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고요하게 취하고.
(12/51)
12. 고요하게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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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요하게 취하고.
2023.04.11.
샤를로프는 위스키로 목을 축였다.
위스키가 따끔하게 목구멍을 할퀴었다. 뜨뜻미지근한 술이 식도를 닦아내고, 머리는 몽롱해졌다.
샤를로프는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산책로를 따라서 걷는데 찬바람이 살갗을 때렸다.
그녀는 위스키를 입안에 넣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뒷짐을 지고 빈 잔을 거꾸로 흔들자, 유리컵에 부딪힌 공기가 작게 울리는 것 같았다.
‘너는 네 몸 귀한 줄을 몰라. 샤를, 샤를, 내 아가.’
친모가 이따금 잔소리하듯 해준 이야기였다.
“잔소리는 넣어두세요.”
샤를로프는 멀거니 서서 허공을 올려다봤다.
“이런 독주는 오랜만이었다고요.”
저도 술은 최대한 늦게 배웠는데요.
죽고 눈떠보니 과거로 돌아와버린 제 처지도 이해해 주세요.
샤를로프는 그렇게 어머니 잔소리를 적당히 흘려보냈다.
“먹으면 머리가 몽롱해서,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편해지더라고요.”
그건 곧, 지금 제 삶은 조금도 편치 않다는 뜻이었다.
샤를로프는 한참 뒤에야 걸음을 다시 옮겼다.
걸음걸이가 위태로울지라도 자세는 꼿꼿했다.
“샤를?”
느긋한 목소리가 샤를로프를 불렀다.
매혹적이면서도 질척거렸다.
야외 산책로를 따라 걷던 샤를로프는 걸음을 멈추었다.
발아래는 밤길을 밝히는 조명을 깔아두었다.
밝은 달빛 아래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샤를로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왜 나와 있어, 샤를?”
벤하민이 산책로 한편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조곤조곤했다.
“바람 좀 쐬려고요.”
“술을 적당히 먹으랬더니. 술 냄새가…….”
벤하민이 걸어 나와서 샤를로프의 앞에 섰다.
“왜 여기 혼자 계세요?”
“오늘 네 하루가 고요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너무나 고요한 하루였다.
연회장 공기는 무르익었고, 샤를로프도 술기운에 흠뻑 젖었다.
“재밌게 놀았어?”
“제 나름은요.”
“그럼 됐어.”
몸이 느른해졌다. 샤를로프가 막힌 숨을 토해내는데, 벤하민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혼자 뒀다고 이러나?”
“왜요?”
“왜 이렇게 허술하게 있어?”
벤하민이 오른쪽 팔은 뒷짐을 지고, 왼쪽 팔로 샤를로프의 잔머리를 정돈했다.
샤를로프가 멀거니 서서 빤히 올려다보자, 벤하민도 시선을 내려서 눈을 맞춰왔다.
“왜?”
벤하민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벤하민 혼자 밖에서 뭘 하나 궁금해서요.”
벤하민은 모든 게 검은 사람이었다. 그가 고요히 읊조렸다.
“잠시만.”
칠흑 같은 어둠이 등 뒤로 드리웠다. 그리고, 그대로 그를 덮쳤다.
벤하민이 등을 돌더니 검을 쑤셔 넣었다.
“컥, 커걱!” 하고 단말마의 비명이 울리더니, 서걱거리며 무언가 잘렸다.
어둠인가? 그림자인가? 발밑에 무언가가…….
“지렁이처럼 꿈틀대는군.”
벤하민은 심드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조금의 유감도 없이 단조로운 태도였다.
밴하민에게서는 날것 그대로의 살기가 퍼졌다.
독니라,
벤하민은 독사 같았다.
독을 품은 이빨이 닥치는 대로 먹잇감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집어삼켰다.
벤하민이 검을 꽂아 넣으며 이야기했다.
“황비께서 살수를 보냈는데, 연회장으로 보냈다간 어지러워질 듯해서.”
살수는 눈을 뜬 그대로 죽었다.
샤를로프는 몽롱함에 눈을 끔뻑거리다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비볐다.
“샤를 많이 취했구나?”
“아니요.”
“지금 그 표정이 너무 고요하잖아.”
벤하민은 칼을 갈무리하고 옷을 가다듬었다.
“밖에서 정돈한다는 게 소란스러웠나? 나름 조용하게 처리했는데 말이야.”
벤하민이 손을 말끔하게 닦고 손수건을 바닥에 버렸다.
“연회는 거의 마무리됐고?”
“네. 끝나가요.”
“나도 마무리됐는데, 윈저가에 이야기하고 그만 저택으로 갈까?”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뺨을 짚었다.
