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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뱀의 입 속에 (5/51)


#5. 뱀의 입 속에
2023.03.17.


샤를로프는 제 뺨을 따갑게 때렸다. 그 모습을 본 벤하민이 눈매를 찌푸렸다.


“너 뭐 하는 거야?”

그의 눈짓이 매서웠다.


“취했나?”

급기야 ‘취해서 저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샤를로프는 어색하게 웃었다. 뺨에 열기가 고였다.


“취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맨정신으로?”

벤하민이 손을 뻗었다. 스스럼없는 몸짓이지만, 그 태도는 정중하고 절제됐다.


“붉네.”

“네?”

“뺨이 붉다고. 윈저가 사람이 포도주 정도에 뺨이 붉어질 리는 없고. 그렇다고 자학은 안 돼. 그 집에서 지낸다면 더더욱. 레안드로 공이 무심해 보여도 걱정이 많아서, 그 앞에서 그랬다간 온갖 관심을 받을 테니.”

샤를로프는 그의 손을 내쳤다. 손등끼리 부딪치는 마찰감이 생각 외로 저릿했다.

나, 지금 뭐 하러 왔더라……? 휩쓸려서 원래 목적도 잊어먹을 뻔했잖아! 그런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흘끔거리는데, 벤하민이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들의 관심을 기피하는 듯 보여서 해준 이야기였어.”

“배려 감사해요.”

“아스터가 혼자 보내줬어?”

“식구들 모르게 나왔어요.”

“저런. 그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벤하민이 말끝을 흐리며 뭐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샤를로프는 다른 생각에 잠겨 듣지 못했다. 방금 뭐랬더라? 나 왜 계속 멍해지는 거야?


“샤를. 정신을 어디 놔두는 거야?”

벤하민이 뻗었던 손길을 거두어들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듣지 못한 표정이야.”

“네? 딴생각 중이었어요.”

“됐어. 흘려들어도 될 이야기였어.”

벤하민은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왜 그런 표정이야?”

“전하께서 나를 휘두르는 것 같아요.”

벤하민이 따분함에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만지작댔다.


“샤를.”

그가 한 번 더 애칭을 입에 담았다. 점점 더 거리감이 좁혀진다.


“경계심을 품으랬잖아.”

벤하민이 낮은 어조로 경고했다.


“내게 휘둘리지 마.”

“…….”

“아스터가 경고하지 않았었나? 나를 가까이하지 말라 이야기했잖아.”

벤하민은 지금 제 정보관들을 노출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유롭고 오히려 직접 찾아온 샤를로프에게 거미줄을 엮었다. 얽혀온다. 서서히 옭아맨다.


“울어?”

샤를로프는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아닌가? 웃는 건가?”

벤하민이 손을 뻗었다. 눈두덩이에 손이 닿았다.


 
그는 손끝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혀끝에 댔다. 그리고 손끝으로 입가를 만지작대며 눈매를 찌푸렸다.


“……짜.”

“벤하민.”

“응.”

“눈물은 먹는 거 아니에요.”

벤하민이 소파에 묻었던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샤를.”

“네?”

“여기서 경계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어.”

벤하민이 무언가를 발로 지르밟았다.

아무래도 저 발아래 깔린 게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감인 것 같다.


“전하는 제가 튜텨가 사람이라는 걸 잊었어요. 튜텨는 황비를 지지하는 세력이에요.”

“너는 윈저야.”

“아니에요. 제 피의 반은 튜텨예요.”

“나도 그게 의문이었어. 왜 거기서 너 같은 아이가 태어났을까?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말이야. 따로 떼어놓고 보면, 너는 윈저에 더 가깝지. 평소 말버릇부터, 손짓 하다못해 시선 처리까지도 말이야.”

샤를로프도 잘 안다. 그녀는 튜텨가 아닌 윈저를 닮았다. 그 사실이 친부의 열등감을 자극했었다.


“닮지 않았죠.”

머리칼 한 올부터 사소한 모든 게 윈저를 닮았다. 이 피에 깃든 건 튜텨가 아닌 윈저였던 모양이다.


“그 애는 아버지를 닮았던데.”

“튜텨가에 너 말고 애가 더 있었나?”

제 친부에게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아, 슬슬 찾아봐야 하나…….”

“누구를.”

“나 대신 튜텨가로 데려다 놓을 사람들이 있어요.”

