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너를 어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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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너를 어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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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너를 어쩔까?
2023.04.28.
벤하민은 느릿하게 폭포수 옆에 앉았다.
폰트리아 숲의 가장 깊숙한 곳. 그의 옆으로는 사냥감들이 가득했다.
벤하민은 시큰둥하게 칼을 갈무리하고 흐르는 호수에 손을 씻었다.
“백호는 잡았고. 흑호는 안 보이는군요.”
주변에 은신해 있던 윈저가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주변도 모두 백호입니다. 흑호는 아무래 다른 구역에 있는 모양입니다. 숲을 더 깊숙이 들어가 보겠습니까?”
아스터가 고개를 숙여 벤하민과 눈을 맞췄다.
벤하민이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은은히 웃었다.
“아스터 일찍 찾아냈구나.”
“기사단을 계속 따돌리시는군요. 전하? 저희가 사냥감이 아니라 전하를 추적해야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간 사냥대회는 둘째치고, 샤를로프에게 줄 사냥감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아스터가 벤하민을 발견하고 맞은편 바위에 걸터앉았다. 벤하민은 태생적으로 등 뒤에 사람을 두지 않는다. 벤하민이 밖에서 홀로 다니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호위는 따돌리라고 붙여드리는 게 아닙니다.”
“미안하게 됐어. 습관이 되어버린 게 뭔가? 그래도, 사냥터에서는 내내 동행했으니 됐잖아.”
세자르가 숲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덜미를 쥐고 나왔다.
“황비께서 나날이 미쳐 날뛰는 모양입니다. 대놓고 살수를 사냥터 안쪽에 뿌려둡니까?”
“황비께서 요즘 심약해지더니, 눈앞이 많이 흐려지신 모양이야.”
세자르는 일대가 안전하다는 부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검을 갈무리했다.
“앞으로는 호위에 더 신경 써야겠습니다.”
“굳이?”
“최근에도 윈저가에서 붙여드린 호위를 또 따돌렸다 들었습니다.”
최근에 윈저가에서 호위를 붙여 주었다. 황실에서는 누구도 섣불리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윈저가에서 기사단을 하나 떼어내서 보냈는데, 최근에 벤하민이 이 호위를 따돌리고 또 밖으로 암행을 떠났다.
“복면 벗겨서 얼굴들 확인해.”
“벗겨서 다 확인했는데 모르는 얼굴입니다.”
“오늘 사냥대회의 사냥감은 이거로 해결하면 되겠어.”
벤하민은 숲속에서 나오는 흑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일반 호랑이보다 몸집이 두 배는 더 큰 흑호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건 순식간이었다.
“전하, 지금 뭘 잡은 겁니까?”
“흑호가 안 보이더라니, 잠시 방심한 틈에 이놈 목덜미가 아니라 내 목덜미를 잡힐 뻔했지 뭔가?”
“전하께서는 위기의식이라는 게 없습니까?”
“떠돌다 흑호 영역까지 온 모양이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아스터 자네도 슬슬 나가봐야지 않나?”
흑호는 으르렁거리다 벤하민이 휘두른 검집에 그대로 기절했다.
“위험한 행동은 자제하십시오.”
“위험할 것도 많다.”
“이만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벤하민은 아스터의 조언에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먹구름이 몰려오네.”
폰트리아 숲 바깥쪽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왔다. 새까만 먹구름이 숲 일대를 모두 집어삼켰다.
아직 숲 안쪽에서는 사냥대회가 한창이었다.
벤하민도 숲 안쪽까지 너무 깊숙이 왔고, 이러다간 집결지로 나가는 길에 비구름에 잡아먹히지 싶었다.
“곧 한 차례 쏟아지겠습니다.”
아스터가 날씨에 우려를 표했다.
“숲 안쪽이라 더 어두운 건가?”
벤하민은 고요히 바깥을 살폈다.
“나가봐야 할 것 같다.”
벤하민은 답답한 제복 단추를 풀어냈다.
