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의 이질적인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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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의 이질적인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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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의 이질적인 미소.
2023.04.04.
“약혼? 약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표트르는 집사가 전해온 소식에 표정을 왈칵 구겼다.
집사가 엄중히 고했다.
“아가씨께서 태자 전하와 교제 중입니다. 곧 약혼식도 올리고요.”
“샤를로프 그 애가 말이냐? 누구와……? 태자라니? 이 시점에 태자라고? 그분이 왜, 왜? 그놈은 제정신인가! 제 노쇠한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는데 뭘 치른다고!”
저놈이 지금 웬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노쇠한 황제가 병상에 앓아누웠다. 요즘 그 황제의 병상을 지키는 게 황비였다.
곧 황가의 세력이 바뀌고, 튜텨가에서도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폐하께서는 뭐라시냐?”
“정신도 온전치 않은 분께서 뭐라 하겠습니까? 요즘도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황비 전하 품속에만 파묻혀 지내는데, 황비께서도 아직은 은밀히 숨기는 모양입니다.”
“왜, 왜? 어째서?”
“폐하께서 황태자가 누군지 기억도 못 합니다.”
이제 막 나이 쉰이 된 황제는 섬망증을 보였다.
예전부터 선황이 꿈에 나와서 저를 괴롭힌다며, 선황의 무덤을 옮기라며 닦달하던 황제였다.
‘그분의 무덤을 옮겨라! 황궁 밖으로 옮겨! 젠장, 그 늙은이가 나를 또 얼마나 괴롭히려고!’
선황이 꿈에 계속 나온다며 공포심을 보이던 황제는 곧 머리가 희게 세었다.
노쇠한 황제는 기력을 잃었고, 황비에게만 의지하며 나라 사정을 내팽개쳤다.
이제는 그 세력이 완전히 옮겨갔다고 여겼는데.
“샤를로프. 샤를로프……!”
빌어먹을 코제트! 넌 내게 뭘 남겨두고 간 거냐!
“샤를로프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아라!”
* * *
샤를로프는 샨 부티크에서 드레스를 맞췄다.
“약혼식 드레스인데 색감이 과하게 화려한 게 아닙니까?”
줄자로 허리 치수를 재고, 드레스 원단을 고르고, 거기에 어울리는 레이스 장식까지 골랐다.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붙고, 샤를로프는 거울 앞의 제 모습을 지켜봤다.
붉은 원단이 화려하게 흘러내렸다. 그 안에 장미를 수놓았는데, 원단 자체만으로도 화려한 색채를 뽐냈다.
“전하 이거면 됩니까?”
벤하민이 고개를 들어 샤를로프를 눈에 담았다.
“됐어.”
벤하민은 책자를 덮고 마담을 내보냈다.
“직원들은 이만 데리고 나가.”
“네. 알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옷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미리 준비해둬. 바로 확인할 테니.”
“그럼 밖에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샤느란이 직원들을 데리고 착의실 밖으로 나갔다.
모든 절차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샤를로프는 옷자락으로 이마를 닦았다. 미열이 있나?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녀는 한쪽 팔로 허리를 짚고 숨을 가다듬었다.
“오래 서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하나 봐.”
벤하민은 그녀가 버거워하는 걸 깨닫고 착의실 커튼을 닫았다.
“발목이 안 좋아요.”
“뼈대가 얇은 편이구나.”
샤를로프가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만지작댔다. 그러자, 그의 시선도 거기에 닿았다.
“손목도 그래서인가?”
“왜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만지작대는 것 같아서 궁금했어.”
그녀는 뼈대가 가는 편이어서인지, 몸선도 가늘었다. 그런 아슬아슬함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피곤하진 않아?”
샤를로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답을 대신했다.
저런 부분을 보면 세심한 사람이다. 저런 세세함이 시선을 잡아끈다.
“마지막으로 장신구만 맞추면 돼, 샤를.”
벤하민은 피곤해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가 매끄러운 손짓으로 샤를로프를 이끌었다.
그 뒤, 둘은 옷감에 잘 어울리는 장신구도 골랐다.
“장신구는 포인트로 하나만 목에 걸어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목걸이로 준비해 두었고요.”
마담 샤느란이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보석함이 줄지어 열리고, 샤를로프는 식은 눈길로 그것들을 내려다봤다.
큰 감흥은 없다.
사람이 한번 죽고 깨어났더니 물욕까지 사라졌나?
전생에도 물욕은 크게 없었던 것 같은데…….
