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죽음이 우습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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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죽음이 우습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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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죽음이 우습던가?
2023.03.07.
그대로 혼절해 버리는 건 그녀도 예상 밖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윈저가로 온 것까지는 다행이었는데, 그대로 긴장이 풀려 버린 게 화근이었다.
“애가 갑자기 쓰러져 버리는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굽니까? 못 보던 얼굴인데요. 아가씨께 해코지라도 한 겁니까?”
차가운 금속이 몸에 닿는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감각에 팔을 내저어서 거부했다.
피곤함 때문일까. 졸음이 계속 몰려왔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는데, 그래도 예전보다는 괜찮았다.
“체온부터 확인해 보겠습니다.”
누군가 ‘아가씨 잠시만.’ 하고 차가운 금속을 다시 가져다 댔다.
“체온이 높군요. 윈저가에 이런 아가씨도 있었습니까?”
“우리는 아니고 코제트……. 어미를 닮아서인지 겁도 없군. 이 시간에 혼자 찾아오더니, 혼자 혼절해버려서 당혹스러운 건 오히려 내 쪽이다.”
한 톨의 먼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다시금 의식이 잠겼다.
* * *
“피로 누적 같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아가씨 낯빛이 나빴다고 하셨지요?”
낯선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거의 회복된 것 같기도 하고.
“깼나?”
그녀가 주변을 경계하자 사내가 뒤늦게 설명했다.
“윈저가 저택이다. 나는 아스터 윈저이고, 네게는 외삼촌 되는 사람이겠군.”
아스터는 본인이 무해하다는 걸 입증하듯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는 윈저가의 차남이자, 샤를로프에게는 외숙부 되는 분이었다.
그 곁에 있던 주치의 린턴도 스스로를 소개했다.
“윈저가 소속 의관 린턴입니다. 확실히, 코제트 아가씨를 빼닮았습니다. 멀리서 봐도 윈저가의 핏줄임을 알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처음 보지만, 서로를 닮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윈저가의 핏줄은 자홍색 적발을 타고났는데, 샤를로프 또한 그랬다.
검은빛이 섞인 적발은 어두운색을 띠지만, 그런데도 그 존재감만큼은 확실했다.
“여기는 어디…….”
“윈저가 저택입니다.”
샤를로프는 느릿하게 주변을 살폈다. 연분홍색의 벽지에 하늘거리는 캐노피와 보드라운 침의까지.
샤를로프는 그제야 여기가 윈저가 저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녀가 어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자, 아스터가 침대 맡에 앉으며 누군가를 불렀다.
“이것 봐라. 린턴”
부름을 받은 린턴이 침대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어디가 잘못된 건가? 머리가 잘못된 게 아니고서야. 애가 왜 저래?”
“아스터 님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앞에서 다 듣고 있습니다.”
샤를로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튜텨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 같다.
“유골함은요?”
아스터는 린턴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이래도 과민반응이라는 거냐? 지금 막 깬 애가 제 친모의 유골함부터 찾는데, 이게 정상적이라고?”
“그냥 성숙한 겁니다. 제발, 아가씨도 앞에 계시는데 말씀 좀 가리십시오.”
아스터는 됐다며 린턴을 뒤로 보내두고, 샤를로프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 꼴로 왔으니 뭘 설명할 상황도 아닐 거고.”
아스터는 저택 앞에서 쓰러지던 샤를로프의 낯을 떠올렸다. 그 창백하던 낯에 이제야 핏기가 돌았다.
곧 죽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런 애 앞에서 왜 그딴 꼬락서니로 왔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섣불리 찔렀다간 곧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스터는 턱밑까지 올라왔던 물음을 꾸역꾸역 삼켜야 했다.
‘코제트 이것아…….’
아스터는 머리를 헝클이며 어렵사리 딱 한 마디 꺼냈다.
“네 아비는 어쩌고?”
이 무렵 아버지가 어땠더라? 너무 까마득한 기억이다. 지난 전생까지 합치면 십수 년은 더 흘렀잖아.
“샤를로프.”
샤를로프는 가까스로 아스터와 눈을 맞췄다.
“집에 안 계세요.”
