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썩은 뿌리를 도려내다. (7/51)


#7. 썩은 뿌리를 도려내다.
2023.03.24.



 
몸이 서서히 굳어간다. 죽음이 도래했던 날, 샤를로프는 완전히 잊혔다.


“네 아버지는 오지 않는다더군.”

남편이 죽어가던 샤를로프를 보고 해준 이야기였다. 손끝이 굳어서 침대를 힘없이 더듬거리고, 그 시선은 남편을 미련스럽게 바라봤다.


“가문의 치부는 여기서 죽는다.”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꼴을.


“그 치부의 죽음 또한 묻히는 거야.”

“아아, 나한테 이러지 마. 아아……. 아아악!”

“그녀의 와병 이야기는 철저히 숨겨라. 이 이야기가 외부로 흘러가게 두지 마.”

내 죽음을 숨겼나?

아아.

맞아. 그랬지. 모겐스. 너는 그랬지. 화상으로 전신 피부의 반을 잃었고, 끝내는 루퍼틱 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폐가 굳어가고 그 삶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순간에도, 누구도 그녀를 돌아봐 주지 않았다.

* * *



“먹고 싶은 것 먹고. 편히 쉬다 오면 된다.”

레안드로가 샤를로프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면 모두 다 끝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라.”

외가에서 샤를로프를 꺼내오려고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오늘 그 절차를 밟는댔다. 그리고 다른 잡음이 나오는 걸 최소화하려고 샤를로프는 자리를 피한 예정이었다.


“전하, 샤를로프를 잘 부탁드립니다.”

“저녁 무렵 때까지 돌아오면 되나?”

“네. 그때쯤이면 입적 절차도 다 끝나 있을 듯하니 아이와 편히 쉬다 오십시오.”

벤하민과 잠시 자리를 피한다고 밖으로 나왔다.

외숙부께서는 그를 경계하라 이야기하면서도, 이번에는 선뜻 샤를로프의 등을 떠밀었다.

그럼 진짜…….

다 끝나는가? 이대로 끝나는 건가?


“샤를.”

벤하민이 그녀를 불렀다.


“샤를로프!”

샤를로프는 느지막하게 고개를 돌렸다.


“듣고 있어요.”

“뻔히 넋 빼두고 있는 게 보이는데.”

“본가에서 사람이 다녀간다니까 본의 아니게 긴장한 것 같네요.”

어느새 밖에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상가 거리였다. 아아, 여기서 밥부터 먹자 했던가?

딴생각에 빠져 어딘 줄도 모르고 걷고 있었구나.

샤를로프가 우뚝 멈춰 서는데, 벤하민이 무심히 손을 뻗었다.


“혈색이 좀 붉은데.”

벤하민이 그녀의 뺨을 손으로 짚었다.


“원래 스트레스 받으면 몸으로 드러나는 타입인가?”

예전부터 잠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미열로 몸이 자주 뜨거워지곤 했다.


“이건 또 누굴 닮은 거야?”

“생전 어머니를 닮았죠.”

우리는 식당에서 식사부터 해치웠다. 심경이 복잡한 부분만 뺀다면 음식 자체는 괜찮았다.

이곳도 상가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식당이었는데, 입소문이 난 곳인지 음식 맛은 모두 깔끔했다.

그래도, 음식은 금방 물렸다.


“식사가 입맛에 안 맞나?”

“원래 식사는 잘 안 즐겨요.”

“그건 또 누구를 닮은 거야.”

“이것 또한 생전 어머니를 닮았죠.”

우리 모녀는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서로가 서로를 닮았다.


“윈저의 어디가 그렇게 미웠을까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제 아버지요. 어디가 미워서 그렇게 혐오했을까 싶어서요. 어려서는 그게 제 잘못인 줄 알았죠.”

전생에 어머니가 죽었을 무렵이었다.

샤를로프가 강제혼인으로 끌려나갈 때 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너는 이제 네 갈 길을 가거라.’

 
네가 할 만큼 했다고? 너는 뭘 할 만큼 했다는 거야?

내게 아무런 선택권도 주지 않았잖아. 내게 무슨 선택권이라도 있었다는 듯 이야기하는데 그런 적 없었잖아.

샤를로프는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였다.


“표정이 별로야.”

“약간.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지난 기억들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샤를로프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벤하민도 물잔을 만지작거리다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운을 띄웠다.


