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우리 애 어쩝니까?
(20/51)
20. 우리 애 어쩝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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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우리 애 어쩝니까?
2023.05.09.
샤를로프는 일어나려던 몸을 다시 눕혔다. 혼이 쏙 빠져나가서 머리가 멍했다.
“아가씨 잘 생각하셨어요. 여기서 더 움직이면 아가씨 몸에 무리만 가요.”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유난이셔.”
“자, 약을 가져 왔어요. 약부터 드셔요.”
샤를로프는 하녀가 챙겨준 약부터 마셨다. 물에 가루약을 탔는데, 쓴 물이 꿀렁대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식도가 어디 있는지 하나하나 알려주는 것 같았다.
샤를로프는 울상이 돼서 속삭였다.
“써요, 외삼촌.”
아스터는 곁에서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품에서 알사탕을 꺼냈다.
“이제는 나이 좀 먹었다고, 사탕은 안 먹으려나?”
“달아요.”
“사탕이 달지 그럼 쓰겠어?”
동글동글한 알사탕은 딸기 맛이었는데, 거기에 설탕까지 듬뿍 묻혀 뒀다. 샤를로프가 입안에서 알사탕을 굴리며 녹여 먹는데, 아스터가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으며 이야기했다.
“우리가 유난인 게 아니다. 네가 유난히 네게 각박한 거야. 그걸 너만 몰라서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애가 탄 거고.”
아스터가 샤를로프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샤를로프는 머리를 감싸고 끙끙 앓았다.
“아프잖아요.”
“아프냐? 아파? 이거는 아프구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끙끙 앓을 때는 아프다는 이야기 한 번 않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꿀밤 한 대가 아파서…….”
아스터는 샤를로프를 한 번 더 쥐어박으려다가 손아귀를 펴고 쓰다듬었다.
“아프지 마라.”
아스터는 멋쩍게 목을 가다듬었다. 낯부끄러운지 큼큼! 하고 시선을 획 피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 * *
“우리 애 어찌합니까?”
아스터는 샤를로프의 방을 연신 돌아보았다.
“저 아이를 어쩐단 말입니까?”
“뭐가 말이냐?”
“저는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저 아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레안드로는 걸음을 멈춰 세우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맑았다. 모든 게 괜찮다는 듯 속없이 맑은 모습이었다.
“말해줄 때가 된다면 아이가 말해줄 거다.”
지금은 지켜봐 주는 게 좋다. 그저 옆자리를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언가 엇나간다면 그때 되어서 바로잡으면 된다. 지금은 그냥 두자.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드는구나.”
우리가 한 걸음 다가섰는데 혹시나 뒤로 물러설까. 저 아이가 겨우 열어둔 마음이 닫힐까.
우리는 아직 저 아이에게 먼 존재였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모의 죽음을 겪고 맺어진 비정상적인 만남.
이 만남을 놓고 뭐라고 이야기하겠나? 저 아이를 캐묻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무엇 하나 정상적인 게 없다.
저 눈을 처음 보던 때.
레안드로는 저 속에서 딸아이 얼굴을 엿봤다. 너무나 닮은 그 모습에 움찔할 뻔했다.
딸아이가 가문과 거리를 두고, 제 자식을 지켜야겠다면 하던 때 무엇도 못 했다.
“저는 그 집안이 싫습니다. 선대 때 맺은 언약이었어도, 제 여동생이 그렇게 죽는 걸 지켜본다는 게……. 빌어먹을 노인네, 우리에게 도대체 뭘 안겨주고 간 겁니까? 양육권 하나에 발목 묶여서…….”
“코제트가 아이를 원망했겠느냐?”
아스터는 멈칫했다.
“코제트도 그런 아이는 아니었죠.”
“마지막 순간 우리에게도 부탁하지 못하고, 저렇게 떠나버렸다. 거기서 홀로 남은 게 샤를로프다. 저 아이가 남들과 같기는 힘들다. 저 아이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언정, 속으로는 말라비틀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나는 무섭다.”
레안드로가 처음으로 속내를 꺼냈다.
“코제트가 우리와 거리를 뒀듯.”
“아버지!”
“저 아이마저 그럴까.”
저 아이도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들 눈에는 여전히 어렸다. 어리고 연약했다.
“네 눈에는 보이지 않냐?”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가 보호해야 할 저 아이가 반대로 우리를 보호하려고 들잖느냐?”
아직은 슬퍼해도 될 시기이다.
“아가.”
그런 호칭으로 부를 만큼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레안드로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너는 혼자 너무 먼 곳으로 가려고 드는구나.”
* * *
시간이 점점 흘렀다.
샤를로프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둠에 잠긴 방안은 창밖 불빛에만 의지해 있었다.
늦은 새벽이었다. 익숙한 천장이 그녀를 반겼다.
흐릿하던 시야가 또렷해지고, 샤를로프는 이불보를 움켜쥐고 앓았다.
저 익숙함에 마음이 놓였다.
샤를로프는 그제야 “윈저가구나.” 하고 한 번 더 안심했다.
“……”
샤를로프는 목을 더듬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너는 강박적으로 목을 더듬거리잖아.’
샤를로프는 멈칫하고 팔을 내렸다.
“목말라.”
그녀는 흰 침의 차림이었다.
가벼운 옷차림 덕분에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갈증 나서 그러는 거예요.”
샤를로프가 속삭이듯 하는 이야기에 공기가 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탁자에 놔둔 물컵에 물을 따르고 마셨다.
뺨이 뜨거웠다. 머릿속까지 열이 바짝 올라서 어지러웠다.
