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목덜미를 보여주면. (8/51)


#8. 목덜미를 보여주면.
2023.03.28.



“울지는 마. 네가 울면 아스터는 내가 울린 줄 알 거 아니야.”

벤하민은 먼저 앞서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샤를, 안 오면 버리고 간다. 멍하니 혼자 서서 뭐 해?”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돌아봤다. 그가 멀찍이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기다려주잖아.”

“…….”

“손잡아. 그러고 다닐 거면.”

벤하민은 익숙하게 샤를로프의 손에 깍지를 꼈다.

사람들 사이를 걷는데, 샤를로프가 부딪칠 일 없게 길을 열어주었다.


“왜 혼자 넋 놓고 있어?”

벤하민이 머리를 헝클이며 팔을 뻗었다.

샤를로프는 그런 그를 멀거니 올려다봤다.


“봐봐. 넋 놓으니까 부딪치잖아.”

벤하민은 길가 행인과 부딪칠뻔하자 샤를로프의 어깨를 홱 당겼다.

샤를로프는 딱딱한 몸에 머리를 박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

‘미안하오!’ 하고 행인은 급히 지나갔다.

샤를로프는 가까이에서 숨을 들이켰다.

쌉싸름한 약초 향이 났다.


“약초 냄새가 나요.”

“붕대에 마취제로 쓰는 약초를 발라두었어.”

약초 때문인지 특유의 살내음이 몸에 뱄다.

쌉싸름하면서도 서늘하다. 밤공기 특유의 차가운 기운을 그대로 머금었다.


“잘 따라와.”

벤하민은 샤를로프를 쓰다듬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전하께서는…….”

그쯤,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벤하민.”

“네?”

“이름으로 불러”

벤하민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닌가?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면, 아스터가 기함하려나?”

샤를로프가 벤하민을 말간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그런 시선을 느끼고, 벤하민이 손끝으로 손아귀를 긁었다.


“왜?”

샤를로프는 간지러움에 손을 뺐다.


“그거 알아?”

“…….”

“지금처럼 계속 휘둘리면, 샤를, 네가 위험해.”

벤하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외가댁에서 마차를 보내왔다.

샤를로프는 그때까지도 파양이고 뭐고 모두 잊어버렸다.


“긴장 놓지 말고.”

경계해.

샤를로프는 그제야 또 휘둘렸음을 깨달았다.

* * *

며칠 뒤였다.


“…….”

샤를로프는 복도 한쪽에서 숨을 삼켰다.

레안드로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녀가 막 집무실 문을 열려는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아버지께 가는 길이냐?”

세자르가 갑갑하게 조인 크라바트를 풀며 물었다.

그는 이번에 입적 절차를 도와준 큰 외숙부였다.


“네. 외삼촌은 할아버지 뵙고 오시는 거예요?”

“그래. 법적 절차 마무리된 부분 확인해드리고 오는 길이다.”

세자르가 집에 온 지 며칠이 흘렀다. 큰 외숙부와는 지난번 입적 절차를 밟으면서 안면을 텄다.


“다행이구나.”

세자르는 제 외조카를 내려다보며 턱을 문질렀다.


“오늘은 그래도 전날보다 낯빛이 좋아졌어. 며칠 전까지는 희멀건 흰죽처럼 낯빛이 창백하니 별로였는데 말이야.”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오늘은 보기 좋다는 뜻이었어.”

그는 집무실 안쪽을 턱짓하고 이만 들어가 보라며 비켜 주었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 들어가 보아라.”

샤를로프는 집무실 문을 두들기고 들어갔다. 집무실은 레안드로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말끔하게 정돈된 탁자에 서류 더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샤를로프는 창가에 시선을 뒀다가 다시 레안드로에게 고정했다. 그는 매끄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가 양육권을 포기했다.”

튜텨가에서 샤를로프의 친권을 포기했다. 그러니까, 샤를로프는 튜텨가와 남이 됐다.


“샤를로프 윈저. 지금부터 네 법적 보호자는 나다.”

“입적 절차가 빨리 끝났네요.”

“세자르가 와서 마지막 절차를 모두 밟았다.”

큰 외숙부가 법적인 절차를 밟으면서 모든 과정이 매끄럽게 끝났다.

