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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3화 사냥해 온 것 (146/148)


#특별 외전 3화 사냥해 온 것
2023.08.24.


카엘은 커다란 창틀에 턱을 괸 채 푸르른 산맥을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었다.

아이용 작은 의자 아래로 짤막한 다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높다란 산맥 끝에 걸쳐진 구름의 모양을 신기해하고 있는데, 상쾌한 산들바람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카엘이 바슈케르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달콤한 핫초코에 상큼한 디저트를 곁들여 먹으며 한가로이 오후 시간을 보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파라디움 황궁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황제인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면 어릴 때부터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카엘의 나라 파라디움은 바슈케르 제국군에 의해 무너졌으니까.

이때의 카엘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파라디움 제국은 바슈케르에 의해 패망했다고.

하지만 실상 그에 따라 권력 구조만 조금 바뀌었을 뿐 파라디움 제국은 건재했다.

물론 그걸 알게 되는 건 먼 훗날의 일이었지만.

“이 책들은 다 읽으신 겁니까?”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엘은 슬쩍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그렇다.”

카엘의 대답에 드한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카엘이 완전히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드한과 베인이 돌아가며 카엘이 지내는 귀빈실에 찾아와 책을 전해 주고는 했으니까.

“새로운 책은 없는 건가?”

카엘은 드한의 빈손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이따가 읽을 만한 새 책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보다…….”

그렇게 말하며 드한이 뒤를 돌아봤다. 자연히 카엘의 고개도 드한을 따라 움직였다.

소매와 깃 부분에만 금수를 놓은 검푸른 제복을 입은 이카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카엘은 냉큼 의자에서 내려와 이카르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드한과 달리 이카르를 보는 건 아주 많이 오랜만이었다.

파라디움과의 전쟁으로 황궁을 비워 둔 터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많아 그가 바쁘다는 이야기는 드한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

굽혔던 허리를 펴는 카엘의 시선이 이카르의 허리춤에 걸린 장검으로 향했다.

황궁 안에선 좀처럼 검을 차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철통 보안에 외부인들은 철저한 신분 확인을 통해서만 황궁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카엘은 조금 의아한 눈으로 장검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린 채로 이카르가 말했다.

“무료해 보이는군.”

매일매일 쉴 틈 없이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것보다 지금이 더 좋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너무 철없이 보일 것 같았다.

카엘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드한이 끼어들었다.

“무료하진 않으실 겁니다. 저와 베인이 가져다 드리는 책만 읽으시더라도 하루가 금방 지나갈 테니까요.”

“그런가?”

“네, 네…….”

이카르가 되물었고, 카엘은 다 읽은 책들을 힐끗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심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이카르는 무심하게 용건을 꺼냈다.

“사냥하러 갈까 하는데, 흥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순간 카엘의 작은 어깨가 흠칫 굳었다. 표정엔 낭패감이 스쳤다.

이전에 드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드한과 베인은 격일로 카엘이 지내는 귀빈실을 찾아왔다.

둘 다 몹시 바빴기에, 잠깐 짬을 내서 카엘이 잘 있는지 들여다보고 돌아가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대화를 조금 나눌 수 있었다.

카엘은 책을 읽다가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고, 드한은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베인은 대체로 드한에게 물어보라 했다…….

아무튼, 그때 베인에게서 이카르와 두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실로 충격적이었다.

바슈케르의 선 황제는 태어난 순서나 성별과 관계없이 자식들을 황궁에서 내쫓았다.

그것도 10세가 되기 이전의 꼬마들을!

황궁에서 쫓겨난 황자와 황녀에게 다른 귀족 가문의 차남, 차녀 등을 딸려 보내기는 했으나, 그들도 피차 어렸다.

뭐 황제의 명을 받아 멀리서 지켜보는 어른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황제에게 상황을 전달할 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 가장 큰 문제는, 바슈케르의 황자와 황녀들이 황궁 밖으로 쫓겨난 때와 비슷한 카엘의 나이였다.

베인의 이야기를 대입해 보자면 카엘은 언제 산속으로 던져지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왜 그렇게 겁을 먹었지?”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러자 원체 냉담한 그의 인상이 더욱 서늘하게 변했다.

카엘은 조금 더 겁을 집어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옆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드한이 이카르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폐하, 잠시 귀 좀…….”

