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약해,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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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약해,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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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약해, 너는
2023.04.14.
아론의 약방에서는 옅은 약초 향이 풍겼다.
아론은 샤를로프를 약방에 앉혀두고, 찻물을 가져온다며 나갔다.
여기도 오랜만이었다.
약방에는 단출한 서랍과 환자 침대가 다였다.
마침, 아론이 약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편히 앉아라. 마실 건 없고, 약초 달인 물이 있어서 가져 왔다. 심신 안정에 좋을 거야.”
아론은 외할아버지와 같은 나이대였다.
흰 머리카락이 약간 곱슬곱슬했는데, 그게 의외로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겼다.
“어머니는 잘 보내드리고 온 거냐?”
“네. 덕분에 잘 보내드리고 왔어요”
“지난 며칠 무슨 일이 있었는가 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줄 알았어.”
“변하기는요. 똑같아요.”
아론에게는 고작 몇 주의 시간이지만, 샤를로프에게는 십수 년이 흘렀다.
아론은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낡은 약방 건물에,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 때문에 깐깐한 인상이 짙었다.
“어머니 부고 소식을 전해드리는 게 맞지 싶었어요.”
“삼 주나 지났나? 네 발걸음이 갑자기 끊겨서 나도 예상은 했었다. 네 엄마 임종이 눈앞에 다가온 것도 같았고. 그래도, 네 입으로 직접 전해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구나.”
제 친모의 죽음을 입에 담는 녀석이다.
친모를 잃은 지 고작 몇 주 됐나?
그런데, 저 아이는 꼭 먼 옛날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라도 꺼내 보듯, 저 눈은 먼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이상한 녀석 같으니라고.”
아론은 벤하민을 알아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익숙한 얼굴이군.”
“다 늙은 처지에 황실 어른과 연이 닿을 게 뭐 있겠습니까? 잘못 봤습니다.”
아론은 몸을 엉거주춤하게 숙였다.
다 늙어서 허리도 구부정하고, 무릎 관절도 시원치 않다.
“아무리 판잣집 약방에서 일하는 노인네라도 고귀한 핏줄은 알아보는 법이지요.”
아론은 툴툴대며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기다리십시오. 늙은이가 뭐 좀 챙겨드리리다.”
샤를로프는 약방 마루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도 약초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늙은이 번거롭게 말고 이만 가거라.”
아론은 구부정한 몸으로 둘을 배웅했다.
“약초 좀 챙겨 넣었다.”
“감사합니다.”
“네게 감사 인사나 듣자고 챙겨준 거 아니다. 응? 너는 무슨 녀석이 감사 인사가 이 정도로 헤프냐?”
“알았어요, 아론.”
“또 어디 뛰어다니다 애처럼 무릎 까지지 말고. 네 몸 간수부터 잘하거라. 네 몸이 편안해야, 네 앞길이 평탄해지는 거야.”
아론이 챙겨준 약초는 흰 봉투로 감싸 놨다.
고무줄로 대충 묶어두었지만, 흰 봉투는 손때 하나 묻지 않고 깨끗했다.
“전하 몫으로는 진통제를 넣어두었습니다. 둘 다 명줄 간수 잘하십시오.”
아론은 거리낌 없이 둘을 핀잔했다.
다 늙어서 곧 죽는다고. 황실이란 권력 앞에서도 주눅 듦 없이 꼿꼿했다.
“뭐 더 궁금한 건 없고?”
여기 온 목적을 잊을 뻔했다. 아론이 이야기하라며 눈짓했다.
“루퍼틱 병이라는 걸 아나요?”
“생소한 병명인데 들어는 본 것 같다. 그건 왜 묻는 거냐?”
“혹시 이 병에 대해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루퍼틱 병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병이었다.
어차피 십수 년 뒤고 당장 급할 건 없다. 그렇다고 느긋할 일도 아니었다.
“이만 돌아가거라.”
샤를로프는 매끄럽게 웃어 주었다.