법적인 처리가 조금 길어지던 것 같더니, 오늘로 해결됐구나. 이거로 튜텨가에서는 빠져나왔다.

샤를로프는 윈저에 입적됐고, 법적 보호자는 외조부가 됐다.


“아버지가 순순히 협조했어요?”

“어차피 1년 뒤면 끝날 인연이었다. 네 친부도 그걸 알아서, 더 이득이 되는 쪽으로 계산했고.”

아버지는 끝내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

완전히 남이 됐다는 뜻이었다. 서운하다는 마음은 없다.

이만큼이나 쉽게 끊을 인연이었으면, 그전에 놓아줬어도 됐잖아?

나는 왜 저 집구석에 몇십 년이고 붙잡혀 지냈어?


“불편한 부분은 집사에게 이야기해 둬라.”

아버지 일은 머리에서 잊혔다.

샤를로프는 머리칼을 정돈하며 귀 뒤로 넘겼다. 긴 적발이 손가락에 감겼다.

저들 손아귀에서 나왔다.

저들은 알까?

너희는 나를 놓치면 안 됐어.

* * *

표트르는 빈 저택을 둘러보다 외투를 벗었다.

튜텨가 내부가 조용했다.

간만의 고요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오셨습니까?”

노쇠한 집사가 서둘러 그 외투를 받아들었다.


“집에 별일 없었나?”

“조용했습니다.”

“파양절차는 끝났나?”

“네. 모두 끝났습니다.”

표트르는 미간 사이를 구겼다. 미간 사이에 진 주름 때문인지,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퍽 사나워 보였다.


“제 죽은 엄마를 따라가기라도 할 기세더니, 죽은 엄마 그림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군. 윈저가에서 그 애를 입적했다고?”

“네. 윈저가에서 아가씨를 입적했습니다.”

“저대로 혼인시장에 올렸어도 큰 이득이었겠지만……. 그 애를 이 돈을 주고 사가다니, 노인네가 노망이라도 난 모양이야.”

튜텨가에서 윈저가의 흔적이 지워졌다.

그 지긋지긋한 여자가 죽고, 그 애의 흔적도 지웠다.

이 적개심은 어디서 시작됐던가?

사사건건 부딪쳐 오던 그 여인이 죽으면서, 이제는 별일도 아닌 듯 치부됐다.

집사는 걱정스럽게 제 주인을 살폈다. 선대 가주 때부터 우려하던 일이 시작됐다.


“가주님…….”

“나중에 이야기해라. 뭐처럼 맞이한 이 고요함인데, 굳이 깨고 싶지 않다.”

표트르는 집사가 건네는 우편물을 확인했다.


‘클로에 린.’

이름이 적힌 걸 보고, 그는 표정을 찌푸렸다.


“……바로 답신하겠습니까?”

“나중에 확인하겠다.”

표트르는 우편물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집무실로 담금주만 올려놔.”

그는 집사를 보내두고, 집무실로 가서 옷을 풀었다.

집무실 안은 말끔했다.

표트르는 우편물을 대충 탁자에 던져 놓았다.

커프스단추를 풀던 그는 우편물 봉투에 다시 시선을 뒀다.

그 뒤, 뜯지도 않은 우편물을 쓰레기통 안에 처박고 관심을 껐다.

집무실이 유난히 고요해졌다.

삐거덕삐거덕. 그래서인지, 바닥이 삐거덕대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 * *



“파양됐다더니 표정이 왜 그래?”

샤를로프는 찻잔을 들다 말고 숨을 삼켰다. 벤하민이 창턱을 넘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검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그의 손짓이 더없이 권태로웠다.

샤를로프는 거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냥, 너무 많이 잃어서요.”

“뭘 잃었지?”

“어머니를 잃었고, 제 삶을 잃었죠. 이제야 되찾았는데…….”

샤를로프는 고요히 잠긴 눈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잃은 게 많죠.”

얻은 건 하나인데 잃은 건 여러 가지다.

샤를로프가 작게 읊조리는데, 벤하민이 바짝 가까워졌다.


“살을 내어줬으니 뼈를 취해야겠어요.”

“샤를……. 숨을 천천히 골라. 성급할 것 없어.”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야기했다.


“사냥은 때를 기다려야지. 사냥감을 물어뜯을 때는 삐쩍 마른 놈을 물어뜯는 게 아니야.”

