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5화 첫 번째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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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5화 첫 번째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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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5화 첫 번째 선물
2023.08.26.
‘아까보다 안색이 창백한 것 같은데…….’
이카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을 때였다.
르네브가 시녀들을 대동한 채 이카르가 서 있는 그레이트 홀 입구로 걸어왔다.
‘시녀들의 눈치가 영 나쁜 편은 아닌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이카르가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르네브가 걸음을 멈추고 이마를 짚더니 휘청거렸다.
그 짧은 순간 이카르는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자신과 르네브의 거리는 겨우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게 좋을지, 아니면 시녀들에게 맡기고 갈 길 가는 게 좋을지…….
그러나 그가 계산을 끝마치기도 전 르네브의 몸이 위태롭게 휘청였다.
“칫.”
이카르는 혀를 차며 르네브 쪽으로 몸을 틀었다.
머리를 굴려서 나온 행동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 자신조차 꽤나 놀랐을 만큼.
단숨에 르네브와의 거리를 좁힌 이카르는 순간 그녀를 감싸 안을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손을 내밀어 그녀가 잡을 수 있도록 부축해 주는 것에 그쳤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파라디움의 황후였고, 남편이 있었다.
게다가 이카르에게는 난봉꾼이란 좋지 못한 소문도 따라다녔다.
물론 그건 이카르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르네브가 그와 얽혀 좋은 소문이 양산되기란 어려웠다.
그러니 르네브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위해서.
“아…… 조금 어지러웠는데. 감사합니다.”
옅게 한숨을 내쉰 르네브가 이내 고개를 들어 이카르와 시선을 맞췄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낯을 하고도 자그마한 얼굴에 드리운 그림 같은 미소는 여전했다.
순간 이카르는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 위태로워 보이는 여자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하지만 그건 르네브가 원하지 않는 한 이카르의 몫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르네브에게 그때 네가 구해 준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바슈케르의 남자들은 상대에게 짝이 있다는 이유만으론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매해 한 여자를 두고 전투를 치르다 장렬히 전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 상황은 여자 쪽에서 동의했을 때만.
“황궁의에게 진료를 받아보는 게 좋은 듯하군요.”
“친절하시네요. 그렇지 않아도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황궁의를 부르려던 참이었어요.”
르네브가 붙잡은 이카르의 손을 놓으려던 찰나였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르네브는 물론이고, 그녀 곁에 있던 시녀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유는 알 만했다.
평소 이카르의 태도로 보았을 때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과 행동이었기 때문일 터다.
하지만 이카르는 아프지 않게 르네브의 손을 그러쥔 채로 걸음을 내디뎠다.
약간은 곤란한 표정으로 르네브가 그레이트 홀을 힐끔거렸다.
아마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생긋 웃어 보이며 이카르와 발을 맞춰 걸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잠깐 신세를 지도록 할까요?”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이카르가 묻자 뒤에서 따라오던 시녀가 대답했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초대된 귀빈들이 쉴 수 있게 마련해 둔 응접실이 나올 거예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소녀티를 완전히 벗지 못해 약간 앳되어 보이는 시녀가 앞장서 걸으며 안내를 도왔다.
“마침 폐하께서 도움을 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이번에는 르네브 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시녀가 끼어들었다.
이카르는 그녀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살짝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다행히 아까보다는 어지럼증이 나아진 듯 르네브도 그를 잘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을 따라 시녀들의 걸음이 빨라진 건 덤이었다.
시녀들은 마치 호위하듯 이카르와 르네브 주위를 에워싼 채 응접실로 향하는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연신 이카르의 얼굴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한 마디라도 더 말을 붙여 보고 싶은지 한 시녀는 입술을 계속 달싹였고, 다른 시녀는 질문거리를 찾는 듯 바쁘게 눈을 굴렸다.
이카르는 그런 그녀들의 반응을 싹 무시하고 르네브를 힐끔 내려다봤다.
“식사는 제때 잘하고 계십니까?”
“…….”
그가 한 질문이 너무 느닷없이 느껴진 걸까.
조금 당황하는가 싶던 르네브가 이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야말로 오늘 준비한 음식들은 입에 맞으셨나요?”
이카르는 무감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르네브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실은 만족하셨을 거라고 예상은 했답니다.”
“……?”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의 표정을 힐끔 바라본 르네브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폐하께 대접한 음식 말이에요.”
이카르는 르네브에 호응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만든 수석 요리장의 음식을 제가 매일, 배불리 먹고 있으니까요.”
“아…….”
꾹 다물려 있던 이카르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조금 전 그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인 셈이었다.
짧은 정적을 깨고 이카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밤에 잠은 잘 주무시고 계십니까?”
“……네?”
줄곧 정면을 응시하던 르네브가 그제야 이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농담이었습니다.”
