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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1화 구원의 희망 (144/148)


#특별 외전 1화 구원의 희망
2023.08.22.


르네브와 패트릭이 처형당하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바슈케르 군이 광장을 점령한 후. 이카르는 홀로 남은 카엘을 파라디움 황궁에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카엘, 네 생각을 말해 봐. 너희 어머니를 죽인 저들을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지.”

바슈케르의 황제 이카르가 물었다. 카엘의 말 한마디면 뭐든 들어줄 것처럼 듬직한 목소리로.

카엘은 바슈케르의 군인들에게 끌려 나와 한데 모아진 그레이트 홀 안의 사람들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봤다.

언제나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파라디움 황제의 머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옷차림은 평소보다 가벼웠다.

그것으로 파라디움의 황제가 조금 전까지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카엘은 자그마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자 제 어머니인 황후가 모두의 앞에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며 처절하게 죽어 가고 있을 때.

적들로부터 파라디움의 서부를 굳건히 지켜 온 서부의 수호자 세이렌 후작이 퍼부어지는 비난 속에 목이 떨어졌을 때.

아직 국제 정세나 정치를 모르는 카엘도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파라디움의 황제에게는 황후도, 세이렌 후작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치욕스럽게 죽어 가는 순간에도 파라디움의 황제는 안전한 황궁에서 정부와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카엘은 미색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고 배웠다.

정무는 내팽개치고 정부에 푹 빠진 어리석은 황제와 왕들의 나라가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지는 숱한 역사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이는 비단 역사 속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늘 카엘은 황후와 세이렌 후작의 처형식에 모인 성난 군중들에게서 내뿜어지는 분노를 절실히 느꼈다.

황제가 흉작과 가뭄 같은 천재지변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비는 해야 했다.

제국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광장에 모인 군중들의 얼굴엔 화가 가득했다. 그리고 굶주려 있었다.

그들에게는 비난할 대상이 필요했고, 황제는 그들에게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후와 세이렌 후작을 먹잇감으로 던져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

카엘은 황제 루시우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황제의 정부 옆에 있는 이복형제를 바라봤다.

카엘의 시선을 읽은 황제의 정부 에시카가 냉큼 자기 아들을 감싸며 죽일 듯 매서운 눈으로 카엘을 노려봤다.

제 아들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가 다분한 눈빛이었다.

황제의 정부와 그가 감싼 아들의 모습에서 카엘은 오늘 낮의 일을 떠올렸다.

따사로운 오후 햇살 아래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과 갑작스레 들이닥친 무장 기사들 앞에서도 의연하고 꼿꼿하던 모습.

어머니의 등은 가녀렸지만, 거대했다.

“…….”

물론 황후 르네브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가끔은 아들을 따끔하게 혼내기도 하고, 엄격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카엘을 바라보았다.

세이렌 후작은 어떠했나.

그 또한 하나뿐인 조카 카엘을 귀하고 어여삐 여겼다.

자신만 두고 먼저 떠나 버린 이들의 마지막을 떠올리자, 카엘의 눈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저들이 행한 모든 일을 낱낱이 밝히고, 모두의 앞에서 그에 맞는 처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카엘의 발언에 이카르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온실의 화초처럼 예쁨만 받고 자라 무를 줄 알았는데…….’

카엘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이카르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

꺾어져라 고개를 쳐들고 이카르를 올려다보는 카엘의 얼굴이 맑았다.

“제법이군.”

이카르가 조용히 읊조리자, 카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건, 칭찬인가요?”

카엘의 물음에 이카르가 대답을 내놓으려는 순간 기가 찬다는 듯 루시우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말이 되나?”

자연스럽게 이카르와 카엘의 고개가 루시우스에게로 향했다.

“적국과 내통했다는, 황후와 외척 세력을 없애기 위해 내가 억지로 꾸며 낸 이야기가 현실이 되다니.”

넋이 나간 채로 루시우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스스로 내막을 실토했군.”

이카르가 우습다는 듯이 말을 내뱉자, 루시우스가 고개를 들고 그를 노려봤다.

이카르는 바닥에 꿇어앉은 루시우스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황후의 폐위 이유가 적국과의 내통이라 했던가?”

적국의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 그레이트 홀 안의 긴장감과 공포감이 한층 높아졌다.

겁을 먹은 에시카는 제 아들을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고, 루시우스를 따르는 귀족들 또한 몸을 웅크린 채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카르는 더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루시우스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세이렌 후작의 파면 또한 적국과의 내통에 가담했다는 이유였고…….”

루시우스의 푸른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대제국 파라디움의 황제였다. 그런 그를 저토록 하찮다는 듯 내려다보며 능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시우스는 모멸감에 치를 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너……!”

하지만 이카르가 그의 어깨를 꾹 눌러 제압했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굽혀 루시우스와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대답해 봐. 파라디움의 황제. 내 말이 틀렸나?”

비록 적군의 손에 붙잡혔다고는 하나 루시우스는 황제였다.

그런 그에게 일말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 태도에 악다문 루시우스의 잇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

적국 황제의 얼굴에서 비켜 나간 루시우스의 시야에 구원의 희망이 보였다.

