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너를 망쳐 달라는 듯 보고 있잖아 (3/51)


#3. 너를 망쳐 달라는 듯 보고 있잖아
2023.03.10.



 


“혹, 혹시 일행입니까?”

“…….”

“아닙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한 듯하네요. 실례했습니다.”

하녀들은 금방 포기하고 떠났다.


“얘, 그냥 가자. 이리 와. 얼른.”

이들의 포기는 예상보다 더 빨랐다.

샤를로프는 그들이 떠난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혈향이 짙다. 손아귀를 가로지르는 저건 아직 다 아물지도 않은 상흔이었다.

그가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샤를로프는 그를 잘 안다.


‘폐태자 벤하민 비센노프’

제 가족과 친지까지 죽인 패륜아로 불리며, 훗날 가장 강한 황권을 이뤄내는 5대 황제.

세간에서는 벤하민을 놓고, 그의 지지세력이 미미해서 황위에 오르지 못한다는 평도 있었다.

세간의 평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세력이 미미한 건 맞았지만, 그는 가족·친지를 죽여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옷은 좀 놓지.”

벤하민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가 얇은 손목을 감쌌다.


“겁도 없이 여기를 혼자 오나?”

그는 가벼운 손짓으로 샤를로프의 손을 떼어냈다. 처음 보는 샤를로프를 대하는데도 경계심이 일절 없다.


‘왜?’

벤하민은 샤를로프를 이미 아는 듯 이야기했다.


“윈저가 사람 아닌가?”

“……그게 보이나요?”

벤하민이 손을 뻗어서 그녀의 숄을 벗겨냈다.


“그 적발을 보고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놀라운데…….”

자홍색 적발이 구불거리며 흘러내렸다. 샤를로프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샤를로프에게는 윈저가의 피가 짙게 섞여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붉은 적발이 그 증거였다.


“저기 보호자가 오는군.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지 말고 집으로 가.”

벤하민은 그 말만 남겨 두고 떠났다.

샤를로프는 맥없이 뻗었던 손을 내렸다. 그녀가 등을 돌리자, 윈저가에서 따라 보냈던 하녀가 골목 안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아스터가 동행인으로 붙여준 하녀 베키였다.


“아가씨! 깜짝 놀랐잖습니까?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면 어떡해요?”

샤를로프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벤하민이 사라진 뒤였다.

어딘가 홀린 것 같았다.

샤를로프는 멍하니 서서 골목길 너머를 바라봤다. 아무도 없다. 그 기척 또한 사라졌다.


“아가씨 여기서 혼자 뭐 하십니까?”

“누구를 본 것 같았는데 잘못 본 모양이야.”

샤를로프는 꽃다발을 내려다봤다.

꽉 움켜쥐면서 국화꽃의 줄기가 구부러졌다.


“사라졌나?”

그녀는 말없이 머리칼만 쓸어넘겼다.

* * *



“손바닥은 어쩌자고 작살을 내놓으셨습니까? 아주 살갗이 너덜너덜하군요. 이쯤 하면 손목을 잘라내도 되겠다. 싶은 만큼 으깨두셨습니까?”

“그 입 좀 다물어라.”

벤하민은 재잘대며 따라붙는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확실히 아주 너덜너덜 찢어놓았다.


“황비에게 꼬리를 밟혀서 잘라낸다는 게 내 손목을 잘라낼 뻔했지.”

황제가 병상에 눕고 황궁은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병상에 누운 와중에도 황제가 권력을 놓지 않고, 황비의 드레스 아래에 고개를 파묻고 지내니 꼬락서니가 얼마나 참담한지는 굳이 말로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 팔뚝은 왜 또 너덜너덜해졌습니까? 황위를 물려받기도 전에, 그 목숨줄부터 간당간당해질 것 같은데 괜한 우려입니까? 그 팔뚝은 물에 담갔다 꺼낸 종이쪼가리 같군요. 아주 너덜너덜 찢어서 버리실 작정입니까?”

“그냥 죽으라 고사를 지내는 게 어때?”

로스켈라가 신랄하게 비꼬는 이야기에 벤하민은 혀를 찼다.

그는 황궁 안팎의 정보를 취합하는 책사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것에 비해 입담은 험했다.

로스켈라는 아무렇게나 집히는 붕대를 찾아서 건넸다. 초에 불을 켜서 보자 그 상흔이 예상보다 더 깊었다.

벤하민은 붕대를 감다 말고 방금 본 여인을 떠올렸다.