“무언가 감이 안 좋아.”
“확실히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머리 옆에서는 파랑새가 고요히 날갯짓했다. 벤하민은 옆으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보며 손을 뻗었다.
파랑새를 두 손으로 붙잡자 날개를 퍼덕이던 새가 손바닥 위에 얌전히 앉았다.
“데리고 나가라는 거냐?”
고요한 날갯짓이 손바닥 위에서 이어졌다.
* * *
너희는 왜 나를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대접해. 너희는 왜 또 나를 밑바닥에 처박고 짓밟는데……!
“이 계집이 미쳤……!”
샤를로프는 석궁에 총탄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먹먹한 가슴을 억누르던 울분도 서서히 가셨다.
‘후련함이던가?’
어머니의 유골함을 묻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제 내연녀를 집안에 들인 아버지란 작자도…….
거기서 의붓동생의 손을 쥐고 온 내연녀란 작자도…….
“다음에는 그 입에 쏴버릴 거야.”
“히익!”
“더 할 거야?”
총탄을 한 번 더 장전하는데, 클로에가 그대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엎드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 개운할 것 같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빌어먹을 것 같으니라고!”
샤를로프가 석궁을 내려놓자 클로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천막 밖에서 하녀와 어린아이가 멈춰 서 있었다. 어린아이를 끌어안은 하녀가 당황하며 뒷걸음쳤다.
“엄마?”
헨리에타가 클로에를 보고 손을 뻗었다. 방긋방긋 웃던 헨리에타는 금방 의기소침해졌다.
아이는 부모의 표정에 민감하다. 뭣 모른다고들 하는데, 부모의 표정이 어두우면 아이도 같이 불안해진다.
“헨리에타에게는 손대지 마!”
그래도, 자기 자식이라고 예쁘긴 하구나. 샤를로프는 헨리에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작은 머리다. 지금은 너무 작아서 나도 뭘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네 부모가 저지른 죄가 네 죄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너를 좋아하기도 힘들잖아.
“네게는 미안해.”
헨리에타.
“그래도, 어쩌겠니?”
저 집안이 그런 집안인 것을. 네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네게는 죄가 없지만, 내 악의에도 죄가 없다.
샤를로프는 헨리에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제 앞길을 막아선 하녀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꺼져.”
총성을 듣고 몰려든 하녀들이 우물쭈물 망설였다.
샤를로프는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내고, 석궁에 장전해둔 총탄을 분리했다.
따분해. 지겨워. 여기가 너무 싫어.
“이만 가자. 피곤해.”
카타리나는 그 뜻을 이해하고 길을 열었다.
* * *
윈저가의 천막에서 나른하게 졸고 있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또독. 똑똑.
천막 밖으로 빗소리가 울렸다.
샤를로프는 간이침대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밖에서 산책하던 귀부인들도 급하게 천막으로 몸을 피했다.
“오늘 원래 비 내린다고 했던가?”
아침까지만 해도 날이 맑았다. 비구름으로 숲 전역이 어두워졌다.
먹구름 낀 하늘은 물을 쏟아붓고 있었고, 흙바닥 여기저기에서 물웅덩이가 파였다.
“아가씨 여기 계시면 비 맞습니다.”
샤를로프가 천막 밖으로 걸음을 딛자 카타리나가 우산을 가져왔다.
“갑자기 웬 비야?”
“소나기 같습니다. 먹구름이 갑자기 끼더니 이러는군요. 그래서, 사냥터에서도 하나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사냥대회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그런데 이 상태로는 대회를 이어나가기가 힘들었다.
비가 더 이어지다간, 사냥터로 떠난 사람들이 길을 잃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 없습니다.”
“외삼촌 두 분은?”
“그분들께서도 아직 감감무소식입니다.”
천막은 숲의 입구에서 적정거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샤를로프는 우산을 넘겨받아서 공터 앞으로 나왔다.
빗물이 우산을 톡톡 두들겼다.
