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렇게 살아남아라.
(21/51)
21. 그렇게 살아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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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렇게 살아남아라.
2023.05.12.
‘숨죽여라’
어머니가 고요히 속삭였다.
‘샤를. 너를 숨기고 또 숨겨야 해.’
‘누구로부터요?’
‘네 아버지로부터.’
‘어째서요?’
‘그 사람이……. 너를 앗을 거야.’
말이 뚝뚝 끊긴다. 뭔가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옛날 옛적 일이라서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아파도 숨죽이고. 네 목소리도 죽여.’
‘……엄마?’
‘그렇게 살아남아라.’
어린 딸아이에게 남기는 말이라기에는 이상했다. 집을 자주 비우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서 나를 지키겠다고 죽으면서까지 내 곁에 남았던 어머니.
‘그럼 엄마는요?’
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가씨!”
베키가 비명을 지르듯 샤를로프를 불렀다.
“…… 목, 목이요.”
“응.”
“목에서 팔 내리셔요.”
샤를로프는 눈을 끔뻑거렸다. 무언가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도 같은데 기억이 떠오르질 않는다.
“괜찮으셔요?”
베키가 손수건으로 샤를로프의 목을 감쌌다. 그제야 무언가 따끔거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는 할퀸 듯한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무슨 생각을 하신다고 불러도 듣질 못하셔요?”
“……왜?”
“손톱으로 목을 긁으시다니요. 흉이라도 지면 어떡하시려고요. 기다려 보세요. 연고를 가지고 올게요.”
무언가 멍해졌다. 목을 왜 긁었더라.
“괜찮아. 괜찮으니까 조용히 좀 해줘.”
“우리 아가씨……. 부쩍 이상해지셨어요.”
베키는 연고를 듬뿍 펴 바르고 속상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저는 잠시 가주님께 다녀올게요.”
부름을 받은 레안드로가 침실을 찾았다. 아스터도 그의 뒤를 따랐다.
레안드로는 샤를로프를 내려다보고, 아스터에게 나오라며 손짓했다.
“아버님 아무래도.”
아스터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방문을 닫고 나왔다.
“영지에 연통을 넣어라. 아이를 내려보낸다.”
이제야 서로 적응했는데, 지금은 저 아이를 제 생부에게서 떼어놓는 게 먼저이지 싶다.
* * *
황제궁 문이 은밀히 열렸다.
황궁의가 덜덜 떨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시종들이 속닥대며 길을 열었다.
“어서 안으로 안내하시오.”
시종장이 어전 문을 열어 주었다.
“의식은?”
“없으십니다.”
황제의 병증이 점점 심해진다는 건 의관인 그가 가장 잘 알았다.
황제는 잠이 점점 많아지고, 잠이 들지 않은 날은 광증을 앓았다.
“폐하. 황궁의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의식이 없더라도 신하된 도리로써 방문을 알리는 게 먼저였다.
황궁의는 발작하는 황제를 눕히고 서둘러 약초부터 피웠다.
의식을 몽롱하게 풀어주는 약초인데, 특유의 연기로 환자를 잠재우는 방식이었다.
“쯧. 언제부터 이러했소?”
“얼마 안 됐습니다. 안이 소란스러워서 문을 열었는데…….”
호흡은 약하더라도 이어졌다.
“폐하께서도 이제는 한계로구나.”
황제는 그 후로도 의식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 * *
누군가 급하게 윈저가 대문을 가로질렀다.
흑마가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멈춰 서고, 그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각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저택 안에서 기다리시는 중입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집사가 서둘러 말의 고삐를 옥좼다.
저택 문이 황급하게 열리고, 하인들이 길을 비켰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서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집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왔는가?”
레안드로는 이미 집무실에서 나와서, 사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은…….”
긴 백발이 흘러내리고, 레안드로는 자조하듯 속삭였다.
“폐하께서 이제 자리를 내려놓을 때가 됐구나. 샤를로프를 불러오너라. 너희는 아이를 영지로 돌려보낼 채비를 시작하고. 아이는 당장 오늘 내려보낸다.”
황제가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의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그건 곧 사냥터에 사냥감이 풀린다는 뜻이었다.
* * *
샤를로프는 팔뚝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겼다. 외조부께서 샤를로프를 찾았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샤를로프는 집무실 문을 앞두고 숨을 골랐다.