“너 혼자 두고 어딜 나간……또 빌어먹을 되지도 않는 사업을 들쑤신다고 자리를 비운 건가? 장례까지 치른 마당에 말이냐?”
그들도 어머니의 부고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다만, 그 방문은 거절당했다.
“우리에게는 찾아오지 말라 하고, 너를 혼자 놔뒀다는 거냐?”
아스터는 소파 팔걸이를 움켜쥐고, 천천히 화를 삭였다. 샤를로프는 그 틈에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유골함이 없다. 대문 앞에서 마주친 뒤로 기억이 없는데, 머리가 점점 공허해질 무렵이었다.
“네 어머니 유골함은 내가 따로 챙겨뒀다.”
아스터가 한숨 소리와 함께 말을 꺼냈다.
“그만 두리번거려라.”
샤를로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스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그 유골함은 설명해야 하지 않겠냐?”
“……”
“아니다. 그걸 네가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네가 이런 꼴로 나를 찾아오는 일도 없었겠구나.”
어머니 묘를 직접 파헤쳐서 유골함을 꺼냈다. 그 어두운 밤, 무섭다는 느낌조차 잊었다.
그 눈은 공허하게 허공만 좇았다. 넋이 나간 눈동자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모호한 눈짓만 보내왔다. 샤를로프는 이불을 움켜쥐고 나른한 어조로 속삭였다.
“오늘 밤만 여기서 재워 주세요.”
그리고 아이처럼 아스터의 옷자락을 당겼다.
“하루만요.”
샤를로프는 고개를 떨구고 눈을 공허하게 떴다. 공허해진 눈동자는 서늘하게 식었다. 온기는 없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이야기하자.”
아스터가 느릿하게 자리를 피했다. 샤를로프는 모두 나간 걸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긴 적발을 쓸어넘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샤를로프는 벽을 손가락으로 쓸며 창가로 갔다. 창문을 손가락으로 밀자 창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시간은 늦은 새벽이었다. 더군다나 새벽하늘인지라 어두웠다.
“아아아. 아아…….”
가슴이 서서히 아려왔다. 화 나. 이 모든 게 거지 같아.
* * *
레안드로 윈저,
윈저가의 주인이자 그녀의 외할아버지 되는 분이었다.
레안드로는 백발이 무성했지만, 노쇠하기보다는 단단하고 굳건한 노인이었다.
“이게 코제트의 유골이라고.”
레안드로는 눈앞의 유골함을 가만히 만졌다. 딸아이의 마지막 흔적을 가라앉은 눈으로 담아냈다.
“코제트, 코제트……. 그 애가 나를 원망하였냐?”
샤를로프는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제 친모는 누군가를 원망할 사람이 아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워하긴 했지만 밉다는 말씀은 안 했거든요.”
“너는 그 애가 왜 우리와 연을 끊고 지냈는지 아는 거냐?”
샤를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이냐?”
“아니에요, 외할아버지.”
자세한 사정은 그녀도 잘 모른다.
두 분은 정략결혼으로 맺어졌다.
두 가문 모두 사업을 기반으로 커온 가문이었고, 공동사업의 증표로 결혼서약을 맺었다.
두 분의 인연은 거기서 시작됐다.
다만, 아버지는 권위적이었고 사업을 잇달아 실패했다. 그런 과정에서 두 가문도 자주 부딪쳤다.
끝내는 외가에서 지원을 끊었다.
세 번의 사업을 실패한 결과였다. 아무튼, 그 무렵 샤를로프가 태어났다.
“윈저가로 떠나려거든, 아이 양육권은 포기하고 떠나랬거든요.”
제국에서는 아이의 양육권을 친부에게 우선적으로 주는 법률조항이 있었다.
친부에게 결함이 있든 말든, 양육권의 우선권은 무조건 친부에게만 주어진다.
친부가 먼저 양육권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친모가 먼저 양육권을 주장하지는 못한다.
양육권을 포기하든, 윈저가와 연을 끊든,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그런 삶을 보여주기 싫어했어요. 스스로 포기하셨던 것 같아요.”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저는 나가 있을게요.”
샤를로프는 유골함을 레안드로의 집무실에 두고 나왔다.
‘나는 망가져도 좋아요.’
