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다산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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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다산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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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다산의 상징
2023.08.21.
톡톡.
한참 오전 업무를 보는 중에 황제의 집무실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
창문 너머에서 전령 새가 유리창을 쪼아 대고 있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드한이 전령 새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풀고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카르가 물었다.
“계획한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큰 저항은 없었나 보네. 폐황자가 나름 검을 잘 다룬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난 베인이 어깨를 돌리며 묻자, 드한이 상황을 설명했다.
“최측근이었던 기사가 자신을 배신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의심 많은 폐황자가 깜빡 속아 넘어간 걸 보면.”
알 만하다는 듯 베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사들은 서임 때 평생 한 명의 주군만을 모실 것을 맹세한다.
하지만 폐황자의 최측근이었던 알렌이란 기사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금화 한 닢에 제 주군을 팔아넘겼다.
이로써 폐황자에게 희망을 주었다가 절망을 안겨 주는 이카르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가짜 왕녀 쪽은 어떻게 됐지?”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이카르가 물었다.
드한이 올라온 보고 그대로 말을 옮겼다.
“그 구역에서 으레 사용하는 색상의 두건을 선물하는 것으로 상황 종료되었다고 합니다.”
이카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에 사인을 이어 나갔다.
똑똑.
그때 집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베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폐하.”
복도로 나갔던 베인이 곧 집무실로 돌아왔다.
“폐하, 암컷 토끼가 도착했습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베인의 손에 달랑달랑 매달린 생명체는 시선을 확 잡아끌 만큼 크고, 복슬복슬한 토끼였으니까.
“회색이 아니군.”
이카르가 토끼를 바라보며 말했고, 드한이 동의했다.
“그렇군요. 회색이 아니네요.”
“……회색이어야 했던 겁니까?”
베인이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이카르는 베인의 손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흰색 토끼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토끼의 동공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초식 동물답게 잔뜩 긴장한 채로 몸을 경직시켰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뭉툭한 꼬리가 다리 사이로 바짝 말려들어 간 것을 보면. 이카르는 토끼의 긴 뒷다리 사이 언저리를 응시하며 물었다.
“암컷이 틀림없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이카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복도에 난 커다란 창 너머를 향해 고갯짓했다.
“바로 그 수컷 토끼와 합사를 시도해도 괜찮겠습니까?”
드한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이카르는 그저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 올릴 뿐이었다.
“그럼. 서둘러.”
***
르네브는 잠시 휴식을 가질 요량으로 황궁 정원 중앙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셨다.
답답한 집무실에만 갇혀 있지 말고 태양의 은총을 누려 보자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제안 때문이었다.
르네브는 기꺼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집무실 안에서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누운 토끼가 가엽기도 하고,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말대로 햇볕을 쬐고 싶었다.
르네브가 보드라운 회색 토끼의 털을 쓰다듬으며 서류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응?’
서류 위에서 무언가가 살짝 움직였다.
르네브는 살짝 시선을 들었다. 이내 그녀의 시선 끝에 커다랗고 긴 귀가 들어왔다.
‘토끼 귀가 왜 갑자기…… 흰색이 되어 버린 거지?’
르네브는 의아한 얼굴로 곧장 토끼를 내려다봤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기는 토끼의 털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그럼 조금 전엔 뭐였지?’
르네브가 여전히 회색인 토끼의 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데 다시 한번 시야 끝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쓱 지나갔다.
“……?”
르네브는 곧장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와…….”
흰 눈처럼 뽀얀 흰 토끼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르네브의 입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황후 폐하, 왜 그러세…… 어머나!”
르네브의 반응에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낸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입에서도 덩달아 감탄이 나왔다.
“흰 토끼네요. 대체 이 토끼가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나른하게 반쯤 눈을 감고 있는 회색 토끼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게요. 갑자기 어디서 토끼가 나타난 걸까요.”
르네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궁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흰 토끼가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제가 뒤쫓아 가 보겠습니다.”
곁을 지키고 있던 황실 기사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 둔 채로.
르네브는 조금 불안해졌다. 혹여나 그가 흰 토끼를 해치지는 않을지.
“아니에요. 제가 한번 따라가 볼게요.”
르네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흰 토끼의 뒤를 쫓으려 몸을 돌렸다. 그러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무리라 판단되면 도움을 청할게요. 산책도 할 겸 잠시 다녀올 테니, 이 아이를 부탁해요.”
“아, 알겠습니다.”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너른 테이블 위에 늘어진 회색 토끼를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벤더펠트 공작 부인에게 제 몸 한 번 쓰다듬을 권리를 주지 않은 회색 토끼였다.
조금 걱정되었지만, 르네브는 서둘러 흰 토끼를 따라갔다.
“하아, 하아…….”
숨이 조금 가빠졌을 즈음이었다.
