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무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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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무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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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무덤 속에서.
2023.03.03.
샤를로프는 죽음을 직감했다.
‘곧 죽는다.’
무기력하게 맞이하는 죽음은 쓸쓸했다.
아픈가? 아프다는 통증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다.
감각은 이미 무뎌졌다. 서늘한 한기만 남았다.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이어지던 숨도 천천히 멎었다.
괴롭다. 바늘로 목구멍을 할퀸 듯 기도가 너덜거렸다.
샤를로프는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폐부가 조여드는 것 같았다. 병상에서 홀로 임종을 맞이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그만 좀 울어요!”
샤를로프는 혼란스럽게 눈을 떴다.
나, 지금 우나? 나, 왜 울고 있는 건데……? 이상하잖아. 이거 왜 이러지……? 손바닥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이 가늘고 뜨거웠다.
“마님께서 돌아가시고 아가씨가 정신이 나갔군요.”
“너무 울잖아! 나 이제 우는 소리면 지긋지긋하다고!”
“조용히 해라. 아가씨 듣는다.”
“내가 정신병이 올 것 같아서 그러잖아! 마님이 죽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 앞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
샤를로프는 손을 내려서 눈가를 쓸었다. 머리가 혼미해질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머릿속에 고였다.
“여기는 어디……?”
여기가 어디인 줄 안다.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현실감이 없다.
눈앞에는 죽은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몇십 년 전에 죽은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었다.
“죽었잖아. 왜?”
“네. 튜텨 부인께서는 돌아가셨어요. 아가씨, 그 사실을 이제는 인정하실 때도 됐잖아요!”
그 죽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내가 죽었잖아.”
샤를로프는 이미 죽었다.
굳이 떠올려보면 좋은 기억도 없었다.
두 번이나 버림받고 죽었다. 처음에는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너는 이미 다 크지 않았냐?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 묘지는 내연녀 손에 짓밟히고 더러워지고, 아버지는 새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그 손으로 모녀의 흔적을 지웠다.
그 뒤, 떠밀리듯 혼사를 치렀다. 가문에 떠밀려 강제혼인을 맺었고, 또다시 버림받았다.
화상으로 뺨 한쪽이 짓무르고, 그 존재는 치부가 됐으며,
그리고 마지막 임종 때는 루퍼틱 병으로 폐가 굳어서 죽었다.
두 번이나 버림받았다. 그래. 그게 끝이었잖아. 그 숨은 이미 끊겼다.
“아가씨?”
그리고, 그녀는 친모를 잃었던 열아홉살의 그날로 돌아왔다.
샤를로프는 비틀거리던 몸을 다급하게 일으켜 세웠다. 두 다리가 맥없이 휘었다. 모든 감각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괜, 괜찮으신 거죠? 네, 아가씨? 얘, 이거 가주님도 없는데 괜히 사람 잡는 거 아니야? 야, 좀 뭐라도 좀 해봐!”
“왜, 왜 그러세요! 아가씨? 누, 누가 사람 좀 불러와 봐!”
하녀들이 기함하며 그녀를 피했다.
샤를로프는 무릎걸음으로 바닥을 기었다.
“이건 또 뭐냐고.”
샤를로프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영정 사진 속 어머니가 미소 짓고 있다. 액자 앞에는 흰 국화꽃이 여러 송이 있었다. 모든 게 어색하다. 괴리감이 흘렀다.
‘걱정 마. 딸.’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샤를로프는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죽었잖아. 숨이 끊겨서 다 끝났잖아.
그런데, 이 지옥 속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놓았다고?
샤를로프가 울컥하고 분노하려는데,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가서 닿았다.
‘아아.’
결코 화를 낼 수 없었다. 저 모습을 봐두고 무슨 수로 화를 내겠나? 사진 속 어머니가 너무 맑게 웃고 있었다.
“……진짜.”
“뭡니까?”
“돌아왔잖아.”
샤를로프는 뺨을 더듬거리다 거울 앞으로 기어갔다.
낯익은 여인이 거울 속에 비쳤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슬픔에 젖어 있었지만, 적갈색 눈동자가 짙고 또렷했다. 울다 지친 아이 같으면서도, 힘든 현실에서 빠져나온 어른처럼 권태로웠다.
“너희.”
샤를로프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야?”
“아가씨 어디 아픈 거예요?”
“내가 지금 묻잖아. 여기가 어디냐고.”
“아가씨 집이잖아요? 튜터 후작가요.”
“아버지께서는?”
“지금은 밖에 나가고 안 계셔요. 며칠간 못 온다고 아가씨께도 말씀드렸잖아요?”
친부는 친모를 잃은 지 일주일도 안 된 딸을 홀로 놔두고 집을 비웠다.
샤를로프는 고개를 떨구고 뺨을 손아귀로 감쌌다. 보드라운 손끝으로 뺨을 어루만질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나는 지금 기쁜 건가? 슬픈 건가? 지금 이 감정조차도 모르겠다.
아아……. 그래도 싫어. 이 거지 같은 순간으로 다시 왔다고?
샤를로프는 목을 더듬거렸다. 죽음의 기운이 아직도 선연했다.
나를 다시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고?
내 삶은 이미 진창으로 처박혔잖아. 허망함과 후련함이 같이 몰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샤를로프는 눈시울을 붉히며 속삭였다.
“괜찮아.”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모든 게 허망하고. 그 와중에도 비참한 기분이 몰려든다.
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샤를로프는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미닫이문 앞으로 갔다.
바람이 몸을 스쳤다. 닫힌 문틈으로 초록빛이 보인다. 그녀는 문 앞에 주저앉아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눈앞에 초록빛 잔디와 들꽃정원이 펼쳐졌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튜텨가의 화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샤를로프는 끅끅대며 울음을 삼켰다. 영정 사진 속의 어머니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다.