“……미리 이야기하는데.”

“네?”

“윈저가에서는 너를 빼내려고 많은 출혈을 감수할 거야. 네 친모의 개인재산을 영구적으로 포기하고, 그 외 사업체를 통째로 뜯어서 튜텨가로 넘기겠지. 팔뚝 하나만 내줄까? 다리 한쪽까지 통째로 뜯어다 주는 꼴이 될 거야. 그 대가로 윈저가에서는 너의 파양을 요구할 테고.”

샤를로프의 손가락이 작게 떨렸다.

딱 1년이다. 스물이 될 때까지 양육권. 그거 하나 가져오려고 윈저가에서는 큰 출혈을 감수한다.


“너는 친부가 빼내주지 않으면, 그 가문에서 못 나와. 친부가 네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뜻이야.”

이건 양육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소유물을 놓고 다루는 소유권이었다.


“그 기분 잘 기억해둬.”

샤를로프는 호흡을 느릿하게 가다듬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떨림이 멎었다. 그녀는 뻣뻣한 손짓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예상하던 일이었잖아.”

“네.”

“너 하나 빼 오는 게 말처럼 가벼운 일이었으면, 지금 이 지경까지 안 됐겠지. 네 친모도 너도, 그 집구석도.”

샤를로프는 손끝을 만지작댔다. 그 울분은 이미 기억한다. 그 억울함을 각인하고 또 각인했다.


“애초에 그래서 조용히 지냈어요.”

지금은 떠밀려줄 때다. 그 가문에서 나오는 게 먼저라서.

차라리 버려지길 택했다. 그래서 썩은 뿌리는 도려냈다.

그 무렵, 식당으로 일행이 몇몇 더 들어왔다. 샤를로프의 표정도 같이 일그러졌다.

아아.

그 시절 기억이 왜 떠올랐는가 했더니.

너와 마주치려고 그랬던 모양이야.

벤하민도 그녀의 변화를 읽어냈다. 그가 식당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인가?”

“네?”

“낯빛이 어두운데 말이야.”

“음. 예전에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고요.”

낯익은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도, 사내의 일행 몇몇이 더 도착했다.

짙은 금발에 제복까지 단단히 갖춰 입은 모습.

그리고 말끔한 몸가짐.


‘모겐스 베버’

베버가의 장남이자 한때는 남편이었던 사람이다.

샤를로프가 죽음 앞에서 버림받을 때였다. 그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게 베버 가문이었다.

말끔한 낯이 이쪽으로 향했다. 모겐스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금 거뒀다.

지난 삶의 무덤.

내 묘지.

그 묘지를 밟고 섰던 사내.


 
샤를로프는 시선을 거두고 벤하민에게 작게 웃어 주었다.


“일어날까요?”

“식사는?”

“전하께서 다 하셨다면 이만 일어나요.”

벤하민은 흔쾌히 식사자리를 정돈했다. 그가 옆으로 지나가자 모겐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주 찰나였지만 둘의 눈이 마주쳤다. 모겐스는 단번에 벤하민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전하를 뵙습니다.”

“바깥에서 거창한 인사 마.”

모겐스는 그녀가 기억하던 얼굴 그대로였다. 말끔한 낯에는 일말의 위화감도 없었다.

놈은 여전했고, 말끔한 몸가짐으로 그녀에게 악수를 건넸다.


“모겐스 베버입니다.”

샤를로프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답했다.


“샤를로프예요.”

모겐스는 샤를로프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는 듯 가만히 뜸을 들였다. 그 눈짓이 그녀를 훑었다.

모겐스는 그 이름이 왜 익숙한지 고민하다가 뒤늦게 답했다.


“샤를로프 튜텨.”

“뭐야, 모겐스 아는 사이였어?”

그의 친우들이 나를 바라본다.


‘다리를 저나? 쯧, 눈에 안 보이게 치워놔.’

또 더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몸의 신경이 굳어버렸을 뿐이다.

그런 나를 너희는 폐품 취급했고.

샤를로프는 기억을 곱씹으며 웃었다.

모겐스가 그녀를 두고 소개했다.


“튜텨가의 영애이시다.”

“튜텨가면 튜텨 후작가 말인가? 거기에 이 나이대의 영애가 있었나……?”

