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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네놈 짧은 목숨줄을 (11/51)


#11. 네놈 짧은 목숨줄을
2023.04.07.


벤하민은 표트르의 목을 손아귀로 감싸 쥐고 몸을 기울였다.


“제 주제를 모르고, 올라서는 안 될 나무에 기어올랐다간 목부터 꺾이는 법이다. 그 목이 꺾이는 게, 단순히 출세가 막힌다는 의미인지 죽음을 의미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벤하민은 매끄럽게 미소를 그리며 웃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표트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맸다.


“……태자 전하?”

“그래도, 실수라는데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는 줘야겠지. 내 약혼녀께서 버젓이 보는 자리인데, 괜한 험한 꼴을 보였다간 내가 미움을 살지도 모르잖아.”

당장 나긋나긋한 표정만 보면, 벤하민이 상냥한 조언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다만, 지금 벤하민의 표정에 깃든 괴리감을 보면, 어리석은 둔재라도 깨닫게 된다. 이건 조언 따위가 아니다.


“네놈 짧은 명줄이라도 단단히 부지하려면, 나불대는 혓바닥부터 간수 잘하거라. 그 혀가 더 길었다간, 네놈 명줄부터 짧아지겠어.”

“히끅!”

“농담이다. 농담이야. 농담 두 번 했다간 숨부터 넘어가겠어.”

벤하민은 단정한 낯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끔했다.

목까지 잠근 셔츠부터, 빳빳하게 다림질한 재킷까지.

벤하민은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저, 저는 이 아이 아버지입니다!”

“그랬나?”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돌아봤다.


“파양했다지 않았나?”

“그랬어도 제가 아비입니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그게 왜 어떻단 말이냐?”

벤하민이 입술을 가리고 미소 지었다.


“전하! 저는 그냥……!”

“그냥?”

“당황스럽다는 겁니다.”

“어떤 부분이?”

“제 딸아이 약혼 이야기를 지금 막 들었잖습니까?”

벤하민은 말끝을 흐리며 표트르의 말을 곱씹었다. 표트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아귀를 꼼지락댔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번 약혼을 허락하셨습니까?”

“아, 폐하께 허락받을 것도 없었다. 서류에 이미 황실 국새까지 찍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이, 이게 무슨!”

“노망난 황제께서 병상에 누워버렸으니…….”

벤하민이 그녀의 콧등을 손끝으로 간지럽혔다.


“절차가 간소화됐어도 양해해줘.”

샤를로프가 콧등을 찡그리자, 벤하민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내가 몸이 닳아서 그러잖아.”

표트르는 숨을 뻑뻑하게 삼켰다.


‘저 아이가 원래도 저랬던가?’

붉다. 온통 붉다. 음울한 기운이 그 애를 감쌌고, 눈에는 옅은 독기가 서렸다.


‘어째서?’

저 독기는 뭐란 말인가?

표트르는 낯선 딸아이 모습에 숨을 참았다. 죽은 애 엄마를 닮아간다.

암울한 눈짓이 그를 샅샅이 훑을 때, 표트르는 오싹함까지 느꼈다.


“내가 너를 19년을 키웠다!”

표트르는 어느 순간 숨을 멈췄다.


“그런데, 지금 너는……. 너는 뭐냐?”

표트르는 머릿속이 희게 질렸다.

붉디붉은 색감이 시야에 가득 찼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모습이 미치도록 붉었다.

표트르는 뒤로 걸음을 물렸다. 붉은 색감 뒤에서는 흑색 어둠이 그를 노려봤다.


“저는 그냥 샤를로프예요.”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어깨를 감싸고 속삭였다.


“샤를.”

벤하민이 너그럽게 물었다.


“집에 갈까?”

샤를로프는 몸을 돌렸다.

* * *



“약혼식 앞뒀다는 아이가 표정이 왜 저러냐?”

세자르가 아스터에게 조심히 물었다.


“저라고 알겠습니까?”

“너는 또 왜 못마땅한 거냐?”

“저 애를 보십시오. 사주팔자가 코제트를 닮았는지. 조금도 쉽게 사는 꼴을 못 봅니다.”