“찾으셨어요, 할아버지.”
집무실 상석에 있던 레안드로가 고개를 들었다. 두 외숙부도 함께 있었다.
샤를로프는 이 모습에 대충 짐작했다.
“한동안 영지로 내려가 있어라.”
레안드로의 명령이었다.
“당장……. 몸부터 피해라.”
레안드로는 뒷짐을 지고 외손녀를 내려다봤다.
아이는 품에 놓고 키워야 한다. 그런 마음은 여전했다.
세 살배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나이 팔순을 앞둔 레안드로에게 외손녀는 누가 뭐래도 아이였다.
죽은 딸아이가 남겨두고 간 흔적.
그런 아이의 존재감이 레안드로에게 결단코 가벼울 리 없다.
“폐하께서 요즘 심상치 않으시다.”
“편찮으신가요?”
“아무래도. 수명이 다해가는 모양이더구나. 얼마나 더 버틸지는 우리도 모른다. 일단은 너는 몸을 피하고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황제의 수명이 다해간다. 이 수명이 끝나고 초래될 혼란기는 오래전부터 예상된 부분이었다.
“네가 싫더라도…….”
“언제 떠나나요?”
누군가 탄식했다. 샤를로프는 시선을 굴려 그게 누구인지 확인했다.
아스터가 숨을 들이쉬며 약하게 신음했다.
샤를로프의 시선이 거기 닿았다.
무언가 약간.
그래.
우리는 이러려는 의도가 아닌데, 주변의 모든 게 우리를 나눠놓으려고 작정한 듯 흘러갔다.
레안드로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주름이 진 손을 감싸 쥐고 동요를 숨겼다.
“오늘이다. 오늘, 오후에 곧장 떠나라.”
그렇게 됐다.
샤를로프는 짐가방을 황망히 내려다봤다. 직접 챙길 짐이랄 것도 없다.
개인 소지품 몇 개만 챙겼다.
나머지는 하녀가 직접 챙길 예정이었다.
침실 창문에 기대서 밖을 내려다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터 외삼촌이었다.
“전하께 인사는 드렸느냐?”
샤를로프는 은은히 웃어주었다.
“뵙지 못했어요.”
“어째서?”
“바쁜 모양이에요. 못 뵙고 가네요.”
벤하민이 지난밤 다녀간 게, 우리가 한동안 못 볼 걸 알고서 그랬던 것 같다.
“짐은 다 싸뒀느냐?”
“네. 무거운 짐들은 하녀들이 따로 챙겼고, 제가 챙길 건 없었어요.”
“요양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그냥 휴양이라고 여겨라.”
“외숙부 마음도 잘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셔요.”
이번 일도 그렇고, 며칠이라도 요양차 내려가서 쉬다 오라는 외할아버지의 조언이었다.
‘나는 너까지 잃고 싶지 않다. 아가.’
샤를로프는 은은히 웃었다.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저도 무력하네요. 이 정도로 무력할 줄은 몰랐어요.”
한번 죽고 변했다고 여겼지만 크게 변한 건 또 없다. 지금부터는 나도 변해야겠죠.
“아버지 손에서 나왔어도, 아직은 여기까지가 한계예요.”
“그런 말 하지 마라.”
“……다녀와서는 모두 변해 있겠죠.”
“뭘 오래 떠나 있기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아주 잠시다.”
그냥, 며칠 다녀오라는 뜻이었다.
잠시만 떨어져 지내자고. 그런데 그건 잠시가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잘 지내요.”
“뭐?”
“몸 건강하시고요.”
이 헤어짐이 길어질 거라는 건 샤를로프가 가장 잘 알았다.
* * *
황제의 수명이 끝나간다. 산송장처럼 긴 세월 숨통만 붙여두었던 황제의 명줄이 다해간다.
“곧 끝나겠군.”
벤하민은 황제의 끝을 점치며 빈민촌을 찾았다. 옛 친우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모양입니다. 죽기 전 스스로 위치를 밝히고 전하를 뵙기를 청했습니다.”
“……빈민촌으로 숨어들었군.”
“직접 걸음하겠습니까?”
벤하민은 대답 대신 어딘가를 손짓했다.
“안내해.”
기사단은 낡은 판잣집으로 향했다. 흰 머리칼의 늙은 사내가 누워 있었다.