“이름이랑 인적 사항 적어놔. 찾아다 줄 테니까.”

“어째서요?”

“그냥, 받는 만큼 돌려주는 것뿐이야.”

벤하민이 빈 쪽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샤를로프가 대충 인적 사항을 적어서 넘기자, 벤하민이 쪽지를 넘겨받았다.


“이 둘만?”

“네.”

“금방 찾겠군.”

벤하민은 입술을 더듬거리며 눈매를 가늘게 흘겼다. 벤하민도 그제야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뒀다.


‘권태로움.’

얘는 지금 뭐든 귀찮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왜일까.”

벤하민은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혀 입술을 더듬거렸다.


“네가 내 입안에 머리를 집어넣은 기분이야.”

“그래서 먹잇감은 낚아챘어요?”

“진짜 내게 머리를 집어넣은 게 맞다면, 지금 그대로 낚아챌 거야.”

당신이 뱀처럼 나를 먹잇감으로 본다면, 나는 기꺼이 먹잇감이 되어도 좋다. 그 입에 기꺼이 먹혀 주겠다.


“그 먹잇감 낚아채셨다면.”

짙은 눈동자에 깃든 건 공허함이었다.


“전하 그림자 뒤에 숨겨주세요.”

벤하민은 뱀 같은 부류였다. 뱀이 아가리를 벌리더니 침을 뚝뚝 흘렸다.


“어디에 내 입속에 아니면 배 속에?”

“입속도 좋고 배 속도 좋고요. 다만, 배 속에 넣을 거면 소화 시키진 마세요. 먹고 배탈 나거든요.”

벤하민은 마지막으로 도망칠 길을 열어준다는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아스터는 네가 이러는 거 알아?”

“오해하지 말아요. 외숙부께서는 모르시니.”

“그쯤은 알아. 아스터가 미치지 않고서야 너를 내 앞에 데려다 놓을 리 없지.”

벤하민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먹잇감을 꿀꺽 집어삼켰다.

* * *



“무슨 놈의 소나기가 저렇게 살벌하게 내립니까?”

밖에서는 비가 쏟아졌다. 아스터는 모노클 안경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습기 때문일까. 머리칼이 빗물을 머금은 듯 나른하게 처졌다. 그 습기가 거추장스러웠다. 추적추적 대문 앞에 빗물이 고였다.


“샤를이 늦는군요.”

레안드로가 그 말에 반응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굴렸다.


“때 되면 오겠지.”

“그 애에게 너무 무심한 거 아닙니까?”

레안드로는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럼 내가 뭘 어쨌어야 했느냐?”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날이 밝으면 나가라…….”

“억지로 잡아두지 마라. 저 애는 억지로 잡으면, 발목을 끊고 나갈 애야.”

“그런 부분까지 제 친모를 닮았군요.”

그 집안과 연을 끊고 윈저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에, 코제트는 망설임 없이 제 발목을 끊고 튜텨가에 몸을 묶었다.


‘내가 그 애를 놓으면 그 애는 어떡해요?’

 
그게 마지막이었던가?

또다시 빗소리만 이어졌다. 윈저가는 침전됐다.


“너무 닮았지.”

그 애는 여전히 어렵다. 빗소리를 뚫고 대문 앞에 사설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우산을 쓴 누군가 거기서 내렸다.


“저건 전하가 아닙니까?”

“태자 전하 말이냐?”

“왜 전하께서 저 아이와……?”

“어디서 마주쳤겠지.”

“이 시간에 말입니까? 윈저가가 전하와 가까이 지내는 건 맞지만, 그건 윈저가 한정이잖습니까? 저 아이는 며칠 전에 처음 봐놓고…….”

윈저가는 예전부터 벤하민 곁에 서서 황비와 황태자의 세력 간 균형을 맞춰온 가문이었다.

윈저 공작도 표면상으로만 중립을 유지 중이되, 그 무게추는 이미 다음 대의 황제에게 기울었다.

레안드로가 피곤하다며 눈두덩이를 주무르며 이야기했다.


“됐다. 너도 그만 가서 자거라.”

“예.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자러 가야죠.”

아스터는 샤를로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 애의 느린 발걸음이 이어지고, 기척도 사라졌다.


“그런데 기분 탓입니까?”

“뭐가 말이냐?”

“왜 이상한 게 꼬인 기분이죠?”