벤하민은 자연스러운 이치를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굶주린 놈들을 사냥하긴 쉽다. 그런데 금방 질리는 법이다.

차라리, 먹잇감에 살이 오를 때까지 기다려라.

살집이 바짝 올랐을 때, 제 목덜미를 보여주는 먹잇감이 있다.


“사냥은 그때 하는 거야.”

제 목덜미를 보여줄 때.

가장 안심하고 제 승리를 확신했을 때.

놈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고 단박에 숨통을 끊어야 한다.


‘그래서 폐위됐을 때, 놈들 목을 직접 친 건가?’

저들 모두가 제 승리를 의심하지 않을 때,

벤하민은 그들의 목을 자르며 제 승리를 알렸다.

황위에 올라 황비 세력이 공포에 질린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겠지.


 


“며칠 안 계시더니요?”

“바깥 일로 잠시 자리를 비웠어. 세자르와는 인사 나눴나?”

“네. 입적 절차 밟으면서 인사 나눴어요. 아스터 외숙부와 많이 닮아서 거리감도 없었고요.”

샤를로프는 막힘 없이 이야기하다 입술을 가리고 약하게 웃었다.

의외의 부분에서 세심한 분이다.

샤를로프는 찻잔을 다시 들려다 코를 만지작댔다. 약초 향인가? 씁쓰름한 향이 콧등을 두들겼다.


“어딜 또 다쳐오셔서……. 또 다쳤어요?”

“답답하다고 밖에서 날뛰다 봉변당했지.”

“며칠 자리를 비우시더라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코로코 강.”

코로코 강이면 하루 이틀 가야지 나오는 제국의 강줄기였다.

코로코 강에서 다쳐올 일이면…….


“패잔병 일은 잘 해결됐나요? 이국 패잔병이 도적질하면서 제국민들 습격해서 소탕하고 오는 길이죠?”

“그 이야기는 누가 해준 거야?”

“그냥, 알아요.”

전생에도 이 무렵에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


“전하! 태자 전하!”

어디선가 벤하민을 찾는 목소리가 애타게 들려왔다.

샤를로프가 있던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밖에서는 의관이 붕대와 가방을 들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도대체가! 상처 치료하다 말고 어디로 도망가십니까! 이 린턴이 정말 속 터져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겁니까! 제가 죽으면 제 묘지에 꽃 한 송이 안 둘 분께서요! 왜 제 속을 문드러지게 하십니까!”

린턴은 뒤늦게 샤를로프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그대는 나를 발견하는 게 너무 늦었어.”

벤하민은 됐다며 손을 내젓고 응접실을 나갔다.


“아, 아니……! 아가씨, 그럼 실례했습니다.”

린턴은 울부짖으며 벤하민의 뒤를 따랐다. 저 모습이 유쾌해 보이는 건 왜일까.

샤를로프는 다 식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테라스 창이 열려서 흰 레이스 커튼이 펄럭였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거야.”

샤를로프는 벤하민이 떠난 자리를 돌아봤다.


“질 좋은 포도주를 구해놔야겠어.”

 

* * *

늦은 저녁이었다.

포도주 저장고 안에 검은 그림자가 졌다. 거기서 포도주만 훔쳐낸 샤를로프는 옥탑방을 찾았다.

옥탑방으로 오르는 계단이 삐거덕거렸다.


“내가 술을 숨어서 먹다니.”

샤를로프는 한쪽 손에 포도주병을 쥐고 계단을 올랐다.

옥탑방 문을 열자, 붉은 양탄자에 소파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샤를로프는 테라스 창을 열고 나갔다.

테라스 난간에 유리잔 두 개를 내려놓고, 코르크 따개를 침의 안에서 꺼냈다.


“아일리아 포도주가 유명하긴 하더라고요.”

샤를로프는 포도주병을 손으로 쥐고 라벨을 확인했다.

아일리아 지역 포도주였다. 코르크를 따자 포도주 향이 그윽하게 풍겼다.


“이것 봐요. 포도주 저장고에서 하나 훔쳐 왔어요. 아일리아 포도주만 나란히 보관해 놓은 것 있죠?”

테라스 난간이 삐거덕거렸다.

벤하민이 난간 쪽으로 내려앉았다.


“지붕에 앉아 있지 말고 한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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