흘러내리는 빗물이 어깨를 차츰차츰 적셨고, 드레스 하단이 빗물에 젖어 들었다.
빗줄기가 시원하게 쏟아붓자, 사냥터에서도 비를 피하는 사람들이 서둘러 빠져나왔다.
“사냥터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군요.”
샤를로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저들이 나오는 거면, 외삼촌도 곧 오겠어.”
걱정은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우천으로 사냥대회는 중간에 중단됐다.
“아가씨 천막으로 가서 기다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비 내리는 거 오랜만이어서. 좀 걷고 싶어. 나중에 외삼촌께서 오시거든 말해줘.”
노란색 우산은 화려하지만 시야를 다 가렸다. 샤를로프는 우산을 가만히 보다가 내려놨다.
땅바닥에 우산을 내려놓자 카타리나가 놀라서 우산을 다시 집어드는데,
“괜찮아.”
샤를로프는 괜찮다고 거절했다.
“좀 걸으려고.”
“감기 걸리십니다. 아가씨를 이대로 보내드리면, 제가 나중에 가주님께 혼납니다.”
샤를로프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물을 심오한 기분으로 올려다봤다. 그도 그럴 게, 지금처럼 빗물을 맞아본 게 언제였는지, 제 기억 속에서도 지워진 지 오래였다.
“상쾌하잖아. 비냄새도 오랜만이거든.”
“……아가씨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맞고 싶어서 그래.”
“지금 이 모습을 윈저가의 두 분께서 보시면 대경실색하실 겁니다.”
샤를로프는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가슴 안이 차게 식었다. 붉은 머리칼이 빗물을 머금고 가라앉았다. 손을 뻗자 빗물이 손가락에 닿고 흩어졌다.
“태자 전하께서는 심기가 불편해져서 오겠어.”
“네?”
“비에 젖는 거 안 좋아할 거라고.”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폐후가 처형된 날이 비가 쏟아지는 장마철이었다.
폐후는 쏟아지는 비 아래에서 처형대에 올랐고, 그곳에서 목이 잘렸다.
벤하민도 비공식적이었지만 거기에 있었다.
벤하민이 장마철에 유독 신경이 날카로워지자, 심복들이 왜 그럴까 고민하다 알려진 부분이었다.
“그러는 아가씨께서는 온통 다 젖었잖습니까? 태자 전하께서 보시면 어쩌려고…….”
“글쎄. 미련하다고 욕할까?”
그래도 있잖아.
“나는 왜 이게 더 후련할까?”
혼자서 멍하니 서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샤를로프가 고개를 내리자, 키가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헨리에타가 땅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서 샤를로프에게 건넸다. 그녀가 바닥에 놔둔 노란 우산이었다.
샤를로프는 머리칼을 배배 꼬며 웃었다.
“그걸 왜 내게 건네니?”
“이거 써.”
“내가 왜 너의 호의를 받겠어?”
네게 호의를 베풀 이유도 없고, 네게 호의를 받을 이유도 없다.
샤를로프는 헨리에타가 내민 우산을 손끝으로 밀어냈다.
“내게 다가오지 말렴.”
우산이 흙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네가 이러면 불편해.”
손가락을 타고서 물이 흘러내리고, 온기가 차게 식으며 입술이 창백해졌다.
샤를로프가 막 등을 돌리려는데, 아이가 그런 등을 붙잡았다.
“우산 써야 해요.”
헨리에타는 가느다란 손에 우산만 쥐여주고 하녀와 멀어졌다.
나는, 나는 네가 이럴 때면 너무 싫어지더라. 너무 비참해지는 기분이라서.
샤를로프가 망연하게 우뚝 멈춰 서 있는데 숲 입구가 분주해졌다. 폰트리아 숲 입구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다.
“저거, 뭡니까? 숲에서 뭔가 나오는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나오고 있잖아?”
“아닙니다. 사람이 나오는데 땅이 이런 식으로 울릴 리 없잖습니까! 곰, 곰입니다! 미친 흑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