“뺨도 뜨겁고. 봐봐. 취기가 올랐어.”
“그만 괴롭히세요.”
“아냐. 이것 봐봐. 네 뺨이 붉잖아.”
이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머리를 다독이며 속삭였다.
머리가 몽롱해서일까.
모든 감각이 흐릿했다.
이제는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나도, 괜찮아질 거예요.
“내일. 나랑 어디 좀 다녀오실래요?”
“어디를?”
“내일 말씀드릴게요. 혼자는 도저히 다녀올 용기가 안 드는 곳이라서요.”
샤를로프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땅이 움푹 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겼다.
벤하민은 잠든 샤를로프를 안아 들었다.
보폭이 느려지고 사부작대는 풀 소리도 고요해졌다.
윈저가의 마차 앞에 도착하자, 윈저가 식솔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같이 있었습니까?”
“그래. 어쩌다 보니까.”
“아이는 이리 주십시오.”
레안드로가 샤를로프에게 팔을 뻗었다.
벤하민은 잠든 샤를로프를 멀거니 내려다봤다.
고요하다.
그러나 음울하다.
이 표정이 묘하게 시선을 잡아끈다.
샤를로프가 가시넝쿨을 몸에 두르고 같이 밑바닥으로 가자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레안드로는 멀거니 서 있는 벤하민을 보며 숨을 죽였다.
벤하민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라고 손짓했다.
고요히 자거라. 오늘 하루쯤은 이래도 괜찮지 않겠냐.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레안드로에게 조심스럽게 넘겼다.
“아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모두가 연회장에 녹아들었던 때였다.
밖에서는 살수 몇몇이 소리 없이 죽어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표트르도 있었다.
* * *
표트르는 당혹스럽게 안색을 굳혔다.
너무나 변한 아이는 낯설었다. 그 아이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본능이 이야기해준다.
저 아이를 다시 데려다 놓으라고.
억지로 데려다 꿇리든, 가둬버리든.
“저, 저 아이를 다시 찾아와야 해.”
표트르의 혼잣말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 * *
“샤를로프 괜찮으냐?”
아스터가 얼빠진 표정으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샤를로프는 외출복을 챙겨입고 머리에 베레모를 썼다.
오늘은 볼일이 있어서 곧장 외출할 예정이었다.
“너는 아침부터 부지런하구나.”
아스터가 그런 샤를로프를 ‘독한 녀석 같으니라고!’라고 질책했다.
샤를로프는 서둘러 나갈 준비부터 끝냈다.
“무슨 말씀이세요?”
“과음한 거 같아서 꿀물을 타서…….”
“외숙부, 제 나이가 몇인데요. 걱정하지 마셔요.”
“네 나이가 몇이라고? 샤를, 너 어제 업혀 온 건 기억하느냐?”
“업혀 오다니요? 농담 마셔요. 씻고 제대로 누워 잤잖아요.”
아침에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때부터 몸이 개운했다.
목욕까지 모두 끝냈다고 몸에서는 비누향이 났다.
침의도 말끔하게 갈아입었고.
“일단은 꿀물부터 먹어라.”
샤를로프는 아스터가 챙겨준 꿀물을 말끔히 마셨다.
“네 녀석 위장도 코제트를 닮았구나.”
“어머니는 포도주만 좋아하셨지. 다른 주류는 입에 대면 거의 속을 게워냈어요.”
“아이고. 코제트야……. 딸아이에게 아주 좋은 걸 가르쳐 두었구나.”
어머니가 그러면서도 왜 독주를 마시나 했는데, 나이가 들고서야 알았다.
쓴맛이 속을 게워내면, 답답했던 속이 그나마 뚫리듯 편안해졌다.
답답하던 모든 것들이 그 순간만큼은 무의미해졌다.
“아침부터 어디 다녀오려고?”
“네. 전하와 어디 다녀오기로 해서요.”
아스터가 미묘하게 눈매를 좁혔다.
“일어나자마자 말이냐?”
“그럼요?”
“아니다. 아니야. 잘 다녀오라고. 황태자 전하께 소식이라도 한 통 전해라. 너 그렇게 잠들고, 전하께서 안아다 마차까지 데려다 주셨다.”
아스터는 꿀물을 챙겨 들고 이게 아닌데, 하고 자리를 떠났다.
* * *
“아가씨 오셨습니까?”
로스켈라가 샤를로프를 반겼다. 그는 술컵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벤하민을 내려다봤다.
“전하, 바쁘시더라도 약혼녀는 보셔야죠.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왔나?”
벤하민이 서류를 덮으며 그녀를 눈짓으로 쫓았다.