이카르의 허리춤에 걸린 장검.

묶인 탓에 몸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방심하거든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닌 모양인데.”

루시우스는 이카르의 얼굴 쪽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황후가 적국 수장과 내통했다는 사실 말이야. 그렇지 않나? 네놈들은 일사불란하게 광장을 점거한 것에 그치지 않고, 파라디움 황실 정예 기사들까지 단번에 제압했지.”

“…….”

이카르는 할 말이 있거든 어디 더 떠들어 보라는 듯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정도 도발에는 쉽게 응하지 않을 듯했다.

루시우스는 비열하게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적국 황제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내 황후와 잠자리라도 가졌나? 네놈 침실에서의 르네브는 어땠지?”

분명 작은 목소리였지만, 긴장감이 고조된 그레이트 홀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고, 주변의 귀족들은 똑똑히 루시우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세 치 혀를 잘도 놀리는군.”

이카르가 끓어오르는 눈빛으로 씹어뱉듯 말했다.

“무엇을 손에 넣고 싶어서였을까……. 대체 뭐 때문에 흙발로 무구한 파라디움인들을 짓밟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황궁까지 침범했느냐는 말이다!”

울분에 찬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완전히 냉정을 잃은 그가 고함을 내지를 때였다.

“그만!”

카엘이 빽 소리쳤다.

본인의 무능함에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놓인 것도 모르고, 흥분해 날뛰는 한 나라의 황제인 아버지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루시우스의 시선이 잠시 카엘에게 머물렀다.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 루시우스를 닮은 푸른 눈동자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딱딱하게 경직된 작은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퍽 애처롭게 보였다.

“아아……. 그렇군.”

카엘과 이카르를 번갈아 쳐다보던 루시우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카르의 방심을 이끌어 낸다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그는 도리어 그 자신이 흥분한 상태였다.

이카르는 가늘어진 눈을 하곤 루시우스를 응시했다.

“파라디움의 황자, 아니지. 바슈케르의 황자겠군.”

“……?”

“카엘이 자네의 아이였나? 황후와 내통하고…….”

그 순간 이카르의 손이 허리에 찬 검 손잡이로 향했다.

“……!”

이카르의 다음 행동을 직감한 드한이 몸을 날려 카엘의 앞을 막아섰다.

아이가 코앞에서 죽어 나가는 생부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도록.

드한은 카엘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카엘 황자. 신호를 드리기 전까지 절대 눈을 뜨지 마십시오.”

“……?”

카엘이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상황 설명 없이 드한은 카엘의 귀를 막았다.

스릉.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더니.

퉁.

이어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꺄아아아아!”

피를 흠뻑 뒤집어쓴 에시카가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러 댔다.

혼비백산한 귀족들이 무릎걸음으로 루시우스에게서 물러났지만, 몇 걸음 떼지 못했다.

그들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바슈케르 최정예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든 것이다.

파라디움 황제 루시우스의 숙청이 신호라도 된 듯이.

언제나 웃음이 가득했던 그레이트 홀 안은 산지옥으로 변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금방 상황이 정리되었다.

귀를 막고, 눈을 꾹 감은 채 불안에 떨던 카엘의 머리를 큼지막한 손이 덮었다.

카엘은 그제야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뺨에 튄 붉은 피를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으며 이카르가 말했다.

“카엘 황자. 이제 네가 파라디움의 황제다.”

“…….”

“파라디움에 하나 남은 황족이니.”

***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글쎄요. 제게 물으셔도…….”

카엘의 물음에, 드한이 옅게 웃으며 이카르를 쳐다봤다. 그러자 이카르가 무감한 표정으로 고저 없이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바슈케르에 데려가 주지.”

순간 베인과 드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예?”

“폐하? 카엘 황자는 파라디움의 마지막 남은 황족입니다.”

“알아.”

“……차기 황제 자리를 두고 파라디움 내에 자잘한 분쟁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이는 바슈케르에도 영향을 미칠 테고요.”

드한이 부디 뜻을 재고해 달라며 말했고, 베인도 곁에서 작게 속삭였다.

“카엘 황자를 인질 삼아 파라디움을 통제하시려는 계획이신 겁니까?”

그런 두 사람을 싹 무시하고 이카르가 다시 카엘에게 물었다.

“선택은 네게 맡기겠다. 여기 남을 건지 나와 같이 바슈케르에 갈 건지.”

“……거기 가면 뭐가 있습니까?”

“직접 가서 두 눈으로 보면 알겠지.”

카엘은 고민을 시작했다.

이카르의 말대로 이제 자신은 파라디움의 마지막 남은 황족이었다.

어째서 적국의 황제인 이카르가 자신만 살려 두었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해칠 것 같지는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만 해도 어머니와 삼촌의 목이 달아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후에 적국의 황제가 어머니의 복수를 해 줄 거라고는 더더욱.

카엘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한과 베인이 불안한 눈으로 카엘을 바라봤지만, 이카르는 그저 입매를 살짝 당겨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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