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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화 희망 뒤에 찾아온 절망 (142/148)


#외전 6화 희망 뒤에 찾아온 절망
2023.08.20.


집 밖으로 나가자 정말로 알렌이 루시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루시우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렌이 한쪽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는 늘 듣던 인사였음에도 낯설었다.

“…….”

루시우스가 이렇다 할 대답을 대놓지 못하고 서 있자, 알렌이 말을 이었다.

“그간 강녕하셨…… 냐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군요.”

“……오랜만이군.”

루시우스는 어렵게 한마디를 꺼냈다.

날이 어두웠지만, 홀쭉하니 움푹 팬 뺨을 보아 알렌 또한 그간 고생이 많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 나누세요.”

그때 에시카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알렌이 물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잠시 망설이던 루시우스는 이내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부 사정은 집의 외관만으로도 대충 알 만했으니, 알렌에게 제 처지를 숨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루시우스와 알렌은 좁은 거실에 자리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름대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려는 건지 부엌으로 향한 에시카가 뽀스락뽀스락 무언가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찾아뵙지 못해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루시우스는 알렌에게서 과거 그의 휘하였다 와해된 기사단의 상황과 파라디움의 전반적인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선황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황후 소생의 1황자가 황위에 오른 뒤 파라디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황비 측 부패 세력을 척결하고, 평민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세수를 줄이도록 정책을 바꾼 것이다.

이는 파라디움과 바슈케르의 사이가 이전과는 달라진 데서 오는 영향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에 반하는 귀족들이 적지 않습니다.”

바슈케르와의 전쟁 부담이 줄어든 지금, 평민과는 달리 귀족만 높은 세율을 계속 유지하는 건 부당하다는 의견에서였다.

귀족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겠지.”

“현 황제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황자 전하께서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거라 내다보고 있습니다.”

루시우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젠가는 반격의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 왔다. 예상보다 그 시기가 많이 늦어졌지만.

“그 때문인가? 나를 찾아온 것은?”

“그렇습니다.”

“좋아. 그들을 직접 만나 보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그들과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렌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자리를 뜨려던 알렌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황자 전하, 일이 완전히 성사되기 전까지는 가능한 비밀에 부쳐 주시길 바랍니다.”

루시우스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일을 알릴 만큼 가까운 사람도 없었지만.

“그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얼마 뒤 루시우스는 알렌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좋은 옷을 입고서.

그러나 루시우스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한참이 지나도록 알렌은 나타나질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초초하게 알렌을 기다리던 루시우스는 불현듯 든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만약 이게 함정이었다면?’

가령 알렌과 다른 귀족들의 계획이 황제에게 발각되었다든지…….

황비와 달리 루시우스에게는 역모의 정황이 발견되지 않아 폐위에 그쳤다.

그 부분에 관해 루시우스도 얼마간은 의문을 품었었다.

역모가 발각되었을 시 그와 관련된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하지만 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폐위시키고 황궁에서 내쫓았지.

그리고 루시우스에게 그런 처분을 내렸던 황제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이런, 내가 어리석었어.’

입술을 잘근 씹은 루시우스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상정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 버렸기 때문이다.

황제가 된 1황자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을 루시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맞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황제의 남은 핏줄을 제거하기 위한 1황자의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루시우스가 이곳을 벗어나려 빠르게 걸음을 옮길 때였다.

퍽!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일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루시우스는 욕을 짓씹었다.

‘또다시 다른 이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건가…….’

***

기습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루시우스는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는 그 혼자였다.

그가 제대로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곧 빼빼 마른 남자와 굵은 구레나룻이 돋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녀석입니다. 나리.”

중년의 남자가 루시우스를 빤히 바라보며 품평하듯 말했다.

“호오, 꽤나 미형이로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루시우스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가늠했다.

하지만 손발이 묶인 탓에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폐위되었던 황자와 조금 닮은 것 같군.”

루시우스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고 그를 가만히 노려봤다. 그러자 중년의 남자가 덧붙였다.

“아니다. 내가 착각한 것 같군. 자세히 보니 전혀 달라. 천한 노예 따위가 폐황자를 닮았을 리가 없지.”

기분 나쁘게 킬킬 웃으며 중년의 남자가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

루시우스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추측하는 사이 빼빼 마른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

에시카는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대체 왜 이렇게 늦는 거지?”

그러나 늦어지는 루시우스의 귀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이던 것도 잠깐이었다.