로스켈라가 맞은편에서 마른 헝겊으로 유리컵을 닦고,
벤하민은 아일랜드 테이블에 앉아서 서류를 빠르게 정돈했다.
황태자의 약혼식이 막 끝나고, 황태자 소속 정보관들도 바빠졌다.
“아가씨도 뭐 좀 마시겠습니까?”
“금방 나갈 거라서 괜찮아.”
로스켈라는 유리컵을 닦던 마른 헝겊을 내려놓았다.
“마음 착한 아가씨께서 큰 결정을 하셨습니다. 이번 혼약 괜찮은 겁니까?”
벤하민이 서류를 정돈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냐?”
“태자 전하께서는 가만히 계시고요.”
벤하민이 어디 한 번 더 지껄여 보아라, 하고 눈짓했다.
“아가씨 협박을 받으셨다면 당근을 흔들어 주십시오. 아니면, 전하께서 계셔서 부담스럽다면, 와인잔을 스푼으로 두 번 두들겨주셔도 됩니다. 그러면 제가…….”
“닥치거라.”
“전하께서는 제게만 싸늘하십니다.”
로스켈라는 모른 척 유리잔을 찬장에 거꾸로 매달아 걸었다.
로스켈라가 말끔하게 테이블을 정돈하고 샤를로프를 보는데, 눈짓은 ‘아가씨께서 어쩌다. 저딴 산적 같은 분을.’이라고 착잡해 하는 것 같았다.
“약혼 축하드립니다.”
로스켈라는 착잡한 표정과는 달리 흔쾌히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오늘은 도시 외곽에 다녀올 예정이라고요?”
“응. 벤하민 바쁜 일은 끝났어요?”
“해지기 전에 다녀오려면 출발해야겠군.”
벤하민이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로스켈라에게 넘겨주었다.
로스켈라는 서류를 챙겨 테이블 뒤로 숨겨진 쪽문으로 들어갔다.
“따라 나와.”
샤를로프는 로브를 쓰고 밖으로 나왔다.
약혼식을 치르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호위가 붙었나?”
“외가댁 식구들이 걱정이 많으셔요.”
호위도 임시로 배정받았다.
임시로 배정받은 호위기사는 진갈색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여기사였다.
‘카타리나입니다.’
카타리나는 원래도 과묵한 성격인지 말수가 적었다.
샤를로프는 베레모를 눌러쓰고 마차에 올랐다.
“어디를 다녀오려는 거야?”
“약방에 다녀올 일이 있어요.”
“약방이면 어디 아픈가? 가문 의관에게 말해도 될 텐데…….”
“그분이어야 해서요.”
“외각이면 도시 치안도 나쁜데 괜찮나?”
“예전에 자주 찾아뵀던 곳이에요.”
마차가 향한 곳은 어느 한적한 골목길 앞이었다.
“여기인가?”
벤하민이 판잣집의 낡은 울타리를 손등으로 약하게 두들겼다.
목적지가 여기가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하는 것 같았다.
여기는 약장수 아론의 약방이었다.
어머니께 더이상의 가망이 없을 때였다.
‘너는 왜 혼자 울고 있냐?’
아론이 그런 샤를로프 앞에 나타났다.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지며 약도 점점 독해졌다.
그만큼 급박했다. 뭐라도 해보고 싶었고, 뭐라도 했어야 했다.
“너무 늦었어요.”
첫인사를 뭐라고 하면 될까.
“더 일찍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게 맞았는데, 발걸음을 너무 갑자기 끊었죠.”
죽은 뒤에야 떠올리다니. 수십 년만이었다.
샤를로프는 낡은 건물 앞에서 멈춰서 그곳을 올려다봤다.
지금 보니까 스스로 얼마나 절박했는가도 느껴진다.
“누구요? 어어……?”
“오랜만에 뵙네요. 아론.”
아론은 샤를로프가 먼저 인사하는 모습에 멈칫했다.
“약을 지으러 온 거냐?”
“오늘은 아니에요.”
“그럼 여기까지는 왜 온 거냐?”
십수 년간 당신에게 감사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잊고 지냈다.
결혼하고 팔다리가 굳어서 움직이지 못할 때서야 당신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아론은 숨을 참았다.
“마지막은 편히 떠나셨어요. 약방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아론에게 빚도 많이 졌어요. 그간 감사했습니다.”
샤를로프는 말을 딱딱하게 끝맺었다.
“샤를.”
벤하민이 그런 샤를로프를 빤히 살폈다.
그의 시선은 계속해 따라붙었고. 묵직한 시선이 어깨에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벤하민이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지.”
벤하민이 아론과 눈을 맞췄다.
“밖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