르네브는 커다란 분수 앞에서 흰 토끼에게 당근을 주고 있는 이카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 어째서 여기에 계세요?”
이카르가 흰 토끼 앞에 당근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신기하군.”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카르에게 다가갔다.
“신기하다니요?”
“우연히 당근을 들고, 마침 이 앞을 지나는데 이 흰 암컷 토끼가 내게 달려오더군.”
“…….”
르네브는 이카르의 잘생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무어라 말을 꺼내길 망설였다.
‘일부러 이러나?’
제국의 황제께서 우연히 당근을 들고, 분수대 앞을 지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조금 전은 이카르의 우스갯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르네브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이카르가 뺨을 살짝 붉히며 근처에 선 기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황실 기사가 곧장 흰 토끼를 안아 올렸다.
사람의 손을 탄 적이 있던 모양인지 흰 토끼는 큰 저항 않고, 기사의 품에 안착했다.
“수컷에게 짝을 만들어 주는 게 좋을 듯해서.”
“아…….”
그제야 이카르의 뜻을 알아들은 르네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나저나 토끼의 번식력은 엄청나다고 하던데, 괜찮으려나?’
다산의 상징으로 여길 만큼 토끼의 임신과 출산은 빠른 편이었다.
물론 교미까지도.
아주 잠깐 르네브의 머릿속에는 황궁 정원 안 가득히 뛰노는 회색과 흰색의 아기 토끼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
그날 밤 이카르는 승리의 미소를 머금고 황후의 침실로 향했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하게 굴던 수컷 토끼가 암컷 토끼에게 푹 빠져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르네브의 곁에서 수컷 토끼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르네브가 조금 서운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서 이카르는 르네브가 느낄 허전함을 충분히 달래 줄 생각이었다.
황후의 침실로 들어가자 침대에 엎드려 서류를 보던 르네브가 이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와요.”
당연하게도 침대 위에는 그녀 혼자였다. 자연히 이카르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퇴근 후에 서류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침대 가로 다가간 이카르는 르네브가 들고 있는 서류를 조심스럽게 빼앗아 협탁 위에 올려 두고는 말을 이었다.
“……부인으로의 의무가 선행되어야겠지.”
이카르는 입고 있던 얇은 실크 가운을 벗어 의자 위에 걸쳐 두고는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로 천천히 걸어왔다.
은은한 불빛에 음영 진 잘생긴 얼굴과 그 아래로 드러난 두꺼운 목과 대비되는 넓은 어깨.
군살 없이 늘씬하면서도 단단한 근육으로 꽉 짜인 복근.
그 아래로 도드라지는 치골근.
“…….”
처음도 아닌데 이카르의 조각상같이 잘 빚어진 몸을 볼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기대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르네브에게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의 만족감을 가져다주었으니까.
특히나 최근엔 회색 토끼 때문에 며칠 그와 함께 밤을 보내지 못해서 그런지, 더더욱 긴장되었다.
르네브는 침을 꼴깍 삼키며 제게로 걸어오는 이카르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끌어 올린 이카르가 르네브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힌 이카르가 낮게 읊조렸다.
“곧 잡아먹힐 초식 동물같이 떠는군. 귀엽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달뜬 눈빛을 하고서도 뺨에 닿는 그의 입술은 자상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이내 이카르의 입술이 거칠게 르네브의 입술을 덮쳐왔다. 그간 수컷 토끼의 방해로 받지 못한 것들을 톡톡히 받아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렇게 이카르는 날이 새도록 르네브를 몰아붙였다.
여느 때보다 열정적인 그 때문에 르네브는 아침 해가 떠오를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조금 붙일 수 있었다.
***
“좋은 아침.”
만족을 모르고 르네브를 탐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한껏 머금은 이카르가 그녀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큰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 아래 잘생긴 그의 미소가 눈부셨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카르.”
르네브는 화답하듯 그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그러자 이카르가 곤란한 듯 미간을 모았다.
“왜 그래요?”
“그대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곤란해.”
이카르가 한숨처럼 말하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이카르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의 너른 등을 바라보던 르네브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자자, 이카르가 씻는 동안만…….’
이카르의 절륜함에 지쳐 잠깐 잠든 사이 르네브는 조금 특별한 꿈을 꾸었다.
바로 커다란 검은색 토끼가 품으로 파고드는 꿈.
분명 겉모습은 토실토실하고 보드라운 털을 가진 귀여운 토끼였을 뿐이었다.
이전 생에도, 이번 생에도 검은 토끼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르네브는 그 토끼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익숙하고도 몹시 그리운 느낌이 든달까…….
잠시 눈을 뜨고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찾고자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의 기억을 더듬던 르네브는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생생한 그 꿈이 새 생명의 잉태를 암시한다는 건 이후로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