‘일이 잘 풀려서 저녁 대접이라도 거하게 받는 거겠지.’

에시카는 저 좋을 대로 생각하며 딱딱하고 좁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눕자마자 졸음이 밀려들었다.

‘이제 이 고생도 곧 끝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두 발 편히 뻗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그다음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루시우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설마…… 혼자서만 잘 먹고 살겠다고 날 버린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술에 취한 밤이면 르네브의 이름을 곧잘 부르던 그였으니, 이제 와 자신을 모른 척 내팽개칠 가능성도 있었다.

‘루시우스, 잡히면 가만 안 둬!’

에시카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루시우스를 뒤쫓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여기가 알렌과의 약속 장소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에시카는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루시우스의 행방을 쫓았다.

“혹시 최근에 밝은 금발에 젊은 남자를 보셨나요?”

“그런 사람은 못 봤소만,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니라면 이만 가 주시오.”

가게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매몰차게 말했다.

에시카는 가게 주인을 찌릿 노려보고는 근처의 다른 가게로 들어갔다.

그러나 알렌과의 약속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게에다 아무리 물어보아도, 루시우스를 보았다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도 루시우스도 제법 눈에 띄는 외향을 가졌다.

해서 그의 행방을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에시카의 예상이 정확하게 빗나간 셈이었다.

“……감쪽같이 어디로 숨은 거야.”

에시카는 작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루시우스를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이곳까지 오려면 공용 마차를 타야 했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하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한숨만 내쉴 때였다.

“이런 날씨에 그런 얇디얇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다니. 계절감이 영 떨어지는 아가씨인 모양이로군.”

에시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준수한 외모의 젊은 남자가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이 주변을 뱅뱅 맴돌던데, 대체 무슨 일이야?”

“혹시 이 근처에 살아?”

에시카가 묻자 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근에 푸른 눈에 밝은 금발을 가진 남자를 본 적 있어?”

“글쎄다…….”

기억을 더듬는 듯 젊은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닌 탓에 몸은 피곤했고, 날이 저물면서 기온이 떨어져 추웠다.

에시카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 남자의 태도가 답답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봤어, 못 봤어. 그것만 말해.”

“못 본 것 같은데.”

젊은 남자가 곧장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괜한 시간 낭비만 했다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젊은 남자가 에시카에게 초록 두건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이거라도 목에 두르면 좀 낫지 않을까 해서.”

에시카는 근처 건물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이전과 비교하면 형편없었지만, 그건 귀족 사이에서나 그런 것이었다.

‘꾸미지 않더라도 본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이런 미인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고, 제 미모에 반한 남자가 친절을 베푼 것 같았다.

값나갈 만한 물건은 아닌 듯했지만, 추운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에시카는 남자에게서 받아 든 걸 목에 두르고는 근처 건물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따뜻하기도 했고, 입고 있는 옷과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에시카는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

“뭘. 잘 어울리네.”

그 말만 건네곤 남자가 담백하게 멀어졌다.

질척대며 추근거리지 않는 면도 제법 괜찮다 생각했을 때였다.

“아까부터 계속 혼자서 이 근처를 돌아다니던데…….”

이번에도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는 좀 전의 얄팍해 보이던 젊은 남자와 달리 인상이 좋아 보였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에시카는 곧장 루시우스의 인상착의를 중년의 사내에게 설명했다. 헛숨을 들이켠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런 남자는 보지 못했어.”

“…….”

고개를 주억거린 에시카는 그만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중년의 사내가 물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 오늘 밤 잘 곳은 있나?”

“그건 왜 물으세요?”

“사정이 딱해 보여서 그래. 원한다면 하룻밤 정도는 재워 줄 수 있어.”

에시카는 어찌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자 중년의 사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내 딸이 얼마 전에 결혼해서 비어 있는 방도 있고……. 아, 아가씨가 내 딸 같아서 그래. 젊은 아가씨가 묵을 만한 근처 여관은 값이 꽤 나가기도 하고.”

“……댁이 어딘데요?”

“여기.”

중년의 사내가 코앞이 건물을 가리켰다. 제법 부유한 편이었는지, 건물의 외관이 보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싫으면 관두고.”

에시카가 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중년의 사내가 몸을 돌리려 했다.

결국, 에시카는 중년의 사내를 뒤따라갔다. 초록색 천을 목에 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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