샤를로프가 쓰던 방도 그대로였고, 사용인들도 자부심을 품고 품격을 지켰다.
방문을 열자 하녀들이 말끔히 정돈해둔 방이 그녀를 반겼다.
샤를로프가 문턱에 가만히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는데, 아스터가 뒤따라와 물었다.
“짐을 다 옮겨 놓으라 이야기했는데, 없어진 게 있느냐?”
“아니에요. 오랜만이어서 잠시 보고 있었어요.”
“녀석 실없기는. 나중에 저녁때 늦지 않게끔 내려와라.”
샤를로프는 턱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일부러 가족들이 벤하민 이야기를 꺼내도록 기다렸는데,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마차에서 나눈 이야기를 봐서는 평판이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평판이 좋은 건 또 아니고, 이거는 직접 만나봐야 할 일인가?
마차가 광장을 가로질렀다. 창밖 너머로는 해가 막 저물고 있었다.
진혼제는 저녁부터 시작됐다. 어스름이 골목 사이사이로 짙게 내려앉았다.
보랏빛 같으면서도 붉은빛 같은 노을이 언덕 너머로 퍼졌다.
외숙부와 외조부께서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샤를로프도 따라서 내렸다.
“숄을 조금 더 두꺼운 걸 챙겨오지 그랬냐?”
“무거운 옷을 자주 안 입어서요.”
“영지가 제도보다는 추웠을 텐데…….”
아스터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너, 그러고 다녔냐?”
침묵으로 답하자 아스터가 알만하다며 이마를 짚었다.
“코제트를 똑 닮았어.”
거리는 진혼제로 분주했다. 진혼제 때 쓸 등불을 파는 노점상들이 거리를 채웠다.
선황 시절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굶주림에 죽은 이들.
이번 진혼제는 군중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긴 혼란이 끝났음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아직 이른 저녁인데도 벌써부터 사람이 많네요.”
탑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앙탑인가?”
여기가 광장 중심인 것 같다. 그래서 사람도 이쪽으로 더 몰려 있었다.
샤를로프는 광장 한곳에 놓인 탑을 올려다봤다. 중앙탑 옆에 처음 보는 탑이 세워졌다.
샤를로프가 거기서 걸음을 멈추는데, 아스터가 곁에서 이야기했다.
“위령탑이다. 황궁 영면궁에 하나 있고, 황성의 중앙광장에 하나 있는 게 이곳이다.”
“그렇군요……. 이런 걸 본 기억은 없는데.”
“너도 그동안 제도를 비웠으니 볼 기회가 없었겠구나. 폐하께서 즉위하고 세웠으니 얼마 안 됐다.”
아스터가 위령탑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위령탑은 선황 시절 억울하게 죽은 충신들과 제국민을 위로하는 탑이었다.
그 시절에는 억울하다고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대로 죽었고,
지금에서야 이들의 억울함을 달래주는 위령탑을 중앙광장에 세웠다.
‘전생에 이런 걸 세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샤를로프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아스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샤를.”
“네.”
“이쪽으로 오너라. 사람 틈새에 밀렸다간 그대로 놓친다.”
위령탑에는 ‘그들에게 안식을’이라는 말이 고대어로 적혀 있었다.
진혼제가 시작됐다. 신관들이 기도문을 읊었다.
샤를로프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어머니는 지금 안식을 되찾으셨나요. 지금 여기는 그 죽음을 애도할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죽던 순간에는 그런 이들이 없었지만요.
이런 안식을 조금만 허락받았다면. 나도 그런 비참함을 느낄 일 없었겠지요.
‘그들에게 안식을.’
죽은 모든 이들에게 안식을 안겨주기를.
“등불을 올리는군요.”
아스터가 고개를 젖혔다.
“그렇구나.”
이 등불은 죽은 이들에게 길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는 이정표이다.
한참 전에 올렸어야 할 등불이지만, 지금에서야 올린다.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샤를로프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광장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그리고, 저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어디 있든 찾아낸다는 듯.’
그의 눈은 샤를로프만 보고 있었다.
* * *
서슬 퍼런 기운이 흘렀다. 그게 조금은 오싹했다.
등허리를 훑고 지나가는 한기에 살갗이 쭈뼛쭈뼛해졌다.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짙게 도드라졌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를 피했다.
마치, 본능적으로 이 사람과 닿아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안다는 듯.
“폐하로구나.”
레안드로도 그 시선을 느끼고 벤하민을 돌아봤다.
“예전보다 기세가 사나울지 모른다. 낯설다고 조금 꺼릴까 걱정도…….”
“걱정 마셔요.”
“그래. 샤를로프 너인데 내가 걱정할 건 없겠구나.”
샤를로프는 그를 비유할 때 검은 뱀에 비유했다.
지금도 그는 예전과 비슷했다.
대신, 예전보다 더 노골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사라지셨구나.”
“네. 사람이 너무 많네요.”
여기저기서 또 다시 사람이 몰려든다.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저 너머로 사람들 틈에 파묻혔다.
“샤를.”
레안드로가 그녀를 불렀다.
“그렇게 넋 놓다간 길 잃는다.”
“아이도 아니고 길을 왜 잃겠어요.”
“중앙광장이 구조는 단순해도, 사람이 많으면 길을 어림잡기 힘들어진다. 지금 중앙탑만 하더라도, 이 사이에서 사람 찾기가 쉬워 보이느냐?”
* * *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샤를로프는 그대로 떠밀렸다.
“샤를로프……!”
그의 손을 놓쳤다. 아스터가 다급하게 손을 뻗는데 손끝이 엇갈렸다.
샤를로프는 몸을 짓누르는 인파 틈새에서 힘겹게 빠져나왔다.
그녀가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며, 왔던 길을 되짚는데 사람들 때문인지 길이 안 보였다.
위령탑 앞쪽으로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탑의 머리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떠밀리면.”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렸다.
“여기서 미아라도 되려고.”
누군가 샤를로프를 부드럽게 당겼다.
“이리로 와.”
샤를로프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 넓은 가슴팍이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더 젖히자 목젖이 보였다.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쫓았다. 이목구비가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발했다.
약간 더 단단해졌다. 조금 더 딱딱해진 것도 같고.
그의 손아귀가 그녀의 손목을 감았다.
까끌까끌하면서도 단단한 굳은살이 여린 살갗 위로 겹쳤다.
손등에도 긁히거나 다친 상흔이 가득했다.
어깨도 넓어졌고 체격이 커졌다. 지금 이 시기 당신 모습이구나.
벤하민이 손을 뻗어서 그녀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 하나에 뺨이 다 덮였다. 그것 하나로 체격 차이를 극심하게 깨달았다.
샤를로프는 한 걸음 물러섰다.
벤하민이 그런 한 걸음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샤를.”
샤를로프는 목을 젖혀서 그를 올려다봤다.
“넋 놓고 다니면 어떡해. 정신 똑바로 차려.”
벤하민의 새까만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짙었다.
“여기서는 혼자 다니면 안 돼, 샤를.”
그는 체격만 달라진 게 아니라, 다른 부분도 달라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