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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머리를 노려. (15/51)


#15. 머리를 노려.
2023.04.21.


샤를로프는 잠시 멈칫했다가 답했다.


“우연히요. 향이 좋아서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세상 삶이라는 게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커피가 완전히 자리 잡은 건 몇 년 뒤의 일이었다. 이른 아침에 마시면 머리가 맑게 개고, 피곤함이 가시는 효과 덕분에 귀족들 사이에 유행이 돌았다.

샤를로프는 뻣뻣하게 가슴을 쓸었다.


“괜찮으냐?”

“네?”

“가슴이 답답한가 해서.”

“괜찮아요. 그런데, 아침부터 왜 부르셨어요?”

“내가 너를 부른 이유가 다른 건 아니고. 어제 귀가 시간이 늦었다던데…….”

이 이야기가 외조부 귀에 들어갈 만큼 심각한 사항이었나?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도 있는데,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냐?”

“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우리도 너를 구속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래도 사람이 기다리는데 소식쯤은 넣어줘도 되잖느냐?”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디를 나간다면 나간다고 이야기하고. 늦는다면 늦는다고 이야기하고.

다만, 샤를로프는 그런 당연한 것들을 한 번도 누린 적이 없기에. 이런 사실들마저도 낯설었다.


“유념할게요.”

“네 아비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네 아비가 예전부터 애먼 곳에서 힘을 쏟는 버릇이 있었다지.”

“누가 이야기하던가요?”

“그놈 이야기는 태자 전하께서 내게 직접 이야기해주셨다. 늦었다고 나무라지 말라는 의도였으니, 너도 그분께 서운해하지 말아라.”

레안드로는 망설임 끝에 말을 정돈했다.


“이번 일도 그렇고. 곧 사냥대회도 다가오고.”

레안드로는 서랍장에서 검은색 함을 꺼내더니 샤를로프 앞에 내려놓았다.


“석궁이다. 화살이 아닌 총탄을 장전하는데, 크기도 크지 않고 무게도 가벼워서 들고 다니기 편할 테다.”

손바닥 하나에 올라오는 크기였다.


“이걸 왜?”

“너도 소동물 사냥터는 한번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아서.”

“이번 사냥 대회에 외할아버지께서도 참석하세요?”

“다 늙은 몸으로 내가 어디를 다녀오겠냐? 네 외숙부들만 보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두거라.”

레안드로가 석궁을 샤를로프에게 넘겼다.

샤를로프는 함에서 석궁을 꺼내서 손아귀에 쥐었다. 손아귀 하나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접이식으로 됐는데, 길게 접어놨다가 시위를 당기면 석궁이 옆으로 벌어졌다.

안쪽에 총탄을 네 개까지 장전해둘 수 있었다.


“네 외숙부들은 위험하다고 주지 말라는데, 네가 그걸로 사람을 쏠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겠냐?”

 

* * *

샤를로프는 밤늦게 석궁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레안드로 공께서 네게 위험한 걸 쥐여주었어.”

그녀가 맞은편 나무를 과녁이랍시고 맞추고 겨냥하는데,

벤하민이 석궁을 만지작거리더니 맞은편에 과녁을 임시로 가져다 놓았다.


“팔도 가늘어서 괜히 석궁을 놓치는 건 아닌가 몰라.”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팔뚝을 감쌌다.

가느다란 팔뚝에 손가락이 닿고, 벤하민이 그녀의 어깨를 넓게 폈다.

등 뒤에서 맞닿은 몸이 유난히 컸다. 그의 손끝은 딱딱했다.


“안 쏴?”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샤를로프는 그제야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정중앙에 꽂혔다.


“타격감도 좋고 명중률도 높네. 사용하기도 쉬운 것 같아.”

“나, 무기는 만져본 적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배워둬. 조작법도 간단하고 배워두면 어딘가에는 쓰일 거야.”

석궁을 장전하는 건 한 손이면 된다. 한 손으로는 석궁의 몸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석궁을 장전해서 방아쇠를 당기면 총탄이 날아간다.