“조금 더 기쁜 표정을 지어봐, 샤를. ”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어깨를 짚었다.
“황성 밖에서 보란 듯이 붙어 다니던 이유가 있잖아. 네 존재감을 저들 머릿속에 박아 넣어야지. 저 머저리들 머릿속에 너를 뿌리까지 박아 넣고, 난장판을 지어놓아야 하잖아.”
“네.”
“그럴 거면, 어중간한 자세는 안 돼.”
그는 매끄러운 손짓으로 샤를로프의 손등을 짚고 손아귀에 목걸이를 쥐여주었다.
빙산을 깎아서 만든 빙석이었다. 결정체 안에 서늘함을 고스란히 품었다.
“가장 예리한 칼이 되어서 저들 가슴에 박혀야지. 이대로 머릿속에 각인되어서, 존재만으로도 거슬리게 말이야.”
샤를로프는 목걸이를 손가락에 걸고 시선 위로 들어 올렸다.
벤하민과 손이 겹쳐서, 두 손아귀에 꼬인 목걸이가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름답지요? 녹지 않은 얼음이라 해서 아주 진귀한 물건입니다.”
마담 샤느란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전하, 그럼 장신구는 이거로 할까요?”
“이거면 되겠군. 웬 머저리들이 비슷한 걸 하는 일 없도록 유의해줘.”
“전하께서는 이 샤느란을 뭐로 보는 겁니까? 저만 믿으십시오.”
샤느란은 목걸이를 보석함에 넣고 닫았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잘 포장해 윈저가로 보내겠습니다. 이것만 사갔다간, 전하의 씀씀이를 제국민들이 얼마나 옹졸하게 보겠습니까?”
“말인들 못 하면.”
샤느란은 익숙하게 나머지 보석함까지 챙겨 넣었다.
로스켈라가 선술집에서 정보관 역할을 맡는다면, 샤느란은 부티크에서 퍼지는 온갖 소문들을 수집했다.
이곳은 황태자 소속 정보관의 집약체였다.
전생에는 어땠더라? 로스켈라 외에는 그 정도로 직접적으로 알려진 정보관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적당하게는 안 돼. 아주 난장판을 지어놓아야지.”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손등을 감싸 쥐고 속삭였다.
“이만 나갈까?”
곧 손님이 올 때야.
벤하민이 넌지시 때를 알려왔다.
샤를로프는 몸을 돌렸다.
벤하민이 느긋한 걸음으로 샤를로프를 이끌었다. 재촉하는 듯하지만 행동은 굼떴다.
“따라서 와.”
벤하민이 한 걸음을 내디디면, 샤를로프도 반걸음을 내디뎠다.
“샤를로프!”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샤를로프를 불러 세웠다.
익숙하지만 거의 잊고 지냈던 목소리다.
아아. 너무 기다렸어.
“오랜만에 뵙네요.”
아버지, 뒷말은 삼켰다.
* * *
아버지와의 재회는 얼마 만일까.
이번 삶만 따져도 오래됐지만, 저번 삶까지 더한다면 우리는 수십 년 만에 만나는 거였다.
‘이십 년만인가?’
그 얼굴은 여전했다.
“진짜 변함이 없네요.”
“무슨 뜻이냐?”
“한결같다는 뜻이었어요.”
한결같다. 한결같은 모습이라서 엮인 인연을 끊어내기도 수월했다.
“전, 전하! 딸아이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십시오.”
너는 뻔뻔하게도 그 입으로 딸아이란 말을 입에 담는구나. 내가 딸이었던 적은 있나?
샤를로프는 울지 못했다. 삐뚜름하게 휜 입술은 계속 부자연스러운 미소만 그렸다.
“내가 당신에게 딸인 적은 있었나요?”
적어도 내가 당신 딸이었으면 내게 그러면 안 됐잖아.
목구멍으로 말을 뱉어낼 때마다 목이 까슬까슬했다. 입술을 짓이기며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거웠다.
내가 이야기했잖아. 너는 내 발목을 놓아선 안 됐다고.
“못 뵌 지 이주일 좀 더 됐나요?”
“…….”
“그간 여러 일이 있었는데, 이 정도 일이 생겨야지 그 비싼 얼굴을 보여주나 봅니다.”
어머니가 죽던 순간에도 빌어먹을 사업이니 뭐니 하며 자리를 떠났다.
샤를로프가 파양되던 순간에도, 저 잘난 얼굴 한번 비추지 않고 호적에서 지웠다.
그 사실에 실망하는 건 아니다. 샤를로프로서는 한결같이 잊어줘서 감사할 지경이었다.