* * *
저녁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아론의 약방에서 나와서, 둘이서만 산책 겸 길가를 걸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요.”
샤를로프가 앞서 걷고, 벤하민은 뒤를 따랐다.
“자주 오던 곳인가?”
“어머니 살아 계실 적에는요. 혼자 약방 다녀오는 길에 산책 겸 자주 찾았어요.”
샤를로프는 익숙하게 빈 공터를 지났고, 땅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눈앞에 깎아내지른 절벽이 펼쳐졌다. 샤를로프는 그렇게 절벽 앞에 섰다.
절벽 아래로 시야가 넓게 트였다.
하늘이 노을로 점점 붉어오고, 그녀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알았나?”
벤하민이 샤를로프에게 물어왔다.
“무엇을요?”
“저 약장수 말이다.”
아론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오랜만이군.”
“익숙한 얼굴이었죠?”
“어머니께서 곁에 두었던 약장수였지.”
아무리 넓은 제국일지라도, 사람 간의 인연이라는 건 짧게라도 맞닿는 법이었다.
“아론이 직접 이야기했나?”
“황후 폐하께서 처형되고 몰래 빠져나와 숨죽여 사는 분이에요. 직접 이야기했을 리 없잖아요.”
“그러면?”
“명패를 우연히 봤거든요. 솜씨는 좋은데 판잣집 같은데 숨어서 지내는 게 이상하기도 했고.”
아론이 황후와 접점이 있었다는 건 이후에 알게 됐다.
황실 소속 명패를 몰래 보관하던 걸 우연히 봤었다.
옛날에는 못 본 척 넘겼다.
어머니 병이다 뭐다, 밖으로 신경을 쏟을 여유도 없었고.
‘지금에서야 여유가 돼서 떠올렸지.’
샤를로프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벤하민을 흘끔거렸다.
“나름 반가우셨을 텐데요.”
“그분께서도 반가워하셨을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다시 찾아뵈어도 돼요.”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뒤에서 가느다란 목덜미를 만지작댔다.
“목걸이 오늘도 했나?”
벤하민의 시선이 목걸이 줄에 닿았다.
약혼을 준비하면서 마련했던 빙석 목걸이였다. 녹지 않는 얼음이랬나?
투명하면서도 푸른빛을 띠는 모습이 여느 보석과는 달랐다.
“그래도 차가운데, 자주 하고 다니진 마.”
“네?”
“몸이 차가우면 안 좋다던데…….”
벤하민 손끝이 보석에 닿았다. 차가운 냉기가 그의 손가락에 스며들었다.
“차갑잖아.”
“화려하게 적들 눈에 거슬리라면서요.”
“확실히 내가 그랬지.”
화려함은 눈을 미혹한다. 아름다움은 시선을 잡아끌고, 악의를 빚어낸다
덕분에 아주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그건 그렇고.”
벤하민이 손끝을 굳혔다. 굵은 손가락이 멈칫하는 것 같더니, 샤를로프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일행을 몇 빼먹었나?”
“잠시 둘이서만 걷겠다고 호위를 물려두었잖아요?”
“아니. 그것 말고.”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기척이 몇몇 따라붙어서 말이야.”
벤하민이 시선을 멀리 던졌다.
“떠돌이 개인 줄 알았는데, 남의 집 개였나?”
“네?”
“짜증 나는군.”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그의 뒤로 보냈다.
“여기서 기다려, 샤를.”
샤를로프는 먼 허공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 로브를 눌러썼다.
노을이 서서히 저물었다. 그녀는 벤하민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물었다.
“누가 있나요?”
벤하민이 입술을 더듬거리며 답했다.
“누가 있는지는 찾아봐야 알 것 같고.”
그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나른하면서도 권태로운 걸음이 천천히 멈춰 섰다.
‘셋인가? 넷인가?’ 하고 중얼거리던 그가 은은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꺾었다.
벤하민이 어느 한 곳을 보며 속삭였다.
“찾았다.”