그의 눈앞에서 붉은 드레스 자락이 아른거렸다. 레이스 하나 없는 무난한 옷. 그래서 더 침울해 보였을지 모른다.

나른한 위화감이 그를 감쌌다. 질척거리는 진흙 같은 것들이 그를 땅밑으로 잡아끄는 것 같았다.


“윈저가에 가주와 두 아들 외에 다른 식구가 있었나?”

“코제트 윈저라고, 레안드로 공의 따님 한 분이 더 계셨죠. 그런데 일주일 전에 장례를 치른 줄 압니다. 그 외에는 다른 식구가 없는 줄 알고요. 물론, 방계나 그런 쪽은 예외입니다.”

벤하민은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일단 두 분께서는 자식이 없으니, 직계 혈통은 거의 끊겼다고 보는 게 맞겠죠.”

 

* * *

어머니 유골함을 묻기로 한 아침이 밝았다.

샤를로프는 비석과 묘지 앞에 서서 국화꽃을 묘지 아래로 던졌다.


“잘 가요. 어머니.”

이게 어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다.

그녀는 유골함이 다시 묻히는 모습까지 모두 눈에 담아냈다. 충혈된 눈이 곱게 접혔다.

다 기억할게. 두 눈에 하나하나 담아둘게. 곱씹으면서 머릿속에 새겨둘게.

국화꽃을 유골함 위에 놓았다. 그리고 하인들이 흙을 유골함 위에 흩뿌렸다.


“잘 가.”

유골함이 완전히 묻혔다. 그 건조한 눈짓은 흙 아래 묻힌 어머니 흔적을 좇았다.


“괜찮으냐?”

아스터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내가 괜찮던가? 내 기분은 늘 뒷전이었던지라 말이야.


“네.”

내가 괜찮으면 그게 미친 거야.


“괜찮아요.”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그 밑바닥이 곧 탄로 날 것 같았다.

나는 지금 괜찮아서 웃는 거야.

그러니 감히 동정하지 마. 이 무덤 앞에서는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아야 해.

그게 샤를로프 튜텨.

튜텨가의 빌어먹을 성씨를 이어붙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다.


“방은 마음에 드냐?”

아스터는 갈 곳 없는 샤를로프의 처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윈저가에 방을 마련해줬다.

그는 이런 부분까지 생전 어머니를 닮았다. 시선 하나로 내면까지 읽어내는 게 어머니의 형제다웠다.


“방은 좋아요. 외삼촌께서 직접 배려해주셔서 편히 머무르고 있어요.”

“너는 코제트와 안 닮아도 될 부분까지 닮았어.”

“어떤 부분이요?”

“스스로를 내려놓은 사람이나 지을 법한 표정 말이다. 그 애가 무언가를 포기할 때면 꼭 그런 눈짓을 짓고 했거든.”

샤를로프는 적발을 쓸어넘기고 건너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윈저가 대문이 빠르게 열리고 낯선 마차가 윈저가에 들어섰다. 무늬 하나 없는 마차였다. 그 안에서 피 칠갑을 한 사내가 내리자 하인들이 신음하며 앓았다.


“어이쿠. 오늘은 또 왜 저런 모습으로……!”

“전하께서…….”

“또 피칠갑을 하고 오셨군요. 가주님께서 또 크게 노여워하겠습니다. 가주님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린 참이었다. 야행복을 입은 그는 팔뚝을 손아귀로 움켜쥐더니 셔츠를 찢었다.


“아가씨.”

“왜.”

“방으로 모실까요?”

샤를로프는 고개를 흔들며 하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시선은 여전히 낯익은 손님에게 닿아 있었다.

그의 팔뚝 한쪽이 통째로 찌부러졌다. 칼에 찢겨 나간 살갗이 너덜거렸다. 그녀는 작게 감탄했다.


‘폐태자 벤하민 비센노프.’

두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에게 향했을 때쯤, 누군가 제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외숙부?”

아스터가 그녀를 등 뒤로 보내서 숨겼다.


“전하께서는 또 어딜 다쳐온 겁니까? 제 몸뚱이 귀한 줄 모르는 건 어려서도 커서도 마찬가지로군요.”

아스터는 착잡하다며 벤하민을 바라보더니, 샤를로프를 더 꼼꼼히 숨겼다. 그런데, 아스터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샤를로프는 이미 벤하민과 구면이었다. 벤하민도 그녀를 알아봤다. 그의 시선이 사뿐히 내려앉았고,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또 보는군.”