“왜 웃고 있어요?”
뭐가 좋다고 웃고 있어? 우리는 사람답게 죽지도 못했잖아. 이 쓰레기 자식들은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우리만 억울하게 죽었잖아. 엄마는 뭐가 좋다고 웃고 있어요?
“어머니 장례식 치른 지 얼마나 됐어.”
샤를로프는 묻어두었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지금 이 시점이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장례라니요?”
“어머니 장례식 치른 지 얼마나 됐냐고.”
“일주일 됐습니다.”
“어머니 유골은?”
“도대체 그런 건 왜 묻는 거예요?”
샤를로프가 곱슬거리는 적발을 쓸어넘기자, 하녀 하나가 움찔하며 답했다.
“땅에 묻어드렸잖아요.”
“어디에?”
“저기 묘지에…….”
샤를로프는 비틀대며 밖으로 나갔다. 화단을 맨발로 밟고 섰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이 낯설었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응.”
“주치의를 불러다 드릴까요?”
“괜찮아. 괜찮아졌어.”
내 다리로 땅을 짚고 설 수 있다는 게 얼마 만이던가?
이유가 뭘까? 무엇이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나?
분노? 울분? 원망스러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내 기분이 아주 더럽다는 건 알겠다.
샤를로프는 끅끅대며 웃었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꾸역꾸역 삼켰더니, 입안이 뻑뻑했다.
개자식들. 이 집안을 저주한다. 너희 앞길을 저주한다.
‘나가자.’
하필이면 왜 여기인지. 왜 지금 이 시기인지, 그런 건 그녀도 모른다.
무엇이 나를 여기로 돌려보냈을까? 이것도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안다. 이곳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다.
어떤 이유로 돌아왔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는 이곳을 나갈 시간이다.
‘내가 꺼내줄게.’
그럼.
나랑 이제 이 집에서 나가요.
내가 이 쓰레기 속에서 꺼내드릴게요.
* * *
늦은 밤.
샤를로프는 침실에서 나왔다.
‘샤를로프 튜터.’
튜터 후작의 외동딸이었지만, 병약한 친모를 간호하고 본인조차도 몸이 병약해서 가문에서 박대받았다.
그게 샤를로프였다.
가문에서 박대받던 모녀.
모두가 합심해 방치한 덕에, 샤를로프가 밤늦게 혼자서 나와도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여자애 하나 빠져나오는데 어쩜 한 명도 보지 못하는지…….”
샤를로프는 가벼운 옷차림에 숄 하나만 겹쳐 입고 나왔다.
유골함은 묘지 한쪽에 모셔뒀다. 묘지 앞은 텅텅 비어서 고요했다.
그녀는 입술을 더듬거렸다. 이 모든 게 이질적이었다.
“나가자. 어디든 여기보다는 낫겠지.”
샤를로프는 맨손으로 흙을 파냈다. 살갗이 까이고 손톱이 부러졌다.
흙 속에서 유골함을 꺼내자 냉기가 손아귀를 할퀴었다. 그녀는 유골함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아아……. 왜 여기 혼자 묻혀 있어요?”
혼자서 쓸쓸하게 죽게 해서 미안해요.
백옥 유골함은 차가웠다. 샤를로프는 덩그러니 놓인 유골함을 품에 끌어안았다.
엄마는 죽고 없다. 이젠 땅에 묻어드려야 하지만, 적어도 엄마가 묻힐 곳이 여기는 아니다.
‘이만 나가요.’
샤를로프는 어머니 유골함을 챙겼다. 그리고 늦은 밤, 그 집에서 나왔다.
이 감각,
이 서러움.
이 울분까지도.
그 모든 건 반드시 돌려주러 올게. 기다려. 잊지 않을 테니.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샤를로프는 어머니 유골함을 품에 안고 삯 마차를 빌렸다.
“윈저 공작가로 가줘.”
샤를로프는 마부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마차에 등을 기댔다.
외가와는 특별한 접점이 없다. 모종의 이유로 그 연이 끊겼다.
‘그래도 돌아가야죠.’
샤를로프는 유골함을 끌어안았다. 유골함에서 흙내음이 났다. 차가웠다.
온기가 느껴질 리 없지. 다 죽고 없는 사람의 흔적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라도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샤를로프는 소리 없이 흐느꼈다.
* * *
마차가 멈췄다.
샤를로프는 마부에게 값을 치르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가 걱정스럽게 이런 그녀를 살폈다.
“그런데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 아니요?”
샤를로프는 윈저가의 대문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늦으면 기다리면 될 일이야.”
마부가 윈저가를 떠났다. 샤를로프도 긴가민가했다.
전생에도 윈저가와는 그렇다 할 인연이 없었다.
어머니 유골함이 아니었다면, 직접 윈저가를 찾는 일 또한 없었겠지.
‘지금 이 시점에 내 얼굴을 기억하려나.’
샤를로프는 쓰게 웃었다. 잘도 이 꼴로 찾아왔구나. 그녀는 유골함을 끌어안고 대문을 두들겼다.
“계세요!”
그때 웬 마차가 빠르게 다가왔다. 검은 마차에 가문의 인장이 크게 박여 있었다.
윈저가의 마차였다. 마차 창문이 열리고 웬 중년의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냐?”
그녀는 이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 그런데 누군지 몰라도 된다.
그가 가진 붉은 머리칼이 그가 누구 핏줄인지 말해주니까.
“코제트 윈저의 딸, 샤를로프예요.”
그러자, 눈앞의 남자가 표정이 묘해졌다.
“코제트?”
“네. 그분이 제 어머니예요.”
어머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그리고…….
의식이 드문드문 끊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