낮으면서 단조로운 어조였다. ‘거기 있었나?’ 하고 조금은 반가워했던 것도 같다.
벤하민은 팔을 뻗더니, 나무뿌리라도 뽑아내듯 놈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 셋이었다.
“우어억! 어억!”
벤하민이 당혹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건 또 뭐냐? 덤벙대던 놈들이 저들끼리 꼬여서 뒹굴었다.
놈들은 동그랗게 몸을 말고 바닥에 나뒹굴더니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살수라기에는 어수룩하고.”
벤하민이 놈들의 목덜미를 잡고, 기이한 생명체라도 보듯 혀를 찼다.
“살의가 없어서 놔뒀는데…….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는다고 내가 모르고 지나가겠나?”
“전, 전하!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벤하민은 상냥한 어조로 이야기하면서도 살의를 담백하게 담아냈다.
‘상냥한 척 군다고 상냥해지는 게 아니에요.’
샤를로프는 머리를 헝클이고 걸음을 디뎠다.
“누군가 했더니…….”
내가 저 얼굴들을 무슨 수로 잊겠나?
“아버지가 보냈어?”
튜텨가의 하인들이었다. 샤를로프는 무심히 걸음을 디뎠다.
“뭐해, 여기서?”
“아, 아가씨? 살려주십시오. 저, 저희는 그저……!”
샤를로프는 놈들의 머리맡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께서 또 엉뚱한 곳에 꽂혔나? 너희가 왜 여기서 기웃대고 있어?”
“우리는 그, 그냥! 가주님 명으로 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왜.”
“그, 그저……. 다른 이유는 아니옵고.”
샤를로프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피곤하다.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게 엮였구나. 샤를.”
벤하민은 거리낌도 없이 튜텨가를 ‘쓸모없는 것’으로 단정 지었다.
“더러운 건 일단 놓고.”
그가 단조로운 손짓으로 놈들을 놓아주었다.
“이대로 계속 기웃대게 놔두긴 힘들어.”
뒤를 밟힌다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잖아. 벤하민이 나른한 어조로 속삭이며 샤를로프를 내려다봤다.
“일단은 치워둘까?”
“어떡하면 좋을까요?”
“나라면 이대로 절벽으로 밀어버렸겠지만.”
그가 말끝을 흐렸다.
“너는 나약해.”
“네?”
“나약한 너는 힘들지 않을까?”
벤하민은 손을 털어내고, 손수건으로 손아귀를 닦아냈다.
“네 앞에서는 조심해야지 싶어서 놔뒀지만.”
“…….”
“역시 몰래 치울 걸 그랬어.”
소매치기 같은 잡범인 줄 알았는데.
저놈들 몸통을 접어다 절벽 아래로 내던졌어도 됐겠어. 벤하민은 고개를 떨구고 놈들과 눈을 맞췄다.
“샤를.”
벤하민은 샤를로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놈들이 왜 이러는지는 알아?”
이유도 없이 여기서 기웃댈 리는 없고. 그녀도 짐작되는 게 하나 있었다.
“내가 혼자 남길 기다린 모양이네요.”
튜텨가에서 아버지께서 보낸 하인들이었다.
일단은 샤를로프가 혼자 남아야 뭐라도 됐다.
“그러면 나를 튜텨가로 데려가든 말든 할 작정이었겠죠.”
문득, 허망함이 몰려들었다.
지난 세월은 어땠던가? 지난 삶에서 샤를로프는 홀로 죽어갔다.
누구도 찾지 않고 홀로 임종을 맞았다. 마지막 순간에 울부짖던 여인은 그렇게 죽었다.
한 번 죽었고 이제야 파양됐다. 그런데, 저들은 이제야 샤를로프를 찾아왔다.
저런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벤하민이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서, 혼자 남으면 어쩌려고?”
벤하민은 놈들의 머리 앞에서 몸을 수그렸다.
“어디 한 번.”
“……”
“끌고 가 봐.”
단조로운 말이 뚝뚝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