르네브의 보랏빛 동공이 커졌다.
그 모습이 어린 소동물 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이카르는 자신이 왜 이런 실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로 말을 이었다.
“황후께서 농담을 좋아하시는 듯하여…….”
이카르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응접실에 도착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도 무척 즐거웠어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르네브가 이카르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에스코트는 되었으니 이만 가 보라는 축객령이었다.
이카르는 순간 갈등했다.
못 알아들은 척 그녀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갈지, 신사답게 숙녀가 원하는 뜻을 받아들일지.
그러나 그런 고민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다급하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드한 때문에.
“폐하! 여기 계셨군요. 갑자기 사라지셔서 한참 찾았습니다……. 폐하?”
드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고, 이카르는 옅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럼.”
이카르는 반강제로 붙잡고 있던 르네브의 자그마한 손을 놓았다.
그리고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려 그녀와 멀어졌다.
***
바슈케르로 돌아가는 마차 안.
드한과 베인은 건국제에서 대면했던 타국의 황족과 귀족들에게 전해 들은 중요한 정보들을 이카르에게 보고했다.
“라이나와 베니스탄은 우리 바슈케르에 긍정적 태도를 취할 것으로 보입니다.”
“솔티 왕의 분위기는 어땠지?”
“아직 확실하게 입장을 결정지은 건 아닌 듯합니다만, 파라디움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되면 곧장 돌아설 분위기이긴 합니다.”
이카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베인을 쳐다봤다.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파라디움 황궁으로 침입 경로를 찾아보기는 했는데…….”
보고를 받고 의견을 나누기를 한참.
어느새 인적이 드문 광활한 대지에 도착했다.
정찰병들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 뒤에 국경 지역까지는 공간 이동으로 움직였다.
완전히 파라디움령에서 벗어나자 드한이 물었다.
“그런데 폐하, 파라디움의 황후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별것 아니었어.”
이카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태연히 대답했다.
사실 정말 별것 아니었다.
그저 어지럼증에 휘청이는 레이디를 부축해 응접실로 데려다준 것뿐이었으니.
신사라면 응당 해야 할 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의 이름이 거론되자 그의 머릿속은 황궁에서 보았던 르네브의 모습을 되새김하기에 바빴다.
“…….”
이내 이카르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왜…… 그러십니까?”
급격히 나빠진 이카르의 기분을 알아챈 드한이 눈치를 살폈다.
파라디움의 황제가 정부와 함께 떠난 후 건국제에 참석한 손님들 틈에 혼자 남겨진 르네브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기분이 언짢아진 탓이었다.
‘왜지?’
잠시 그 이유를 곱씹던 이카르는 곧 답을 찾아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반려의 외도만큼 온 대륙인 공통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음…….’
상당히 그럴싸한 추론에 이카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 보통의 평범한 도덕관념을 가진 이라면 그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일이 맞았다.
비단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 하더라도.
“황후의 임신 사실이 공표되거든 선물을 하나 준비해 줘.”
“아…….”
드한은 서류로 내렸던 고개를 퍼뜩 들고는 눈을 번쩍 떴다.
폐하께서 굳이 수고스럽게 파라디움의 황후를, 그것도 시녀들 여럿을 뒤에 줄줄 달고 응접실까지 에스코트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황후의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어!’
드한은 ‘역시, 폐하셔.’ 하는 눈빛으로 이카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황후의 임신 선물로 어떤 걸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
이카르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마차가 바슈케르 황궁과 인접한 거리의 상점가 중심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여러 가게 중에서도 유독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관에 이카르의 시선이 머물렀다.
“폐하, 저쪽으로 마차를 돌릴까요?”
베인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이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같이 맑고 깨끗한 눈망울을 가진 르네브의 아이를 상상하며 이카르는 안달루사이트로 세공된 작은 장식품을 집어 들었다.
***
“우음……”
카엘의 잠투정에 이카르는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깨어나 잠기운이 내려앉은 눈을 비비던 카엘이 제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두 장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
“일어나셨습니까? 그럼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 볼까요?”
드한이 활기차게 말했고, 카엘은 눈을 껌뻑거리며 침대에서 엉금엉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아까 사냥 가서 잡아 온 고기라는 게 저건 아니겠지?”
카엘이 침대 헤드 쪽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운 작은 짐승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러자 말귀를 알아들을 리도 없건만, 작은 짐승의 몸이 흠칫 굳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드한의 말에 침실을 나서던 이카르가 동의했다.
“저렇게 조그만 건 구워 봤자 먹을 것도 없을 거다.”
“흐응…….”
카엘의 잇새로 안도감 섞인 기분 좋은 비음이 흘렀다.
흐뭇하게 작은 짐승을 바라보던 카엘은 이내 앞장선 이카르의 뒤를 따라 침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