‘백발?’
허름한 누더기를 입고 머리는 희게 셌지만, 나이는 쉰을 고작 넘겼을까.
“내가 잘못 왔나?”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곧 안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입니까?”
저 목소리를 듣는데 쉰 목소리라도 알겠다.
“도망 다니더니 숨어든 곳이 빈민가인가…….”
사내는 불현듯 눈을 떴다.
“내 벗이자 내 스승이며, 내 수족이자 나의 사람을 자부하던 그대가 내 등에 칼을 꽂고 숨어든 곳이 고작 빈민가인가?”
새까만 흑안과 흑발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졌다.
“십수 년 만의 만남인데, 퍽 심심한 만남이구나. 근 20년을 숨어지냈다더니, 이런 허름한 곳에서 용케도 숨어 지냈구나.”
과거 한때는 그의 기사였으며, 그의 수족이었고, 그의 뒤를 맡겼으며, 생모가 붙여준 그의 보호자와도 같았다.
지금은 도망친 죄인이자 변절자이며, 황후를 처형장에 직접 끌어다 올려 목을 친 집행자였다.
“제 주군의 등에 칼을 꽂았다면, 배신자가 되어서 잘 살기라도 하지 이 꼴로 여기에 거지처럼 처박혀 지냈나? 내게 이런 꼴을 보여주겠다고, 직접 네가 여기 있다고 이야기해서 나를 끌어들였느냐?”
근 20여 년 만에 나눈 인사는 담백했다.
“어떤 삶을 살았느냐?”
“…….”
“지난 삶이 평안했더냐?”
놈은 턱을 딱딱거리며 떨었다.
“하루도 마음 편하던 날이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으며, 이 목숨이 얼마나 덧없는 줄 알았으며, 두 분을 배반한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습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온다고 깨달았지만, 여기서 전하를 뵈려고 그랬는가 봅니다.”
벤하민은 눈매를 휘며 웃어주었다. 무해한 미소를 짓는데, 이걸 무해하다고 봐도 좋을지는 모호했다. 무해하다고 일컫기에는, 애당초 그를 둘러싼 모든 게 해로웠다.
“저는 죄인입니다. 아아…… 곧 죽음을 앞뒀고, 전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죽음 앞에서 제 죗값을 치를 터이니…….”
사내는 무언가 밀어닥친다는 듯 눈물을 터트렸다. 머리는 희게 셌고, 주름은 자글자글했다.
거무죽죽한 낯빛은 죽을 날을 앞둔 노인 같았다. 그런데, 이 사내는 고작 나이 쉰을 겨우 넘겼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똑똑히 들어주십시오. 전, 하……. 이 죄인의 죄를 묻더라도 부디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전하, 황비를 조심하십시오. 그녀에게 무언가 있습니다. 저는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벤하민은 눈매를 좁혔다.
“무슨 뜻이냐.”
“황비 전하를 본 날……. 무언가 엉키는 걸 느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그곳에 있습니다. 전하, 제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그곳에……. 무언가 있습니다.”
벤하민은 로스켈라에게서 칼을 건네받았다.
“황후 폐하, 폐하 저를 용서하십시오. 이 죗값은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언젠가 이 목숨을 받으러 오리라 믿었습니다.”
놈은 말을 뚝 끊었다.
“전하께서 죽여주십시오. 부디, 그 손으로 제 죄책감을 덜어주십시오. 이 또한 제 욕심이겠지만.”
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용서를……. 부디, 이 우매한 놈을 용서해주십시오.”
썩은 살을 도려낸다. 썩은 살이 더 곪아가기 전에.
썩은 뼈를 도려낸다. 이대로 허물어버리기 전에.
“눈을 감아라.”
이놈의 죄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무능 또한 죄다. 그 시절 그는 무능했고 그건 제 죄이다. 놈의 목이 떨어졌다.
“시신을 묻고 자리를 정돈해라.”
“괜찮으십니까.”
“……향을 피우고. 놈의 죽음을 약식으로라도 기리거라.”
벤하민의 눈이 서서히 메말랐다. 메마른 땅이 갈라지듯 표정이 갈라졌다.
“아가씨께서 제도를 떠났다는 전언입니다.”
벤하민은 칼끝으로 바닥을 끌며 발걸음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