지금 이 삶이 망가져도 좋다. 이 앞길이 막다른 길이어도 좋다. 미련도 후회도 없다. 티끌 마한 미련마저도 다 버렸다.
“코제트의 마지막은 어땠냐.”
아스터가 그녀의 뒤에서 물었다.
“편안히 눈 감으셨어요.”
이제는 마지막 표정조차 기억나지 않아. 차라리 그 시신이라도 눈에 담게 해주지.
그럼 기억이라도 날 거 아냐. 왜, 왜 지금 이 시기야?
그 묘지에서 유골함을 꺼냈던 것도 나고, 어머니 마지막 임종을 지켰던 것도 나인데,
‘기억나지 않아.’
마지막 표정 하나 기억나지 않는다.
샤를로프는 애꿎은 주먹만 말아쥐었다. 손톱이 손아귀를 할퀴었다.
“유골함은 언제 묻나요?”
샤를로프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대고 물었다.
“그건 내일 아침에 묻겠다.”
아스터는 복잡 미묘한 눈길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네. 고마워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걸음을 다시 옮겼다.
* * *
샤를로프는 국화 한 송이를 손아귀에 쥐었다.
유골함을 묻을 때 어머니께 드릴 꽃을 사러 나온 길이었다.
샤를로프는 국화꽃 값을 계산하고, 꽃다발을 품 안에 안았다. 긴 적발에 파묻힌 순백색의 국화꽃이 오묘했다.
“아침에 보니까 샤를로프 아가씨 침실이 비어 있더라?”
그녀가 머리를 쓸어올리고 꽃잎을 손끝으로 툭툭 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외출이라도 하셨대? 몇 날 며칠을 울어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는데, 집이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그날 봤어? 계집애가 그날 눈을 떴는데 좀 이상하더라? 엄마 묘지가 어딨는지 묻고, 영정 사진을 보고 실성하듯 웃었다니까.”
샤를로프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튜텨가의 하녀들이었다.
샤를로프는 곱슬거리는 적발을 헝클였다. 저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좀 미친X 같았어.”
“아니. 미친 거 맞잖아. 자기 엄마 묘지 앞에서 웃던 거 봤어? 묘지 앞에 꿇고 앉아서 미친 듯이 웃더라니까. 내가 무서워서 가까이 가질 못했어.”
가문을 향한 충성심 하나 없는 이들이었다. 안주인의 죽음을 놓고 낄낄대며 비웃는 작태를 보라.
더럽다. 추잡해. 저 죽음이 너희에게는 고작 그저 그런 죽음이었나?
그녀는 숄을 덮어쓰고 골목길 한쪽에 몸을 숨겼다.
‘그 죽음이 우습던가?’
감히 너희에게 우스워서는 안 될 죽음이었다.
그녀가 골목길 한쪽으로 몸을 숨기는데, 누군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먼저 지나가지.”
샤를로프가 몸을 옆으로 피해주는데, 사내가 먼저 지나가는 게 빨랐다.
담벼락에 어깨를 부딪쳤다. 비틀거리며 몸을 웅크리는데,
무언가 그녀를 폭 하고 감쌌다.
사내가 굵은 손아귀로 그녀를 감싸 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스락-
사내가 나뭇잎을 밟았다.
“괜찮나?”
“네. 고마워요.”
그는 샤를로프가 똑바로 선 것만 확인하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려는데,
“샤를로프 아가씨……?”
하녀의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아. 눈이 마주쳤다.
“거기, 잠시만요!”
저들에게 잡히면 더 귀찮아진다.
샤를로프가 숄을 눌러쓰고 그의 뒤에 따라붙는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따라와?”
그의 로브가 벗겨지고,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잔머리 몇 가락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비릿한 피 내음이 났다. 그의 손등 아래로 핏방울이 쪼르륵 흘렀다.
“……도와줘요.”
샤를로프가 그의 옷자락을 슬쩍 잡을 때였다. 그가 샤를로프를 오롯이 내려다봤다. 그 뒤, 그 시선은 뒤로 향했다.
“뭐야.”
낮은 목소리가 길목 안쪽에서 퍼졌다.
“손 놓고.”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꺼져.”
말 몇 마디가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