“어깨와 팔이 흔들리면 안 돼.”

벤하민이 등 뒤에서 어깨와 팔뚝을 붙잡아서 고정했다.


“시선이 흔들리잖아, 샤를.”

벤하민은 짧은 사이에 눈앞의 과녁과 석궁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석궁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고 과녁을 맞히는 순간까지. 그는 모든 게 매끄러웠다.


“눈으로는 과녁만 똑바로 봐. 무게도 감량했잖아. 손은 왜 떨어? 손목 떨지 마. 손목 단단히 고정하고 방아쇠를 당겨. 어깨도 똑바로 펴고 어깨 굽히지 마.”

벤하민이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하나하나 잡아주었다. 석궁의 총탄이 빠르게 날아가더니 과녁에 박혔다.


“소형동물 하나 잡기에는 무기가 굉장히 사치스럽네요.”

“그래도, 소형동물의 머리를 하나 날리기에는 충분한 무기지.”

벤하민은 심상한 어조로 다시 샤를로프의 자세를 바로잡았다.


“팔 들고 과녁 다시 봐봐.”

조작법에 미리 익숙해져야지 된다. 벤하민은 그리 이야기하며 조작법을 세세히 설명했다.


“잘 배워두고.”

벤하민이 짧게 읊조리더니 은은히 웃었다.


“앞으로는 누가 귀찮게 하거든 머리를 쏘면 돼.”

“당신 굉장히 과격해졌어요.”

“가볍고 조작법도 쉬워서 샤를 너도 쉽게 맞추겠어.”

벤하민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샤를로프는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밀쳤다.


“사냥대회잖아, 샤를.”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어깨를 두들겼다. 지금부터는 혼자서 해보라며, 석궁에서 손을 뗐다.


“혼자 해볼래?”

“일단은 한번 해볼게요.”

“똑똑한 샤를이라면 금방 적응할 거야.”

벤하민이 손을 놓고 이번에는 혼자 연습했다.

그 뒤, 벤하민은 “훌륭해. 한 번에 머리를 맞추겠어.” 하고 흡족하게 웃었다.


 

* * *

샤를로프는 사냥대회 때 입을 옷을 맞추고, 거기에 어울리는 장신구도 맞췄다.

연하늘색 브로치였다. 그리고 브로치 색상에 맞춰서 손수건도 사들였다. 이건, 벤하민에게 줄 예정이었다.


“자수는 자신 없는데, 태양이면 될까?”

베키가 손뼉까지 치며 호응했다.


“황실의 상징 아닙니까? 태자 전하께 더없이 어울리는 자수로군요!”

손수건 색감은 일부러 다양하게 맞췄다. 가문 인장과 이름까지만 수놓으면 충분할까.


“솜씨가 조악해서 괜히 비웃음만 사는 건 아닌가 몰라.”

“윈저가 식구들 모두 기뻐할 겁니다.”

베키와 하녀가 당연하다며 하는 대답에, 샤를로프는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외가댁 식구들이라면 걱정도 안 한다.


“벤하민이 비웃을까 그랬는데…….”

“아마도, 태자 전하의 인성이 그리 나쁘진 않을 겁니다!”

사냥대회의 전날 밤이었다. 샤를로프는 손수건을 챙겨 레안드로의 집무실을 찾았다.

집무실 앞은 불을 꺼둬서 어둑했다. 그런데도 집무실 안에서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똑똑

샤를로프가 문을 두들기자 안쪽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레안드로가 작성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고요히 눈짓했다.


“늦은 밤에 어쩐 일이냐?”

“내일이면 사냥대회잖아요.”

샤를로프는 레안드로의 탁자에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나는 사냥대회에 안 간다. 아직 듣지 못했느냐?”

“할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잖아요. 기억해요.”

레안드로는 가문을 지키고, 사냥터까지 동행하는 건 아스터와 세자르의 몫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사냥대회에 참석하지 않으시지만, 다른 가족들께 선물하면서 할아버지만 빼먹는 건 또 아닌 것 같아서요.”

