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무덤에서 나왔고. (14/51)


#14. 무덤에서 나왔고.
2023.04.18.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노을이 졌던 하늘은 검게 물들었다.


“놈들은요?”

샤를로프는 절벽 끝자락에 서 있던 몸을 돌렸다.


“놈들 데리고 사라지시더니요?”

샤를로프는 벤하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가 위태로이 서 있던 샤를로프를 흘끔 내려다보고 되물었다.


“듣고 싶어?”

“…….”

“괜찮아. 곱게 돌려 보내두었어.”

“저대로 돌려보내도 되나요?”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내려다봤다.


“안 되지. 아마도.”

“돌려보냈다면서요?”

“응. 뭐가 됐든.”

벤하민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놈들 소지품에서 나온 몹쓸 약품류만 아니었다면.

벤하민은 은은히 미소 지으며 샤를로프를 불렀다.


“샤를.”

샤를로프는 부름에 눈을 깜빡였다.


“왜요?”

“숨이 가늘어. 마치 숨 쉬는 게 답답하다는 듯 말이야.”

샤를로프는 뻣뻣하게 목을 더듬거렸다.

턱 끝에 닿았던 죽음이 아직도 또렷했다.

뻣뻣하게 목을 더듬을 때면, 죽어가던 그날이 떠올랐다.

기도가 굳고. 폐가 굳고.

온 관절들이 굳어가며 목각처럼 변해가던 순간순간들.

샤를로프가 목에서부터 쇄골까지 더듬거리던 때였다.


“목을 왜 더듬거려?”

“네?”

“강박적으로 목을 더듬거리잖아.”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목을 손으로 감쌌다.

숨이 대번에 턱 막혔다. 힘주어 쥔 것도 아니었다. 보드랍게 감싸 쥐고,


“숨 쉬는 게 어려워?”

“이런 장난치지 말아요.”

“내가 이런 장난이라도 치지 않는다면, 혼자서 분위기가 심각해지잖아.”

벤하민이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그의 눈이 코앞에서 검게 가라앉았다.

검은 눈동자는 그를 닮아서 깊고 또렷했다.


“무덤에서 겨우 기어 나왔어요. 그런데, 저들이 나를 다시 흙바닥에 처박았네요.”

벤하민이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말이 과격하구나. 샤를.”

“…….”

“밤바람이 차가워 이만 돌아가자.”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옷자락을 여몄다.


“마차를 준비해둬라.”

샤를로프는 목덜미를 더듬거리던 손을 내렸다.

우리 부녀지간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아버지가 내연녀를 데려온 것도 이제는 괜찮다.

그 사생아를 가문에 품은 것도 유감은 없다. 어머니가 죽은 것도 이제는 먼 기억이었다.


“왜요?”

“너는 뭐랄까.”

“네?”

“어려워.”

“어째서요?”

“네 속을 잘 모르겠어.”

벤하민이 말끝을 흐리며 미소 지었다. 눈매가 곱게 접히는데, 좁은 눈매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눈동자가 짙고 탁했다.

카타리나가 ‘큼큼’ 하고 인기척을 냈다.


“마차가 준비됐습니다.”

하늘이 벌써 어두워졌다. 이만 떠날 시간이었다.

벤하민은 다른 이야기 없이 샤를로프의 이름만 곱씹었다.


“샤를. 샤를로프. 샤를로프 윈저.”

샤를로프는 고개를 젖히고, 벤하민과 눈을 맞췄다.


“지금에서야 깨닫는데, 친모를 막 잃은 직후 아닌가?”

“네. 맞아요.”

“그런데 슬픔이랄 게 없어.”

이 무렵 자신이 어땠더라? 친모를 막 잃은 시점이었다.

이런저런 슬픔이 물밀듯 밀려드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아요.”

친모 얼굴도 영정사진을 봐서 겨우 기억났다. 몇 년만 안 봐도 잊히는데, 십수 년이 흘렀다.

친모를 잃은 아이는 나이든 어른이 됐다.

* * *



“네가 제정신이냐! 이 시간까지 밖에서 뭘 한 게야? 집에 일언반구도 없이 어디를 다녀온……!”

샤를로프가 집에 도착하고, 늦게 도착한 그녀를 보며 윈저가 식구들이 노발대발했다.


“나랑 같이 있었어. 너무 나무라진 말아줘.”

벤하민은 담백한 어조로 아스터를 진정시켰다. 아스터는 샤를로프를 한번 흘끔 내려다보고, 벤하민에게 답했다.


“그래도요. 늦으면 늦는다고 말씀해주셨어야죠? 뻔히 기다리는 식구가 있는데, 소식이 없으면 어쩝니까?”

샤를로프는 약간 당혹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뻐끔거렸다.

누군가 기다린다는 사실 또한 오랜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늦으면 늦는다고 말해줘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렸다.

샤를로프가 입술을 뻐끔거리는데, 벤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시간이 이 정도로 늦을 줄은 몰랐어.”

“계속 같이 있었습니까?”

“응. 그랬지.”

“괜한 걱정이었는가 봅니다. 태자 전하께서도 안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벤하민은 샤를로프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답했다.


“됐어.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샤를로프 너는 이만 들어오너라. 날도 추운데 밖에 세워뒀어.”

샤를로프는 처음으로 어색함을 느꼈다.


“들어가.”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주춤거리던 샤를로프는 발을 딛고 뒤를 돌아봤다.


“내 약혼녀께서는 속이 복잡해. 아스터, 그녀를 따뜻한 목욕물에 집어넣고 한동안 쉬게 놔둬.”

“네?”

샤를로프는 당혹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저대로 놔두면 애 하나 잡을 것 같아.”