아스터는 기분 나쁜 직감에 눈매를 찌푸렸다. 웬 이상한 놈이 꼬여서 집안에 굴러들어온 기분이잖아.

* * *



‘경계심을 품으랬잖아.’


‘여기서 경계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어’

 
샤를로프는 외출복을 벗으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내가 경계심이 없었나?”

벤하민 앞에서만 유독 경계심을 잃는 건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오히려 무방비하게 벽을 허물었지. 외가댁 식구들 앞에서도 그 정도로 무방비한 적은 없는데.

그 사람 앞에서는 묘한 존재감을 느꼈다.

‘샤를로프’ 그 이름이 갖는 존재감을 한 번 더 확인해주는 것 같았다.

맞아.

튜텨가 아닌 윈저로 봐주고, 그 존재감을 깨워준 게 벤하민이었지.

샤를로프는 입술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해롭다는 게 이런 거였나?”

눈두덩이도 뻑뻑하고, 어깨도 뻐근하게 아려왔다.

침의를 입고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누가 방문을 두들겼다.


“샤를로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목을 큼큼 가다듬은 아스터가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시간도 늦었는데 왜 찾으시지? 그녀는 의자에 대충 걸쳐두었던 숄을 두르고 방문을 열었다. 아스터가 뒷짐을 지고 문밖에 서 있었다.


“내가 자려는데 괜히 불러냈냐?”

“아니에요.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일어나 계셨어요?”

아스터는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일단은 서 계시지 말고 앉으실래요? 여기 앉으세요.”

“아니다. 아니야. 그냥 한번 올라와 본 거다.”

“방금 할 말씀 있으시다고……?”

“내가 그랬나? 그래. 내가 그랬지. 그게 말이다. 네가 조금 전에 어디 외출하다 돌아오는 걸 봤다. 음, 전하께서 너를 데려다주시던 것 같던데, 어디 다녀오던 길이냐?”

에둘러 표현하는 게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말이 띄엄띄엄 끊겼다. 그렇게 눈치 볼 것도 아닌데,

그 조심스러움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도 뻔했다. 죄책감이었다. 제 친모의 죽음에서 기인한 죄책감이라, 괜스레 씁쓸해졌다.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왔어요. 음, 그 길에 전하와 마주쳤는데 밤이 늦었다고 데려다주셨거든요.”

“그랬냐? 그래. 하긴.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샤를, 네가 전하와 좀 가까이 지내는 듯 보이는데, 혹시 내 착각이냐?”

너무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서 뭔가 했더니, 저 말을 하고 싶었구나.


“혹시 그런 거면, 외삼촌께서 난처해지나요?”

“아니다. 아니야! 내가 난처하다는 게 아니다. 네가 난처해질 듯해서 하는 이야기였어. 오해하지 말아라.”

샤를로프는 입가를 가리고서 은은히 웃었다. 아, 저 적나라한 죄책감은 어떡할까. 나는 괜찮은데, 진짜 이제는 괜찮은데 말이다.


“네 친부가 둘째 황자와 가까이 지낸다는 건 알고 있냐?”

“외삼촌, 내가 그분 입장까지 고려해야 할까요?”

“…….”

“굳이요?”

다시 되짚자.

윈저가는 황태자 벤하민을 택한다.

튜텨가는 둘째 황자 로던스를 택한다.


“벤하민 비센노프, 그분은 타고나길 군주로 태어났다.”

아스터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하듯 덤덤했다. 그 와중에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했다.


“그분이 네게 관심을 갖도록 두지 마. 끊어내라. 네 발로 그분의 입안으로 들어갈 일을 만들지 마.”

아스터는 벤하민을 경계한다.


“그분은 네게 위험하다.”

샤를로프는 은은히 웃으며 되물었다.


“선대 황후께서 타계한 게 언제인지 기억하세요?”

“16년 전이었다.”

“그때, 전하의 나이는요.”

“일곱이었지.”

“네. 일곱이었죠. 16년이에요. 어렸죠, 정말? 친모의 죽음을 겪고, 그 눈으로 처형대까지 직접 본 분이에요.”

벤하민에게 세력이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세력을 만들어줄 지지층이 선대 황후와 함께 줄줄이 처형됐다.


“죽음 앞에 서 계시는 분이에요.”

결국은 스스로 칼날을 휘두를 거고.


“나 또한 그렇고요.”

우리 둘 다 비슷비슷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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