표트르가 샤를로프를 거칠게 당겼다.
“네년은 도대체 생각이라는 게 있는 게야? 튜텨가는 황비 전하를 모시는 가문이다. 튜텨가가 어떤 분을 모시는지 잊은 거냐?”
그는 언성을 바짝 낮춰 속삭였다.
“너희 모녀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
샤를로프는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며 입술을 가렸다.
“잊진 않았어요.”
“너는 그걸 기억한다는 아이가 태자를 버젓이 가까이 둬!”
샤를로프는 표트르를 고요히 불렀다.
“튜텨 후작.”
“뭐? 네가 지금 이 아비를 뭐라고 부른 거냐?”
“그러다 곧 때리겠습니다.”
표트르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손아귀를 쫙 펴고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기겁하며 손을 내렸다.
고개를 홱홱 돌리자, 주변에서 여기를 힐끔대고 있었다. 이런, 이런 낯부끄러운……!
표트르의 낯이 점점 붉어졌다. 그의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돋았다. 핏줄이 돋은 손등은 험악했다.
“죽은 엄마 기억에 붙잡혀서 헤매는 꼴이라니. 네 엄마가 그리워서 외가댁에라도 찾아간 거냐?”
세상에는 여러 잔인한 말들이 있다.
사람은 세심하고 민감하다.
말 몇 마디로 칼처럼 사람을 난도질할 수 있다.
“네 엄마 유골이 어디 묻혀 있는지 잊은 거야? 너를 파양하는 게 아니었어. 저대로 파양할 게 아니라 집구석에 잡아놔야 했다! 미친 계집애처럼 사흘 밤낮을 울부짖기에 어지간히 그리웠던 모양이라고 했는데……. 내 뒤에서 이런 짓을 저질러?”
저런 때도 있었다. 사흘 밤낮을 울부짖고, 울다 지쳐 쓰러지고 기절하고, 바닥을 기어서 친모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또 울부짖고.
“그럴 때도 거기 없었잖아요.”
내 곁을 지키고 있었던 듯 이야기하지만.
“없었잖아.”
내가 죽어가던 순간에도 한 번 돌아본 적 없었으면서. 그러면 내게 이러면 안 됐잖아.
“몇 가지 정정하죠. 제 어머니 유골은 거기 없습니다. 계셔야 할 곳에 모셔뒀으니, 거기서 찾아도 없어요. 둘째, 거슬려서 파양해두고 본인이 선심 써서 그랬다는 듯 말씀 마셔요. 이미 계산했잖아요? 어느 쪽이 더 이득인지요.”
왜 아직도 내 앞에서 떳떳하게 굴어?
“여기까지는 계산 안 닿으셨죠?”
계산 닿았을 리 없지.
결혼매물로 내놓을 값어치는 계산했을지언정, 여기까지는 계산하지 못했을 거야.
“나도 계산 못 했다. 계산 못 했어. 다른 걸 다 떠나서 왜 하필이면 저 미치광이를……!”
표트르가 말을 뚝 끊었다. 붉으락푸르락하던 낯빛이 서서히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시선 끝에 벤하민이 담겼다.
“평소 말버릇이 험악했던 모양이야.”
벤하민은 유감이라는 듯 말끝을 흐렸다. 미치광이라…….
“귀족 세력 몇몇이 나를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어왔었지만.”
벤하민은 입술을 더듬거리며 침음을 삼켰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저 호칭을 입에 담는 놈은 또 처음이군.
“내 성질머리가 더럽다는 건 알았어도.”
“…….”
“눈앞에서 그딴 호칭을 입에 담을 만큼, 내 성격이 개차반이었나?”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귀를 손가락으로 만지작댔다.
그의 손끝에 붉은 적발이 감겼다.
고불고불 꼬인 머리칼을 가지고 놀던 벤하민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가끔 너의 부주의함은 누구를 닮았을까 고민했었는데, 부친 쪽이었군.”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어깨를 손아귀로 감쌌다.
“그렇다고 내 눈앞에서 그런 호칭을 담나?”
표트르는 퍼뜩 고개를 쳐들고 외쳤다.
“오해이십니다. 전하! 저는 그저 제 딸아이가 일언반구도 없이……!”
고요한 곳에서 퍼지는 호통.
그리고 이질적인 벤하민의 미소.
샤를로프는 거기서 섬찟함을 느꼈다.
벤하민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내가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지 말아라. 혀를 잘라버릴지도 모르잖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