벤하민은 그녀를 놔두고 떠났다. 그는 그림자 너머로 고요히 사라졌다.

샤를로프가 대문 앞에서 우뚝 서서 가만히 있자, 아스터가 ‘샤를. 샤를로프?’ 하고 그녀를 불렀다.


“식사는 했냐?”

“아니요. 아직 저녁 전이에요.”

“너는 이 시간까지 식사도 않고 뭘 한 거냐? 일단, 그래! 하녀장은 저 아이를 목욕물에 집어넣어라. 아이 몸에 서리가 앉겠어. 추운 줄도 모르나?”

샤를로프는 그제야 콜록대며 목을 가다듬었다. 찬 공기 때문에 코가 따끔했다.

콧등을 만지작대는데, 하녀가 서둘러 달려와 담요를 덮어 주었다.

* * *



“튜텨 후작이 밖에서 낳은 아이와 내연녀를 데려다 놓았다는군요.”

로스켈라는 단검으로 살수의 목을 꿰뚫었다.


“샤를로프가 또 마음 쓰겠어.”

벤하민이 나지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안주인이 죽고, 바로 데려올 작정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파양되면서 일정이 꼬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몸이 아파서 일단 데려다 놓았고, 아가씨도 다시 데려갈 작정이던 것……!”

로스켈라는 흠칫하며 목을 급하게 뺐다.

또 다른 살수 하나가 그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로스켈라가 손으로 다급하게 막으려는데, 벤하민이 놈의 목덜미를 붙잡고 내팽개쳤다.


“조심해.”

“감, 감사합니다.”

주변의 살수들이 속속들이 정돈됐다. 그림자가 발밑으로 꺼지듯, 모든 게 일순간 고요해졌다.

로스켈라는 제 주군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벤하민은 평소보다 조금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피곤하십니까?”

“약간은”

“오늘 외출이 길었지요?”

로스켈라는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바닥에 버렸다.


“아무튼, 뭐가 됐든 아가씨께서 부딪칠 건 뻔해 보입니다. 아가씨께서 가문에서 파양됐으니, 다섯 살짜리 아이가 튜텨가의 유일무이한 핏줄이 되겠군요?”

벤하민은 손에 쥔 칼을 떨구었다. 눈동자에 깃든 생기가 조금씩 없어졌다.


“아가씨께서 상심이 크겠습니다.”

그럴까.


“슬픔을 섣불리 꺼내 보이는 아이가 아니야.”

샤를로프는 제 속내를 먼저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서는 괴리감이 흘렀다.

샤를. 샤를로프. 그 이름을 속삭이던 벤하민은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목이 타서.”

“태자 전하께서는 고상함으로 몹쓸 성향을 숨길 필요가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봤다간 아주 대경실색하고 도망치겠습니다.”

벤하민은 제 존재감을 죽였다.


“태자 전하.”

정보관들이 담벼락을 넘어서 합류했다. 살수를 처리한다고 흩어졌던 수하들이었다.


“살수는 정돈됐습니다.”

벤하민은 빈 골목을 돌아봤다.

고요한 밤거리에는 누가 다녀갔는지도 모를 만큼 인기척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 * *

샤를로프는 머리를 헝클이며 주섬주섬 침대에서 나왔다. 설렁줄을 당기자 베키가 세숫물을 가지고 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샤를로프는 뻐근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저녁에는 감기 기운이 조금 있으시더니 오늘은 어떠셔요?”

“괜찮아. 어제도 따뜻한 물로 바로 목욕했잖아.”

“다행이에요. 지금 이 시기에 감기라도 걸렸다간 야단나요.”

샤를로프는 연한 파스텔 색조의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는 화장도 않고 편안한 차림으로 소식지를 챙겨 들고, 테라스 소파에 기대앉았다.


“곧 사냥대회잖습니까? 손수건은 준비해 두셨습니까?”

“그런 일정도 있었나?”

“혹시 잊고 계셨습니까?”

“아니야. 지금 막 기억났어……. 그게 이 무렵이었구나.”

샤를로프는 이 무렵 크게 앓아누웠다.

어머니의 부재에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던 아이는 끝끝내 실신했다.


“아가씨?”

베키가 그녀를 부르며 테라츠 유리창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응.”

“참석하시죠?”

“외가댁 식구들도 모두 참석할 텐데 같이 참석해야지.”

샤를로프는 매끄러운 손짓으로 소식지를 덮었다. 이 소식지에서도 곧 있을 사냥대회를 다루고 있었다.


“아, 그리고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셨어요.”

베키가 소식지를 받아서 챙겼다. 샤를로프는 의자 한쪽에 걸쳐두었던 숄을 챙겨서 어깨에 덮었다.


“할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다녀올게.”

밖으로 나오자 환기를 한다고 창이 다 열려 있었다.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뺨을 때렸다. 한쪽 눈을 게슴츠레 찌푸린 샤를로프는 손등을 올려 시야를 가렸다.

햇볕이 따가웠다.

샤를로프는 숄을 만지작대며 밑에 층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가주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할아버지는 집무실에 계시나요?”

집사가 은은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레안드로가 보였다. 레안드로가 돋보기안경을 맞추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샤를로프는 집무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바쁘시면 나중에 찾아뵐까요?”

“됐다. 문 열어뒀으니 들어오너라.”

샤를로프는 방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에서는 쌉싸름한 커피 향이 가득했다. 달달 볶아서 고소해진 커피콩을 갈아서 내리면, 이런 고소한 향이 퍼진다. 오랜만에 맡은 커피 향에 신경이 쏠렸다.


“이게 뭔 줄 아느냐?”

“커피잖아요.”

“원두를 수입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디서 본 거냐?”

레안드로가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네가 먹어볼 기회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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