모녀가 나란히 팔자가 사납다.

아스터가 혀를 끌끌 차는데, 세자르가 팔짱을 끼고 후원에 우두커니 선 샤를로프를 바라봤다.


“꼿꼿해 보이는구나.”

“예?”

“조금은 위태로워 보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홀로 선 뒷모습이 단단했다.


“놔두거라.”

스스로 단단하게 선 아이다. 저 아이의 의지를 함부로 쉽게 여기지 마라.

세자르는 아스터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자리를 떠났다.

아스터는 홀로 남아서 샤를로프를 지켜봤다.

검붉은 머리칼이 구불거렸다.


“어렵구나.”

아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 * *

샤를로프는 고요한 적막감을 즐겼다.


“잘 버텨낸다고 잘 버티고는 있는데요.”

샤를로프가 고요히 읊조리는 이야기에 허공에 퍼졌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누가 내게 잘한다는 말이라도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나도 어리광부리면 안 되는 거 알아요.”

앞으로는 더 바빠진다.

샤를로프는 친모의 묘비 앞에 섰다.


 
그녀는 옷소매에 숨겨두었던 포도주 병을 꺼내서 작게 혀를 찼다.


“꼭 격식이 필요한 건 아니더라고요. 술이 그냥 술이죠.”

샤를로프는 코르크를 따고 술을 들이켰다.

절차와 격식은 잊겠다. 예우도 내려놓았다.


“내가 그들의 무덤을 선물해드릴게요.”

샤를로프는 남은 포도주를 어머니의 묘비 앞에 놓아드렸다.


“밤바람이 차갑네요.”

그녀는 묘비를 손바닥으로 쓸다가 주먹을 긁어 쥐었다. 손아귀에 서늘한 한기가 고였다.

외조부와 외숙부께서 묘지를 관리해주신다더니, 묘비에는 먼지 한 톨 앉지 않고 깨끗했다.


“다 늦은 밤에 묘비 앞에서 혼자 그러면 안 무섭나?”

벤하민이 샤를로프에게 다가왔다.


“저를 낳아준 엄마잖아요. 무서울 게 뭐 있겠어요. 죽은 사람 흔적을 이렇게라도 더듬어갈 수 있다면 그거로 됐죠.”

이 묘지도, 이 흔적도 지난 생에는 허락받지 못했다.


“환궁하신 거 아니었어요? 왜 오셨어요?”

“약혼식 전에 심란해하면 달래주려고.”

“농담인가요?”

“조금은 겁을 먹어도 될 텐데.”

벤하민이 실없이 웃었다. 샤를로프는 포도주를 들고 목 안에 쏟아부었다.

엄마. 죽은 뒤에는 편안한가요?

죽은 사람은 여기에 없다. 이제는 땅속에 묻어드리고 작별을 고할 때다.


“친모 묘지 앞에서 병나발을 부는 거야?”

“이건 벤하민이 가르쳐 줬잖아요.”

“맞아. 술은 그냥 술이지.”

벤하민은 포도주 병을 가져가서 라벨을 확인했다.


“세자르 윈저의 냉장고를 털었나?”

“라벨만 봐도 알아요?”

“몇 번 훔쳐 먹었지. 세자르가 한번은 나를 노려보고 자물쇠를 걸더군.”

“저런. 속상했겠어요.”

“어쩌겠나? 그럼 자물쇠를 끊어먹고 먹어야겠지. 내가 미친 망나니처럼 날뛴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벤하민이 킥킥대며 떠드는 게 다 예전 일이라며, 오랜 추억이라도 회상하는 사람 같았다.

그리워하는 기분이랄까?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등 뒤에 섰다.


“손등에 튀었어.”

그러더니 샤를로프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끝이 뽀얀 피부를 스치는데, 검을 쥐는 손이라고 거칠고 단단했다.


“아무리 대부분 약혼 절차를 생략했어도, 하나쯤은 제대로 챙겨야겠지.”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뭘……?”

벤하민이 그제야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석함 같았다.


“손 가만히 놔둬. 자물쇠 채우는 중이잖아.”