드한이 뭐라고 했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

카엘의 불안감이 더욱 증폭되었을 즈음 이카르가 조금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고? 최근엔 무엇을 읽었지?”

이카르의 그 어색한 표정이 더욱더 카엘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하지만 카엘은 최대한 겁을 먹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바슈케르의 여,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대답을 마친 카엘의 귀여운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너무 긴장했나 봐. 말을 더듬는 실수를 하다니…….’

자주 말을 더듬는 편은 아니었지만, 카엘은 이상하게도 파라디움의 황제, 그러니까 제 아버지 루시우스의 앞에만 서면 간혹 말을 더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럴 때마다 카엘은 호되게 야단을 맞거나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도 말을 곧잘 하는 이복동생과 비교도 당했다.

물론 정부 에시카의 아들은 고작 엄마, 아빠 정도만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카엘의 기분이 한층 더 침울해지려 했다.

그때 이카르의 커다란 손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카엘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때리려는 건가?’

카엘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폐하께서는 맨손으로 곰도 상대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물론 멋지게 이기셨습니다. 새끼 곰이긴 했지만…….’

하필 과거 베인의 발언이 떠오른 건 카엘의 의지가 아니었다…….

“장하군.”

“……?”

둔탁한 통증 대신 다소 거칠지만, 카엘의 머리통을 쓰다듬는 손길이 이어졌다.

카엘은 슬쩍 시선을 들어 이카르를 올려다봤다.

눈매를 살짝 접어 웃는 그의 미소가 꽤 멋있었다.

카엘은 잠시 그 미소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곧 머리를 쓰다듬던 이카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따라오너라.”

그 말을 하곤 이카르가 앞장섰다.

‘……날 산에 버리러 가려는 건 아니겠지?’

카엘은 의심의 눈초리로 이카르의 넓은 등을 바라봤다.

“가시죠.”

드한의 말에 카엘은 내심 불안에 떨며 이카르의 뒤를 졸졸 따라나섰다.

***

다행히 의심은 기우에 그쳤다.

이카르를 따라 황궁 밖으로 나갔던 카엘은 그날 저녁 무사히 황궁 귀빈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황궁을 나설 때는 비어 있었던 카엘의 품에는 작은 털이 북슬북슬한 짐승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고롱고롱 잠든 짐승을 한참 내려다보던 카엘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등허리를 살살 어루만져 보았다.

“……!”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기는 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서 비명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새끼 짐승의 작은 몸은 쓰다듬었다.

깊이 잠들었는지 카엘의 손길에도 새끼 짐승은 미동도 없었다.

카엘의 눈이 둥글게 휘어진 것을 보곤 드한이 물었다.

“그 녀석이 마음에 드십니까?”

카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쉬이.”

그러자 드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발소리를 죽이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카엘은 복슬복슬한 짐승의 털을 쓰다듬으며 드한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조금 뒤 드한이 양피지를 가져와 카엘에게 보여 주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오늘 사냥해 온 것을 요리장에게 맡기실 모양이던데요.」

‘오늘 사냥해 온 것?’

카엘은 아까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을 돌이켜 봤다.

사냥을 하러 간 그들 무리는 이카르를 따라 산속 깊은 곳까지 접어들었었다.

끼잉끼잉.

짐승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이카르와 드한, 베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카엘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으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마치 단단한 이빨 같은 것이 뼈를 으깨는 것만 같아…….’

괜스레 소름이 끼치는 소리에 카엘이 어깨를 움츠렸을 때였다.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든 이카르가 전광석화처럼 달려 나갔고, 베인이 그의 뒤를 따랐다.

“……?”

“여기 잠깐만 계십시오.”

그렇게 말하곤 드한도 곧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그러기를 얼마일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드한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엘 님, 이쪽으로 와 보시겠습니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한 카엘의 눈이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이카르의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마물들의 시체 몇 구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그것이 무엇이지?”

카엘의 물음에 드한이 대답했다.

“마물입니다. 최근 이 근처에서 습격을 당한 제국민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드한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카엘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면, 근처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이쪽을 노려보며 털을 바짝 세운 작은 짐승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짐승에게 손을 내뻗은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카엘 님. 위험합니다!”

드한이 경고하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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