샤를로프는 비틀거리며 침실에서 나왔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복도에 우두커니 멈췄다. 가슴을 짚고 숨을 삼키는데, 한쪽이 막힌 듯 답답했다.
“아파.”
샤를로프는 흠칫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가슴이 답답하게 뭉친 것만 같아요.
샤를로프는 얹힌 속을 풀어내듯 명치를 퉁퉁 두들겼다.
슬리퍼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환자가 혼자 어딜 가.”
샤를로프는 텅 빈 눈을 들어 올렸다.
“답답해서요.”
“환자면 환자답게 방에서 누워 있어.”
벤하민이었다.
“밤에 혼자 나오는 건 습관이었어?”
“여기 계시네요.”
“네가 깼다면 밖에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어디 계시다 왔어요?”
“네가 잠든 나흘 내내 사냥대회 일을 마무리 짓고, 오늘이야 겨우 여유를 냈지.”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머리에 티아라를 씌웠다. 얇은 티아라에 손가락을 걸어서 빼내자, 손끝에 티아라가 걸렸다.
“울어?”
샤를로프는 눈시울을 붉혔다.
“울기는요.”
“왜 자꾸 울어.”
먹먹하게 젖은 눈동자는 언제라도 울 것 같았지만. 샤를로프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눈두덩이에 입을 맞췄다.
“속상하잖아.”
샤를로프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다 그의 가슴을 짚었다.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나는 울려던 게 아닌데.’
샤를로프는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의 옷자락을 힘주어 움켜쥐고, 이마를 기댔다.
눈이 먹먹하게 젖어 들었다. 벤하민이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 그의 어깨를 짚는데, 벤하민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샤를.”
샤를로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나의 샤를.”
속삭이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매끄러웠다.
“뭐든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거야.”
벤하민이 샤를로프에 손끝에 걸린 티아라를 가져가서 머리에 다시 씌웠다. 그리고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안았다.
“그만 울어.”
샤를로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벤하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네가 우니까…….”
샤를로프는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치고, 넋 나간 눈동자가 벤하민에게 사로잡혔다.
“나한테 휘둘리잖아.”
벤하민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코끝이 맞닿았다. 가깝다. 너무나.
새까만 머리칼이 뺨을 간질거렸고, 뱀을 닮은 눈동자는 꼭 그녀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샤를로프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샤를로프도 인정했다. 넋 놓으면 휘둘린다.
그래도 말이다.
샤를로프는 벤하민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허리로 파고들자, 벤하민이 고개를 떨궜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쉴게요.
잊고 싶은 나날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지만.
“오늘은 쉴래요.”
샤를로프는 벤하민에게 이마를 기댔다.
벤하민은 품속으로 파고드는 샤를로프를 내려다봤다. 이 작은 몸으로 꼬물대며 숨어든다.
“샤를.”
“…….”
“샤를로프.”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몇 번이고 불렀다.
샤를로프도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너, 잠 오는구나.”
벤하민이 속삭이는 말에도, 샤를로프는 그저 몸을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벤하민은 고개를 내젓고 샤를로프를 안아 들었다.
가볍다.
벤하민은 잠시 멈칫했지만 샤를로프의 방을 금방 찾았다.
샤를로프는 곧 잠들 것 같았다.
벤하민은 이불을 똑바로 펴서 샤를로프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침대 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는 아프면 안 되겠어.”
벤하민은 피곤해 보이는 샤슬로프에게 이야기했다.
“오늘은 아스터가 비 맞은 강아지가 됐잖아.”
“제 외숙부는 그렇지 않아요.”
“끙끙 앓아. 너한테 오고 싶은데, 방해될까 봐서 못 오고.”
샤를로프는 침대에 기대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미소 짓는데,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누워.”
벤하민은 옷자락에 차가운 밤바람이 묻혀 왔는데, 서늘하면서도 맑은 기운을 풍겼다.
“허리가 아파서요.”
“아직은 잘 시간이야.”
샤를로프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검을 잡는다고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까끌까끌했다.
벤하민이 미소 짓더니 뺨을 쓸었다. 긴 속눈썹이 그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나 잠들기 전까지만 여기 계세요.”
“응?”
“온기…….”
이 온기를 은근히 그리워했던 것도 같다.
“손은 나한테 주고.”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손을 가져갔다.
“더워요.”
“몸에 열이 있어서 그래.”
“열 다 떨어진 거 같은데.”
머리가 멍했다.
샤를로프는 침대를 더듬거리다 몸을 눕혔다.
“테라스 창 좀 열어주시겠어요?”
“밤바람은 안 좋아. 감기 기운도 있잖아.”
“덥다니까.”
“몸에 열이 있어서 그래. 안 돼. 샤를.”
벤하민이 이마를 겹쳤다.
“감기가 단단히 왔어.”
샤를로프는 의식이 서서히 잠기는 걸 느꼈다.
“잠 오면 자.”
“…….”
“곁에 있을게.”
벤하민이 그녀의 아랫배를 토닥였다.
“모든 게 좋아질 거야.”
지금 이 순간은 아주 찰나이다.
“내가 모두 물어뜯을 테니.”
“…….”
“숨을 천천히 골라.”
샤를로프가 눈을 깜빡거리는데, 벤하민이 고개를 쓱 내밀었다. 두 눈이 지척에서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기에는 늦었다.
“지금은 자도 돼.”
검붉은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흩어졌다.
“아프지 마.”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샤를.”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졌다.
한숨 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녀를 다독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