검은색 함이었다. 회색 리본을 둘렀는데, 벤하민이 손가락으로 끈을 잡아당기자, 리본이 맥없이 풀렸다.

보석함은 샤를로프의 손바닥 하나에 들어올 만큼 작았다.

벤하민이 뚜껑을 열자 거기서 작은 반지가 나왔다.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백금 반지였다. 벤하민이 가느다란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약혼식은 내일인가?”

벤하민이 가느다란 손등을 감싸 쥐며 조곤조곤하게 읊조렸다.


“네 존재감을 저들 머릿속에 박아 넣어.”

샤를로프를 바라보는 벤하민의 눈동자가 질척해졌다.

* * *

황궁 안에서 약혼식이 열렸다.

병든 황제가 병상에 눕고, 황실에서는 대부분 절차를 생략하는 대신 축하 연회를 베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혼약을 맺으시는군요.”

“태자의 나이가 몇인데요? 혼기는 이미 꽉 찼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섬망증으로 병상에 누운 것만 아니었어도, 진작 황태자비를 맞이할 나이였잖습니까?”

귀족들은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었다.


‘제 아비가 섬망증으로 병상에 누웠는데, 눈 하나 깜빡이질 않는군!’

늙은 황제가 병을 앓으면서, 황실 세력 다툼도 재편성됐다.

이번 황실 세력 다툼만 끝난다면, 늙은 황제를 끌어내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윈저가 사람들이 오는군요.”

벤하민이 곧 화사하게 웃었다.


“샤를.”

누군가의 애칭이었다.

연회장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검붉은 머리칼이 온 시야를 지배했다.

윈저가의 가주와 첫째인 적장자, 둘째 차남까지. 모두가 연회장을 찾았다.

그리고 뒤로, 낯선 여인이 걸어들어왔다. 낯설지만 낯익다.

검붉은 머리칼이 허리 아래에서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검고 붉다. 탁하되 한없이 깊다.

샤를로프가 발을 디뎠다.

온통 붉다.

여인은 붉은색으로 스스로를 칠했다.

귀족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저 아가씨인가요? 지독하군요.”

본 연회가 시작됐다.


“원래는 튜텨가의 영애였다지요?”

“쉿, 파양된 게 언제인데요.”

윈저가에 입적됨과 동시에 황태자와 약혼을 올리다니.

이번에는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른 곳으로 향했다.


“튜텨 후작께서 충격이 크겠군요.”

표트르는 샴페인 잔을 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샤를로프는 그런 제 아버지를 흘끔거리다 관심을 잃었다.


‘내 앞길에서 기웃대지 마세요.’

샤를로프가 발을 내딛자 길이 열렸다.


“제 역린과도 같은 아이입니다.”

레안드로가 드물게 감정을 보였다.

물론, 외인들이 듣지 못하게끔 목소리를 죽였지만 그래도 목소리에 담긴 무게는 무거웠다.

레안드로가 샤를로프의 손을 벤하민에게 넘겼다.


“샤를. 이리로.”

첫 춤이 시작됐다. 단조로운 음악이 흐르고, 둘의 등장이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드레스 자락이 화려하게 나부꼈다.

검붉은 머리칼과 드레스는 화려했고, 뽀얀 피부는 창백해 보일 지경이었다.

드레스가 나부끼면, 밑자락이 펄럭이면서 화려한 문양이 펼쳐졌다.

춤사위는 금방 끝났다.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고 속삭였다.


“오늘은 병나발 불면 안 돼.”

샤를로프는 그의 어깨를 약하게 때렸다.


“나는 중립세력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여기서 혼자 기다리겠나? 아니면, 윈저가 식구들을 불러줄까?”

“위스키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릴게요.”

벤하민은 중립세력과 이야기를 나눈다며 자리를 떠났다.


“위스키 한 잔 부탁해,”

하인이 위스키를 가져다줬다,

독한 위스키 향이 코끝을 찔렀다.


‘적당히 마셔.’

벤하민이 입술로 달싹이며 이야기했다.

그가 뱀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어쩐지 취기가 바짝 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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