벤하민이 짧게 그녀에게 인사치레했다. 그 이야기에 당황한 건 아스터였다.


“이 아이와 구면입니까?”

“저번에 한 번……. 아스터 그대의 딸인가?”

“아닙니다. 죽은 여동생의 아이입니다. 앞으로 여기서 지낼 예정이고요. 샤를, 네 방으로 올라가라.”

아스터는 꼭 갓 태어난 병아리 새끼를 족제비에게서 보호하듯 경계심을 부풀렸다. 벤하민은 그녀에게 닿은 눈짓을 거둬내고 아스터와 눈을 맞췄다.


“이 시간에 괜한 실례를 범한 건 아닌가 모르겠어.”

“실례랄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 팔뚝 하나를 잘라내기라도 한 겁니까?”

“급습이 있었지. 여기서 치료 좀 하고 가려는데 괜찮나?”

샤를로프는 그런 벤하민을 유심히 보고 이야기했다.


“전하께서는 팔을 치료하는 게 먼저인 듯한데, 의관부터 부르는 게 좋겠어요.”

외숙부.

짧게 되뇌는 목소리가 은은히 가라앉았다. 우리는 서로를 잠자코 바라봤다. 폐태자 벤하민.

제 가족·친지를 모조리 죽이고, 황실의 유일무이한 핏줄이 될 사람.

그리고, 제 친부가 가장 혐오하던 5대 황제.

그 이름만 들어도 발작하고, 황궁 방향으로 침까지 뱉으며, 입에 게거품을 물게 만든 원흉.


‘안녕.’

그 사람이 지금 웃고 있다.


 

* * *

벤하민과는 오후 무렵 다시 마주쳤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샤를로프에게 유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윈저가란 소속이 그 이유였다.

벤하민은 오래전부터 윈저가와 긴밀히 지내온 것 같았다. 저택 문턱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부분부터가 그랬다.


“샤를로프랬던가?”

“네.”

“확실히. 처음 봐도 딱 알아보겠어. 윈저가는 하나같이 자기주장이 확실하거든. 그 존재감이 조금이라도 주눅 들면, 머리부터 꼿꼿하게 드는 게 보여.”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빤히 응시했다. 특유의 느른한 기운이 꼭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지배자의 태를 타고났다. 그 뱀은 나무 꼭대기에 똬리를 틀고, 제 구역을 제 몸으로 덮어서 감쌌다.


“왜 그렇게 봐?”

“상처는 다 치료하셨어요?”

“뭐. 대충은.”

아. 아버지께서 그를 혐오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 정도면 거북함이 들만해.’

사람이 머리 꼭대기에 있다.


“위험한 생각을 하는 듯 보여.”

벤하민이 그녀를 보며 눈짓했다.


“지금 그 좁은 머릿속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뜨거워졌을까…….”

벤하민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그 눈웃음에 담긴 감정은 그녀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는 유추하기도 어려웠다.

벤하민은 제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감정을 추슬러 숨겼다.


“무슨 뜻이에요?”

“이마에 열이 고이는 것 같으니 머리를 식히라는 뜻이야.”

벤하민이 그녀의 이마를 손끝으로 찔렀다.


“전하.”

팔뚝에 붕대를 잔뜩 동여맸는데, 붕대로 다 가렸어도 위협적인 태는 숨기지 못했다.

지금 그가 어떤 처지더라? 황비 세력에 신변을 위협받던 중이었던가?


“급습이라더니 몸이 엉망이시네요.”

“아, 우리 집 개가 성질이 사나워서 말이야. 몇 번 장단 맞춰 놀아주면 이 꼬락서니가 되는군.”

벤하민은 옷을 반쯤 헐벗고 있었다.


“아스터는?”

“집사장이 불러서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너만 놔두고?”

“물론 외숙부께서는 자리를 비우면서 전하와 가까이 있지 말라 말씀하셨는데, 아무래도 그 말씀은 지켜드리기 힘들지 싶네요.”

샤를로프가 은은히 웃자 벤하민이 셔츠를 걸치며 답했다.


“아스터가 굉장히 경계심 없는 외조카를 들여놨어.”

벤하민은 무언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이야기야.”

샤를로프는 그녀의 뺨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내 지금 표정이 어떤데요?”

그의 본성은 고요하기보다는 탁하고 어두운 쪽에 더 가깝다.

벤하민은 칠흑처럼 어두운 눈을 가졌다. 그 눈은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그 속에 담긴 ‘무언가’를 읽어내기란 그녀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너를 망쳐 달라는 듯 보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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