레안드로는 말없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내게 주는 거라고?”

“다른 두 분께도 챙겨드릴 거예요.”

레안드로는 부드러운 손수건의 촉감에 손끝을 작게 떨었다. 떨림은 손수건 아래에 손이 묻혔지만, 천 아래에서 작게 떨리는 손짓이 느껴졌다.


“사냥터에서는 단독행동은 금물이다. 카타리나와 어딜 가든 동행해라.”

“걱정하지 마세요. 무모한 짓 안 할게요.”

샤를로프가 매끄럽게 대꾸하는 모습에 레안드로는 눈을 감았다.


“고맙다.”

레안드로가 뱉은 한마디에, 샤를로프는 고요히 고개만 끄덕였다.


“좋은 밤 보내세요.”

“너도,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레안드로가 손수건을 손아귀로 긁어 쥐었다.

샤를로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아내다가 조용히 집무실에서 나왔다.

* * *

사냥터까지는 윈저가의 마차로 이동했다.

폰트리아 숲은 황실 소유의 폰트리아 땅에 자리 잡았다고, 폰트리아 숲이라고 불렸다.


“세상 무덤덤하던 네 표정에도 빛이 드는 날도 있구나.”

샤를로프가 마차 창밖을 내다보는데, 아스터가 맞은편에서 신문을 접으며 이야기했다.


“네 외조부께서는 가문 일로 바빠서 같이 오지 못하셨다.”

“전날 밤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셔서 알고 있었어요. 사냥터에는 거의 도착한 것 같은데 아직인가요?”

높은 침엽수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마침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숲의 초입에 도착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근위대가 숲 인근을 지키고 있고, 우리는 윈저가의 막사로 향했다.


“왔느냐?”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다. 나도 막 막사로 온 참이었어.”

먼저 도착했던 세자르가 막사에서 우리를 반겼다. 샤를로프는 막사 안에 있는 간이침대에 그대로 앉았다.


“외삼촌 두 분도 사냥대회에 참석하시는 거죠?”

“황실에서 직접 개최하는 건데, 참석하는 성의는 보여야지. 우리는 나가 있을 테니까, 막사 안에서 좀 쉬고 있어.”

두 외삼촌은 밖에 있겠다며, 카타리나만 남겨두고 떠났다. 샤를로프는 막사 안쪽을 찬찬히 살폈다.

넓은 막사에 융단을 깔아두고 거기에 탁자와 소파를 놓았다. 안쪽으로는 간이침대까지 가져다 놓았는데, 객실 하나를 통째로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봐도 되나?”

카타리나가 고요히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다고?”

그러자 카타리나가 막사 천막을 열어주며 밖을 손짓했다.

카타리나는 그녀가 기억하기로, 벤하민이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에 곁에서 있던 기사였다.

엄밀히는 황태자 직속 세력이었다. 전생에 소식지에서 초상화만 잠깐 봤는데…….


“샤를?”

샤를로프는 익숙한 부름에 맑게 웃었다.

사냥터 초입은 넓은 공터였다. 사냥대회에 참석할 기사들이 많이들 모여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윈저가의 기사단을 발견했다. 세자르와 아스터도 거기 있었다.


“외삼촌.”

아스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왜 나와 있는 거냐? 막사 안에서 쉬랬더니?”

샤를로프는 아스터와 세자르에게 윈저가의 문양을 수놓은 손수건을 건넸다.


“잊을 뻔했어요. 무사히 다녀오세요.”

“이걸 네가 한 거냐……?”

외삼촌들께 드릴 손수건은 전날 밤에 완성됐다. 손수건 하단에 이름을 필기체로 수놓고 거기에 문양까지 더하자, 볼품없는 솜씨임에도 보기에는 괜찮았다.


“솜씨는 부족할지 몰라요. 그래도 정성이겠거니 여겨 주세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손가락 감각이 좀 둔하거든요.”

세자르가 샤를로프에게 손수건을 다시 내밀었다.


“네가 매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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