“조용히 해라. 너희는 무슨 그런 실례를……. 실례했습니다. 영애.”

이들이 샤를로프를 몰라보는 게 더 당연했다.

샤를로프가 어머니 병간호로 사교활동을 못 하면서 생긴 부작용 중 하나였다. 샤를로프는 그 존재감을 잃었다.


“뭘요.”

샤를로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생각을 그렇게 해주는 분인 줄 몰랐네요.”

그 위선도 그 가식도 역겹다.


“전하.”

더 나눌 이야기도 없고.

샤를로프는 벤하민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이만 가죠.”

 

* * *



“저놈이 어디 가문 사람이었더라?”

“베버가의 장남이에요. 황비세력 중 하나이고, 튜텨가와 가까이 지내는 가문 중 하나예요.”

그대로 튜텨가에 발목이 묶였다간, 또 베버가로 납치되듯 끌려가서 성혼식을 치를 뻔했다.


“이대로 파양되겠죠?”

윈저가에서 이미 절차를 밟고 있으니, 딱히 별일이야 없겠고. 이대로 끝이다.

누가 먼저 버렸을까? 내가 버렸을까? 너희가 버렸을까?

튜텨가의 딸아이라고는 샤를로프가 유일하지만, 파양된 뒤의 일까지 그녀가 걱정할 건 없다.

이제는 남이 됐다. 진짜 손을 놓았다. 샤를로프는 끅끅대며 무릎을 짚었다.

고개를 떨구자 긴 적발이 흘러내렸다. 시야를 가리자 붉게 충혈된 눈이 그림자 속에 숨었다.

몇 년이었을까. 몇십 년을 저놈에게 붙들려 내 삶을 잃었던가?

화재로 뺨 한쪽이 거의 짓뭉개졌다.

그리고 루퍼틱 병으로 몸이 마비되고, 병상 한쪽에 방치되어 보내던 날.

너는 내게 이야기했었지. 그 숨은 마지막까지도 치욕스럽다고.

끈질기게 붙은 숨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네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샤를.”

누군가 그녀를 부른다.


“샤를로프.”

샤를로프는 눈을 감았다.


“샤를로프 윈저.”

그림자가 졌다. 큰 존재감이 그녀를 덮었다.


“고개 들어야지.”

벤하민이 가까이 다가와 섰다.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벤하민은 샤를로프의 작은 머리통 앞에서 멈춰 섰다.

샤를로프는 고개를 들고 벤하민과 눈을 맞췄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보고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우는 거야?”

“아니요.”

“입술을 깨문다고 울음이 참아지진 않아.”

벤하민이 웃으며 그녀의 콧등을 툭 찔렀다. 샤를로프는 그의 그림자 아래로 몸을 숨겼다.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점점 가빠지던 호흡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벤하민은 그런 샤를로프의 머리를 다독이며 되물었다.


“괜찮나?”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만 슬슬 움직여야겠어. 튜텨가에서 사람들이 다녀갔을 때가 됐어.”

벤하민은 매끄럽게 샤를로프의 손목을 붙들었다. 벤하민이 이만 가자고 손목을 부드럽게 당기는데, 거기에 또 휩쓸렸다.


“외삼촌이 전하를 엄청 경계하세요.”

“그는 내게 좀 각박해.”

“그런데요. 요 며칠 사이에,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아스터가 벤하민을 경계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휘두른다.

황궁은 뱀 앞에 놓인 먹잇감이고. 그는 언젠가 그걸 모두 씹어 삼킬 거다.

그 사실에는 조금의 이견도 없다.

벤하민이 가족·친지를 죽이며 폭정을 이어가던 모습을 전생에도 한번 봤었다.

전생의 그는 혼자였다. 황위에 앉아서 홀로 군림했다.

종국에는 공포정치로 사람들을 꺾고 억누르고, 그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전하께서는 이 순간에도 혼자 군림하네요.”

당신은 지금도 홀로 서 있다.


“튜텨가가 전하를 싫어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튜텨가에서 나를 싫어한다고?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황비의 개에게 귀염받을 바에야 미움받는 게 훨씬 낫지.”

벤하민은 지배자의 눈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짓뭉개는 시선이 익숙했다.

당신은 언제까지 혼자 서 있을까?

전생의 그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도 폭정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죽어버린 뒤로는 알 도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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